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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1:32:20

표도르 우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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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해군 흑해함대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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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해군 흑해 함대 사령관
표도르 표도로비치 우샤코프
Фёдор Фёдорович Ушаков
출생 1745년 2월 24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현 야로슬로프 주 로마노프스키 지구 부르나코보 마을
(현재)러시아 야로슬라블 라빈스크군
사망 1817년 10월 14일(향년 72세)
러시아 제국 탐보프 현 템니코프스키 군 알렉세옙카
(현재)러시아 모르드바 공화국 템니코프스키 군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해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최종 계급 러시아 제국 해군
최종 계급 대장
복무 기간 1761년 2월 15일 ~ 1807년 1월 17일
경력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사령관
1804년 ~ 1807년
발트 육군 함대 사령관
1802년 ~ 1804년
지중해 러시아 함대 사령관
1798년 ~ 1800년
흑해 함대 사령관
1790년 ~ 1798년
세바스토폴 항구 및 함대 사령관
1788년 ~ 1790년
참전 러시아-튀르크 전쟁(제 7차, 제 8차)
피도시니 전투
케르치 전투
텐트라 곷 전투
칼리아크리아 전투
나폴레옹 전쟁
● 제 2차 대프랑스 동맹(지중해)
기함 16문 코르벳 모레야
16문 코르벳 모돈
26문 프리깃함 성 파벨
66문 전열함 성 파벨
80문 전열함 라즈데스뜨보

1. 개요2. 생애3. 가계4. 계급5. 업적
5.1. 국내 기념5.2. 해외 기념5.3. 우상화
6. 수상 및 서훈내역7. 관련문서8. 둘러보기9.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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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표도르 우샤코프(Фёдор Ушаков)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써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 복무하였으며, 복무기간동안 흑해근방에서 복무와 러시아-튀르크 전쟁프랑스 혁명 전쟁의 1차와 2차에 참전하였다. 우샤코프가 지휘했던 모든 전투에서는 승리를 하였고, 러시아 해군 역사에서 가장 유능한 제독중 한명이다.

2. 생애

표도르 우샤코프는 1745년 2월 24일 모스크바현 야로슬로프 지방 부르나코보 마을에서 귀족 가문의 7자녀중 4째로 태어났으며, 주현절에 호필레보 마을 오스트로프스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본래 병으로 1761년 ~ 1766년에 해군생도단을 졸업하였고 발트 함대에서 복무를 시작하였다.

1768년 우샤코프는 소위 계급을 달고 흑해쪽으로 재배치되었다. 제 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여하여 알렉세이 세냐빈(Алексей Наумович Сенявин)제독의 아조프 소함대를 재조직하면서 세냐빈 제독은 장교들을 직접 최초 선발했는데, 우샤코프는 그 중 한 명으로 뽑혔다. 그리곤 다음해에 중위로 진급하였다. 1770년에 처음으로 프램선(바지선의 일종)의 함장이되었다.

1772년 우샤코프는 돈 강에 침몰한 수송선으로부터 보급품을 구해내는 과정에서 지휘력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런 전공이 해군위원회 부위원장 이반 체르니셰프(Иван Григорьевич Чернышёв)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우샤코프는 그의 인정에 감사를 전했다. 다음해 7월에는 크림반도의 전열함소함대의 우편함(Packet boat)의 함장이 되었다.

1773년 7월경 16문 코르벳 마례야"Морея"의 제3대 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배의 결함이 수리 불가능 판정을 받아 다음해에 해체되었다. 10월 코르벳 마돈"Модон"의 4대 함장이 되었지만 마돈 또한 상태가 좋지 않았고, 세냐빈 제독은 수리를 위해 마돈을 발라클라바(Балаклава)에서 타간로크(Таганрог)로 이동하도록 지시하였다. 마돈은 두 차례의 출항 시도에서 선체 누수가 일어나 발라클라바만에 좌초되었다. 1778년 8월에야 마돈의 수리가 완료되었고, 이후 케르치(Керчь) 항으로 인도되었다.

1775년 상위가 된 우샤코프는 26문 프리깃인 성 파벨“Святой Павель"을 지휘하였다. 1776~1779년에는 상업용 화물상선으로 위장한 프리깃함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흑해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아 임무는 실패하게 되었고, 리보르노(Livorno)로 돌아갈 수 밖에 없얼다.

