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로두카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 |||
2003 | 2004 | 2005 | 2006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4번 | ||||
제리 브룩스 (1993) | → | 폴 로두카 (1998) | → | 스티브 콜리어 (2003)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16번 | ||||
마크 그루질라넥 (1998) | → | 폴 로두카 (1999~2004) | → | 안드레 이디어 (2006~2017) |
플로리다 말린스 등번호 14번 | ||||
토드 홀랜스워스 (2003) | → | 폴 로두카 (2004) | → | 조시 윌링햄 (2004~2008) |
플로리다 말린스 등번호 16번 | ||||
윌 코데로 (2004) | → | 폴 로두카 (2005) | → | 로건 켄싱 (2006) |
뉴욕 메츠 등번호 16번 | ||||
더그 민케이비치 (2005) | → | 폴 로두카 (2006~2007) | → | 앙헬 파간 (2008~2011) |
워싱턴 내셔널스 등번호 16번 | ||||
윌리 모 페냐 (2007) | → | 폴 로두카 (2008) | → | 조시 윌링햄 (2009~2010) |
플로리다 말린스 등번호 16번 | ||||
로건 켄싱 (2006) | → | 폴 로두카 (2008) | → | 브라이언 피터슨 (2010~2011) |
폴 앤서니 로두카 Paul Anthony Lo Duca | |
출생 | 1972년 4월 12일 ([age(1972-04-12)]세) |
뉴욕 주 브루클린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
신체 | 178cm, 87kg |
포지션 | 포수, 1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3년 드래프트 25라운드 (전체 690번, LAD) |
소속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8~2004) 플로리다 말린스 (2004~2005) 뉴욕 메츠 (2006~2007) 워싱턴 내셔널스 (2008) 플로리다 말린스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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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국적의 前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이며 포지션은 포수이다.2. 선수 경력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시절부터 4할 타율을 찍어서 MVP에 뽑히기도 했고, 37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타격 소질이 뛰어난 포수였으나, 포수는 물론이고 야구 선수로서도 작은 체격 때문인지 1993년 드래프트 25라운드라는 낮은 순위에 지명되었다. 문제는 그가 지명되던 시점에서 다저스의 안방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바로 갓 포텐을 터뜨린 마이크 피아자였다는 것. 대학교 졸업 후 프로행을 택한 로두카는 다저스 입단 당시에 이미 24살이었지만 피아자로 인해 하염없이 마이너리그를 달구고 있어야만 했고, 피아자가 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된 이후에야 메이저리그 데뷔를 경험할 수 있었다.1998년 콜업 된후 눈도장을 찍은 후에 2001년부터는 주전 자리를 꿰찬[1] 로두카는 마이크 소시아와 비슷한 정교한 타격과 준수한 수비를 바탕으로 2000년대 초반 내셔널리그 최고의 포수 중 하나로 발돋움하는데 성공한다.[2]
2004 시즌 중간에 최희섭과 브래드 페니, 좌완투수 유망주 빌 머피를 받는 대가로 기예르모 모타, 후안 엔카나시온과 함께 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되었다.[3] 말린스에서도 로두카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줬지만, 2003 월드 시리즈 우승 이후 또 한번 페이롤 절감을 위해 파이어 세일을 단행하던 말린스에게, 로두카는 너무나 고액 연봉자였고 2005 시즌 종료 이후 다시 같은 지구의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된다.
메츠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다시 한 번 올스타에 선출되었고, 메츠의 2006년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이끌었지만 2007년부터 부상으로 인해 급격히 포수 능력이 하락[4]하면서 메츠는 로두카를 잡지 않기로 결정한다. 로두카에게 러브콜을 날린 곳은 역시나 같은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의 워싱턴 내셔널스. 1년간 5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지만 부상으로 골골거리면서 제대로 된 활약도 펼치지 못하다가 8월에 그대로 방출된다. 이후 친정팀 말린스로 돌아가 2달 정도 잠깐 활약을 펼쳤지만, 공수 모두에서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는 그에게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시하는 구단은 없었고 2009년 한 해를 무직[5]으로 지내면서 그렇게 은퇴하나 싶었다. 그런데 2010 시즌을 앞두고 백업포수를 구하던 콜로라도 로키스와 다시 계약을 맺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이미 뚜렷하게 진행중이었던 하향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메이저에 올라오지 못한 채 결국 시즌 중간에 방출된 뒤 은퇴를 선언한다.
