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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hyang Station
포향역 | ||
다른 문자 표기 | ||
로마자 | Phohyang | |
한자 | - | |
간체자 | - | |
일본어 | ポヒャン | |
주소 | ||
평안북도 신의주시 락원1동 | ||
관리역 등급 | ||
불명 (개천철도총국 관리) | ||
운영 기관 | ||
평의선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 | |
개업일 | ||
경의선 | 1906년 4월 3일 | |
열차거리표 | ||
평양 방면 룡 천← 7.1 ㎞ | 평의선 포 향 | 신의주청년 방면 남신의주3.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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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의선의 철도역. 신의주시 락원동 소재.경의선에서 이 역부터 북위 40도선 이북에 속한다.
2. 상세
이 역의 이름을 두고 락원역[1], 포향역, 신포향역으로 자료마다 엇갈리는데, 북한에서 2009년 발간한 철도역명유래에서 정확히 포향역으로 기재하고 있다. 개명 시기도 1990년 2월로 확실히 적어놓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개명되었기 때문에 국내 자료들마다 혼동이 온 것으로 보인다. 포향, 신포향은 지명이 아니라 사람 이름으로, 1984년 8월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여성당원인 신포향의 이름을 딴 것이다.[2]인근에 락원기계련합기업소 신포향주철공장이 있다.
역은 신의주시의 남부에 있으며, 천마군 만풍호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합류하는 삼교천의 하류가 이 역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이 역과 룡천역 사이에 립암역이라는 역이 존재했던 것 같으나, 아무래도 폐역된 듯하다. 구글어스 지도를 통해 그 인근을 보았을 때 시가지 비슷하게 인구밀도가 높아 보이는 곳을 지나치는데, 거기가 립암역 인근.
평라선에 락원역이 있는데, 이 락원역은 광복 직후까지 함주군 퇴조면이었던 곳을 바로 옆의 홍원군 삼포면과 합쳐서 락원군을 신설하면서 락원역으로 명칭이 바뀐 것. 참고로 그 락원역은 락원에서 유래했다. 여기 락원동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겠지만 이건 이미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지명이다. 인근의 락청동(樂淸洞)이 여기와 한 세트다. 아마 통일 되면 낙원역으로 되돌리게 될 것 같다.
승강장은 2면 4선. 작기도 작지만 아주 좁다. 게다가 인근에 인입선이 쭉쭉 뻗어나가 있어서 이건 뭐 선로용량이 버텨날지 의심스러운 수준.
신의주역과 이 역 사이에 통학열차가 운행된 적이 있다고 한다.
[1] 두음법칙 미적용시의 명칭이다.두음법칙을 적용할 경우 낙원역.[2] 신포향은 당시 락원기계제작소 주물직장(현재 락원기계련합기업소 신포향주철공장) 당원이었는데, 1952년 6월 21일 공장 당세포총회(공장의 당원들로 구성된 당세포 회의)에 참가한 김일성이 전후복구 문제를 걱정하자 "우리 로동계급이 있는 한 복구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반드시 복구해놓겠다"며 호언장담, 자신이 근무하는 주물직장의 당원 10명과 함께 자신의 결의를 끝내 관철하여 김일성이 훗날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다. 이 일화는 1982년 '언제나 한마음', 1983년 '그날의 맹세', 1985년 '고결한 삶'으로 전쟁 시기부터 1960년대에 결의를 관철하기까지 무려 3편의 영화로 일생이 조명되어 1988년 200일 전투를 할 때 전국적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비슷한 사례로 북한은 50년대 내내 종파분자(김일성의 결정과 방침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자들)들을 없애는 투쟁을 벌렸는데, 1957년 남포 태성리에서 현지지도하고 있는 김일성을 붙잡고 "수상님, 종파놈들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아무렴 종파놈들이 이기겠습니까. 우리들은 수상님만을 끝까지 지지합니다." 라고 말했다는 태성할머니가 있다. 이 태성할머니는 김화숙이라는 노인으로, 종파사건의 상징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으며 며느리인 함운장은 태성리 고창농장에서 관리위원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