1780년 우샤코프 상위는 리빈스크를 거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졌다. 우샤코프는 예카테리나 보론초바(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Воронцова, 세냐빈 제독의 딸이며, 보론초프 백작의 부인)와 그리고리 포템킨(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отёмкин-Таврический)의 후원으로 황제의 함선의 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전열함 근무로 재배치되었다. 포템킨(예카테리나 2세의 총신으로, 육군원수 겸 상원의원, 총독 등 겸직)은 특히 세냐빈 제독과 우샤코프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780년 ~ 1782년 무장 중립 동맹에 의해서 연합 지중해 함대 에 러시아 함선이 들어가게 되어 우샤코프는 해당 함대 소속 빅토르"Виктор"함의 함장으로서 지중해 내 러시아 제국 상선 보호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1783년 러시아 제국크림 칸국을 정복하여 흑해의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크림 반도를 얻자 흑해 함대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고, 우샤코프는 그 과정 속에서 헤르손(Херсон)에서의 모든 함선 건조를 감독하였다. 같은 해에 큰 전염병이 유행하자 우샤코프는 신속한 대처로 많은 수병의 목숨을 구했다. 1785년에는 헤르손 전염병 대처와 성공적 훈련 및 지휘의 공로를 인정하여 성 블라디미르 훈장을 수훈받았다. 이듬해 8월에 66문 전열함 성 파벨"Святой Павел"에 승선하여 헤르손에서 세바스토폴에 도착하였다. 세바스토폴에서는 기지 건설에 일조했다.