3.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때는 4차례나 올스타에 오른 공수겸장의 A급 포수로 명성을 떨쳤으며, 포수임에도 홈런을 뻥뻥 때려내던 전임자 마이크 피아자와는 달리 컨택에 중심을 둔 유형의 선수였다. 통산 타율이 .286로 꽤 높은 편이며 2001년에는 .320의 고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 당시에는 클러치 히터로 인식되기도 했다. 수비 면에서도 경기 운영이나 리더십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통산 도루 저지율은 31%로 평범하지만, 말년에 다 까먹은 탓으로 데뷔 초창기에는 강견을 자랑하던 포수였다.4. 논란 및 사건사고
4.1. 도박 및 불륜 사건
2007시즌 후 로두카가 원정 경기 때마다 카지노를 출입했다는 폭로가 터졌다. 로두카 본인은 부인했지만 이 과정에서 증언들이 여럿 나오며 결국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다. 메츠가 로두카와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것도 성적과 더불어 이 논란이 크게 작용했다.4.2. 금지 약물 복용
2007년 12월 미첼 리포트가 발간되었고, 여기서 폴 로두카는 성장 호르몬 복용자로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당시 뉴욕 메츠의 트레이너였던 커크 래돔스키에게 3000불 가량을 지불하고 약물을 구입한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근데 이 정황이 로두카의 자필 서명이 담긴 영수증이었다. 심지어 래돔스키의 집에서 발견된 만큼, 사실상 약쟁이 확정. 여기에 한 술 더떠서 로두카는 래돔스키에게 다저스 시절 동료였던 케빈 브라운[6]과 에릭 가니에 등을 소개시켜준것으로 알려져있다.이후 한참 동안 자신의 약물 복용에 대해 침묵을 지키던 로두카는 2013년에야 트위터에서 자신의 약물복용을 시인했다. 그런데 이 시인 발언이 굉장히 미묘한 뉘앙스여서 또 욕을 먹었다. "나는 성장호르몬을 복용했고 그게 썩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약물을 복용한다고 해서 누구나 레전드급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고칠 필요가 있다.(I took PEDs and I'm not proud of it, but people that think you can take a shot or a pill and play like the legends on that ballot need help.)"[7] 현재는 삭제되었다.
4.3. 명예 훼손 사건
"자동차 받은 심판, S존 조작했다" 은퇴한 빅리거 독설에 벌금 폭탄2019년, 로두카는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메츠 시절 동료였던 빌리 와그너가 심판이었던 조 웨스트에게 자신의 클래식 카를 빌려주는 대가로 스트라이크 존을 유리하게 조작한 적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에 웨스트는 "와그너와 로두카가 배터리를 이룬 경기에서 주심을 보지 않았다"며 완강히 부인했고, 명예훼손 혐의로 로두카를 고발했다.
법원은 2021년 10월 웨스트의 손을 들어 로두카에게 5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1] 2001년에는 전담 포수를 둔 박찬호 때문에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에는 주로 1루를 봤다.[2] 소시아와 피아자, 그리고 로두카 모두 순서대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주전 포수를 맡은 이탈리아계 선수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팬들 사이에서 자주 비교되었다.[3] 로두카는 당시 주전 포수였기 때문에 꽤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페니가 2년 뒤 16승을 거두며 다저스에서 맹활약하고 러셀 마틴을 발굴함으로써 논란은 종식되었다.[4] 그래서 이 시기부터 포수뿐만 아니라 1루와 외야도 겸직하기 시작한다.[5] 선수로 뛸 팀을 못 구했을 뿐이지 해설가로 활동했다.[6] 이 쪽은 약인지도 모르고 속아서 먹었다![7] ballot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 2013년 배리 본즈가 명예의 전당 첫 투표에서 36%의 득표율을 달성한 후에 쓴 트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