1787년 8월경 1786년부터 세바스토폴 함대의 지휘관으로 우샤코프의 직속 상관 마르코 보이노비치(Марко Иванович Войнович)가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더 큰 영향력을 획득한 보이노비치 소장의 지원 하에 우샤코프 대령은 1787년 ~ 1791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기간 동안 66문 전열함 성 파벨"Святой Павел"의 함장으로 세바스토폴 함대의 선봉부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첫 항해중 폭풍을 만나 루멜리아 해안에 발이 묶이면서 어떠한 성과도 없이 오히려 한 척이 침몰하고 한 척은 돛대 파손으로 튀르크 해군에게 나포되는 실패를 겪는다. 장시간 이어진 폭풍으로 모든 함선이 누더기 상태로 세바스토폴에 귀항, 장기간 수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우샤코프는 손실에도 불구하고 자연재해인 폭풍을 맞아 버텨내고 귀항을 이뤄내어 노련한 지휘관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1788년 7월 피도시니 전투(현 우크라이나 즈미이니 섬 근해[1])가 발생하기 직전, 오차코프(현 미콜라이프 남부 드네프르강 어귀부분 항구도시)근해 및 드네프르강 어귀에 오스만 해군 함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케르치 함대, 세바스토폴 함대의 공격과 육지의 포템킨의 공격으로 오스만 함대는 패배하여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후퇴 도중 파도시니 근해에서 세바스토폴 함대와 조우하여 전투가 일어났지만 전력이 열세이던 오스만 해군이 후퇴하였고, 바람의 방향은 오스만 해군을 향하고 있었다. 이에 우샤코프 선봉대는 2km가 넘는 항적기동(Кильватерная колонна)을 보여주며 새로운 함대 전술의 지평을 열었다. 첫 조우에서 러시아 프리깃함 2척이 오스만 해군 기함에 집중 타격을 가해 오스만 함대 본대로부터 이격시켰고, 우샤코프 대령의 전열함은 이들 프리깃함을 돕기 위해 빠르게 기동하여 오스만 해군 지휘관 카푸단 파샤가 승좌한 기함을 양쪽에서 포위했다. 프리깃의 공격과 우샤코프의 전열함의 집중 사격으로 기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뒤따라오던 세바스토폴 함대가 오스만 본대의 지원을 차단하였다. 뒤따르던 오스만 프리깃들이 기함을 구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실패를 맛볼 뿐이었다. 이후 세바스토폴 함대의 프리깃 한 척이 일제사격하여 기함의 선미부분과 마스트가 손상되자 기함도 어쩔 수 없이 전장을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했고, 뒤따르던 본대 또한 신속하게 후퇴하였다. 오스만 해군 함대는 포스포루스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러시아 해군은 세바스토폴로 이동하였다. 이 피도니시 전투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었고, 1788년 말 우샤코프 대령은 세바스토폴 함대와 항구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789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포템킨은 보이노비치에게 불만을 품어 세바스토폴 함대사령관 직위로부터 해제, 카스피 해로 배치시켰지만 보이노비치는 배치 명령을 거부, 사직하였고, 이에 우샤코프가 모든 직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1790년 7월 8일 보이노비치 후임으로 세바스토폴 함대 사령관이 된 우샤코프는 또다시 오스만 해군과의 전투에 나서게 된다. 오스만 해군의 50척 이상의 함대가 크림 반도 상륙을 위해 접근 중에 있었던 것이다. 이를 포착한 66문 전열함 마리야 막달레나"Мария Магдалина" 함장 가브리일 골렌킨(Гавриил Кузьмич Голенкин) 대령이 선봉장으로서 함포 사격을 통해 오스만 해군 함대에게 혼란을 야기하였지만 일시적이었고, 카푸단 파샤는 적의 공격을 버티고 반격하면서 약한 부분을 정비해가며 계속 북상하였다.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러시아 측 포탄이 오스만 해군 함선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우샤코프 소장은 선봉대를 불러 본대가 후퇴하는 동안 우회 후 오스만 함대를 압박해 본대 간 교전 거리를 좁히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우샤코프 소장의 판단의 의도를 알지 못했던 오스만 해군 함대는 후퇴하는 러시아 해군을 보고 기뻐했다. 그런 와중, 선봉대가 제 시간에 오스만 함대 후위에서 나타났다. 우샤코프 소장은 풍향이 유리하게 변하자 사거리가 짧은 포도탄을 일반포로 난사하면서 카로네이드 포 또한 사격하여 일제사격과 속사로 공격했다. 오스만 함대는 포격과 바람의 변화로 혼란에 빠졌고, 위와 같은 태킹Tacking 전술로 우샤코프 기함 80문 전열함 로줴스뜨버 흐리스또버"Рождество Христово"함과 66문 전열함 프레오브라줴니예 고스빠지녜"Преображение Господине"함의 일제사격은 오스만 함대에 엄청난 파괴와 손실을 안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상황에서 오스만 해군은 카푸단 파샤은 오판하여 모든 함선을 회전할 것을 신호하였는데 기함의 위치를 인지하지 않은 상황에서 회전하는 바람에 기함이 가장 최선두가 되었다. 러시아의 방어선이 오스만 해군의 손에 넘어갔지만 결코 좋은 상황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샤코프 소장의 함대는 회전하는 과정에서 전선을 완료하여 돌아 우측으로 움직인 것에 위협에서 벗어났다. 세바스토폴 함대의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고 공격을 버티지 못한 오스만 해군은 후퇴를 하기 시작했고 몇몇 함선은 해안가로 도망갔다. 그러나 추격하기에는 오스만 해군의 군함이 항해에 용이하게 설계된 군함이었기에 러시아측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오스만 해군은 러시아 해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밤사이에 돌아갔다.

우샤코프의 창의적이고 비범한 전술적 결정을 가질 수 있는 숙련된 지휘관임을 입증하였고 그는 망설임이 없이 해군을 지휘할수있었다. 또 한 부하지휘관들에게 "기회에 따라서" 지휘를 할수있게 하였고, 이번전투로 해상훈련과 화력훈련의 이점을 강조하였다. 우샤코프의 장점은 주력함과 주력함을 대응하여 포사용을 최대로 활용한점이다.

케르치 전투는 러시아나 오스만의 양측다 큰 손실은 없었지만 오스만 해군 사령부의 계획을 꺽을수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 해군의 패배는 곧 수도 위협(코스탄티니예)이 될 수 있기에 흑해에서의 해군 작전에서 사기가 자신감을 떨어트렸고, 오스만 제국 포르타Bâbıâlî에서는 "만약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공격해 올 경우에 대비하여 수도 방어도 수호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1790년 8월 28일 오스만 해군이 텐드리브스카 코사Тендровская коса와 하드지베이Хаджибей에 상륙했는데 예기지않고 우연하게 흑해 함대에게 발견되었으며, 우샤코프 소장은 30여척으로 구성하여 3열로 항적기동하였다. 갑작스런 러시아 함대출현으로 오스만 함대는 혼란에 빠졌으며 수적에 우위를 점했지만 밧줄을 자르고 다뉴브 강으로 후퇴하였고, 전열함은 많은 거리를 이동하였다. 카푸단 파샤는 후위대와 우현에 위치한 함선과 연합하여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우샤코프 소장은 접근하는 과정에서 주변 항구에 정박 중인 군함에 신호하여 예비군함을 동원하였다. 케르치 전투로 창의적인 승리와 우샤코프의 결단으로 휘하 지휘관이 높은 수준을 보였는데 역방향으로 부는 바람을 뚫으며 매우빠른속도로 전투대형을 펼쳤고 3척의 예비 프리깃함만 남기도 전군함이 전선을 유지하였다. 15시가 돌입하자 양측간에 전투가 시작되고 러시아 함대는 강력한 포격을 다행히 바람을 이용하여 피하였으나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함대는 계속 가까이 다가가며 오스만 함대의 최전방까지 맹렬히 돌진하였다. 우샤코프 소장의 기함은 3척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그들을 라인에서 후퇴시켰다. 카푸단 파샤등 지휘관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심각하였다. 17시가 되자 오스만 함대의 전선은 거이 괘멸수준이었고, 이전에 예비프리깃함을 전선이 무너진 곳으로 투입되었다. 오스만 함대는 질서없이 후퇴를 시작하였고, 몇척의 군함이 다뉴브 강을 향해 이동하자 덩다라 어쩔수 없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전투지는 해가 지고 바람이 강해지자 우샤코프 소장은 추격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함대는 추격을 멈추었지만 그중 러시아 함대의 44문 프리깃 아므브로시 메디올란"Амвросий Медиоланский"은 오스만 함대와 같이 정박하게 되었고 함장 미하일 넬레딘스카야(М. Н. Нелединской)는 어쩔수 없이 오스만 함대와 같이 이동을 하였지만 닻을 늦게올려 가장 뒤어서 이동하다가 함대에서 빠져나와 위험이 낮아질때까지 기다리다가 세인트 앤드류깃발을 올리고 본대로 복귀하였다. 이시각 우샤코프 소장도 뿔뿔히 흩혀진 오스만 함대를 추격을 명령하였다. 몇시간뒤 심하게 손상되어 전열에서 뒤쳐진 2척군함을 발견되었는데 74문 전열함 카푸다니야"Капудания"과 66문 전열함 멜레키 바리"Мелеки Бахри"이었다. 카푸다니야는 주력함으로 사이디 베이Саид-бея의 기함이었었는데 이들은 완강히 저항하였고 침몰하였으며, 멜리키 바리는 지휘관 카파 알리Кара-Али는 이미 전사한 상태였고 항복하여 러시아가 나포하여 요한 프롓떼차로 재취역하였다. 전투는 러시아 군사연대기에 흔적이 남게되었다.[2]

이날의 승리는 흑해 함대가 가장 지휘력이 정점이었던 시기로 이는 우샤코프 소장의 지휘력과 리더십에서 발휘된 것이다. 그는 이전에 전례없던 예비군을 동원하였고, 프리깃의 화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또 함대의 안정성은 곧 지휘관과 기함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인데 기함과 함대사령관의 전사는 함대의 붕괴가 발생된다고 지휘관들에게 명확히 전달하였다. 흑해 함대가 열세에도 지리멸렬하지 않고 결집한점은 우샤코프가 가장 적극적이었고 책임감을 가지고 가장 위험한 곳에서 전투를 치렀는데 이는 소속부하들에게 모범이 되었으며, 동시에 하급지휘관이라고 할지라도 우샤코프는 이들을 지휘권을 침혜하지 않았다.

1791년 7월 31일 칼리아크리아 곷에서 전투가 일어났으며, 초기는 흑해 함대는 불리한 전술적위치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해군는 갑작스런 흑해 함대의 출현으로 혼란했고 정박중인 밧줄을 자르고 도망가는 과정에 가파른 파도와 거센바람으로 아군군함끼리 충돌하여 피해가 발생했다. 알제리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는 바람을 이기기위해 노력했으나 이전 전투처럼 흑해 함대는 선두함선을 우회하였고 기동력이 빨랐던 기함을 사용하여 적의 선두함선을 추월하여 알제리 파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기함은 사거리를 확보하고 정확한 공격으로 적군함에 화재가 일어나고 큰 피해를 주었다. 극히 짧은 거리에서 흑해함대는 오스만 해군를 공격하였다. 양측 전군함이 서로 공격하면서 싸웠으나 흑해함대가 이겼고, 오스만함대는 군함간에 범위가 너무좁았고 흑해함대는 군함간에 범위가 멀었다. 오스만 함대는 사기가 꺽이자 선두군함은 흑해함대쪽으로 선회시키고 전투에서 이탈하였다. 오스만 해군는 추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포탄을 쏴 연기를 만들었고 더구나 해가 지는 바람에 20시쯤 흑해 함대는 추격을 중단하고 정박하였다. 8월 1일 새벽 지평선에는 어떠한 적의 군함이 보이지 않았다. 야전사령관 니콜라이 레프닌(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Репнин)은 세바스토폴로 귀환을 명령하였다.

1792년 11월 우샤코프 소장은 차리나 예카테리나 2세가 불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가

1793년 세바스토폴로 돌아왔으며, 9월에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794년 ~ 1798년 프랑스 혁명으로 우샤코프 중장은 러시아 제국의 선박 보호와 해안 수호를 위해서 매년 흑해와 지중해로 순항 항해를 나갔다.

1790년 ~ 1800년 나폴레옹 전쟁제 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차르 파벨 1세는 우샤코프 중장을 지중해 러시아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우샤코프 중장은 이오니아 제도점령했으며, 이집트에서 나폴레옹군을 봉쇄하였고, 대영제국 해군 호레이쇼 넬슨 제독을 지원하여 몰타점령을 지원하였다.

우샤코프 중장의 지중해 전쟁동안 에프타니소스 공화국Ἑπτάνησος Πολιτεία를 창설하여 정치가로 활동했다. 이오니아 제도를 점령하였고, 케르푸 섬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프랑스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하기위해 안코나, 제노바, 나폴리, 로마를 봉쇄하거나 공격하였다. 특히 몰타 섬을 봉쇄하자는 넬슨 제독과 함락시켜야 한다는 우샤코프 중장간에 의견이 맞지는 않았다. 1799년 대장(제독)으로 진급하였다. 1800년에 우샤코프 제독은 세바스토폴로 돌아왔다. 떠날때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은 우샤코프 제독에게 감사의 표시로 훈장을 수여했다.

1802년 우샤코프 제독은 발트 육군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8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807년 초 우샤코프 제독은 퇴역을 요청하여 승인 받아 46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물러났다.

1810년에는 표트르 우샤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았고. 탐보프 주 알렉세예프카 마을에 정착하였다. 1812년 나폴레옹 황제러시아 원정당시 조국 전쟁에 직접적인 참여는 하지 않았고 지역민병대의 민병대장으로 예정되었지만, 당시 병을 앓고 있었기에 포기하였지만, 템니코프스키 연대Темниковского полка와 병원설립에 후원을 하였다. 우샤코프는 말년에 수도원 건립과 여러곳에 많은 후원을 하였다. 예카테린부르크에 노보티흐빈 수도원 건립에 도움을 주었다.

1817년 10월 2일 알렉세예프카의 자신의 자택에서 사망하였고, 장례식은 템니코프 도시의 수도원에서 치렀고, 관을 사낙사르 수도원으로 운반되어 매장되었다.

3. 가계


4. 계급

5. 업적

5.1. 국내 기념

러시아에는 우샤코프 제독을 기리고 기념하기위해 여러 곳에 기념하고 있다.

5.2. 해외 기념

5.3. 우상화

6. 수상 및 서훈내역

7. 관련문서

8. 둘러보기

9. 외부링크



[1]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당시 초기 러시아 해군 모스크바 미사일 순양함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엿을 먹인 그 섬이다.[2] 1995년 3월 13일에 러시아 연방은 군사적영광의 날로 제정하여 승리에 날에서 군사의 날로 변모하였다.[3] 형제에 대해서 알려진바는 없다.[4] 호레이쇼 넬슨 제독 문서 초상화 모자에 있는것이 첼렝크로 군사훈장으로 보석으로 장식이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