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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1:29:38

표트르 루먄체프

파일:Rumjanzew-sadunaiski.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7년 전쟁2.3. 이후의 경력

1. 개요

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умя́нцев-Задунайский(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루먄체프-자두나이스키)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육군 원수. 7년 전쟁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루먄체프는 알렉산드로 루만체프 백작과 안드레이 마테예프 백작의 딸인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표트르 대제와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루먄체프는 표트르 대제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한 루만체프는 예카테리나 2세의 측근이 되는 프라스코브야 브루스와도 밀접한 관계였다.

루먄체프는 이른 나이부터 프레브라젠스키 친위대[1]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고 1739년 베를린으로 파견된 러시아 외교관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러시아로 소환되어 젊은 귀족들이 모이는 저택으로 보내졌다가 2달 만에 뮌니히 장군의 추천에 힘입어 군대에 복귀했다.

루먄체프는 1741년부터 1743년까지 진행된 스웨덴과의 전쟁에 참여해 아버지 밑에서 전장에서 활약했다. 특히 헬싱보리 포위전에서 용기를 발휘해 러시아 제국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743년, 루먄체프는 대위로 승진한 후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에게 오보 평화 협약 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그의 총명함과 담대함을 마음에 들어해 대위에서 곧장 대령으로 승진시켜주고 보로네즈스키 보병대 사령관에 임명했다. 또한 그와 그의 아버지는 백작 칭호를 받았다.

1748년, 루먄체프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한 러시아군에 합세해 라인강 전선을 향한 러시아군의 행진에 참가했지만 러시아군이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이 종결되면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2.2. 7년 전쟁

7년 전쟁 초기인 1757년, 루만쳬프 소장은 동프로이센을 향한 러시아군의 공세에 가담해 1개 군단을 지휘했다. 그의 군단은 6월 중순까지 코브노 맞은편 빌리야 강 우측 둑에 있는 스테판 표도로비치 아프락신 원수의 본대와 교착점을 만들었다. 이후 두 척의 보트에 의해 코브노로 순차적으로 이동하던 루먄체프는 8월 30일 프로이센군이 갑작스럽게 기습하면서 벌어진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로 아군이 위태로워지자 전투가 끝날 무렵 휘하 부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다. 적 구원군이 오는 걸 확인한 프로이센군은 즉시 철수했다. 그 후 아프락신 원수는 더이상의 원정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철수했고 루먄체프 역시 그를 따라 러시아로 귀환했다.

1758년 1월,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을 향한 2차 침공을 개시했다. 그해 1월 16일, 루먄체프의 분견대는 틸지트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접수했다. 이에 틸지트로 이동하던 루먄체프는 1월 31일 프로이센군이 엘빙 지역에 있다는 보고를 받자 후사르 400명을 파견해 프로이센 분견대를 차단하고 엘빙 일대를 평정하게 했다. 그리고 2월 중순, 루먄체프는 제1 사단의 중장으로 발탁되었다. 2월 22일, 루먄체프는 숙영지를 떠나 엘빙과 비슬라를 향해 행진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1사단에서 교체되면서 다른 임무를 맡은 루먄체프는 6월 9일 기병대를 이끌고 비슬라 강을 건너 노이엔부르크에 진을 쳤다.

1758년 6월 29일, 루먄체프는 그의 선봉대 중 한 부대가 드레헤임성을 함락시키고 20명의 포로들을 확보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초 러시아군이 브란덴부르크 침공을 진행했을 때 루먄체프는 그의 군단과 함께 슈나이데뮐에서 대기했다. 7월 20일 브론키에 있는 탄약고에서 물자를 확보해 드레스덴의 수비대에게 보급하라는 지시를 받은 루먄체프는 모든 후사르들을 슈베린으로 파견하면서 브란덴부르크 변경지를 따라 정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7월 말까지 전 후사르 부대가 드레고마르크 마을까지 진군하면서 러시아군 본대와 평행하게 진을 쳤다.

8월 3일, 루먄체프는 콜베르크 요새의 수비대를 정찰하기 위해 경기병 부대를 코슬린 쪽으로 이동시켰다. 8월 6일 전 후사르 부대와 합류한 루먄체프는 8월 8일 드레스덴, 스텐베르크, 손넨베르크에 3개의 소규모 분견대를 파견해 프로이센군의 위치를 정찰했다. 8월 10일, 루먄체프의 기병대는 괴니히스발트로부터 알트 소르지를 거처 랜즈베르크까지 진군했다. 8월 13일, 그는 그의 기병대와 함께 랜즈베르크에서 솔진을 거쳐 슈타르가르트까지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25일까지 스타르가르트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다가 8월 25일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대혈전을 벌이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러시아 본대가 러시아로 철수하자, 루먄체프의 군단 역시 헬름노로 이동해 겨울 숙영지를 건설했다.

1759년,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을 향한 세번째 공세를 개시했다. 8월 12일, 루먄체프는 중앙에 배치된 3사단을 이끌고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 참가해 아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베를린으로 진격하자는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에른스트 기데온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 후 1760년 9월 11일, 러시아군 총사령관 빌림 빌리모비치 페르모르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를 향한 공세를 완수한 뒤 베를린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군은 헤른슈타트를 떠나 고라우까지 진군했다. 이때 루먄체프는 베를린을 향한 별도의 공세를 맡은 러시아 분견대에 포함되어 오데르강 우측 둑에 위치한 크로센에 주둔했다. 1761년, 루먄체프는 포메른으로 진군해 스웨덴군과 합류하는 일련의 작전을 개시했다. 6월 1일, 루먄체프는 콜니츠에 도착했고 6월 8일 루멜스부르크에 도착했으며, 6월 14일에는 카를리노에 이르렀다. 그 후 그의 군대는 포메른의 여러 도시들을 점거하면서 각지에서 장정들을 징집해 병력을 보강해 2만 7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다.

8월 18일, 루먄체프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마소우와 노소우코를 향해 진군해 8월 22일 콜베르크 요새로부터 12km 떨어진 퀘친까지 진군했다. 8월 24일, 루먄체프는 콜베르크 요새 공격을 감행해 9월 17일 밤부터 18일 새벽까지 해변에 세워진 참호들을 공략했다. 또한 9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까지 그뤼네 샨체와 스턴츠찬츠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러시아군은 처음에 그뤼네 샨체를 점령했지만 곧 프로이센 5개 보병 대대의 역습으로 후퇴했다. 10월 22일, 루먄체프는 프레트민으로 진군해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프로이센군을 공격했다. 프로이센군은 하루 종일 저항했으나 여의치 않자 야음을 틈타 물러났고, 러시아군은 다음날 진지를 점령했다.

루먄체프는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트립토우를 포위해 그곳을 점령하고 1,800명의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11월 중순, 콜베르크 요새를 포위한 루먄체프는 12월 1일 포격을 잠시 중지하고 요새 수비군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포격을 재개해 12월 16일 마침내 항복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콜베르크 요새를 함락시킨 루먄체프는 2,930명의 적 병사들을 생포했으며 대포 146문, 탄약 5만 발, 포탄 3만 개, 군기 289개를 노획했고 요새에 억류되어 있던 236명의 러시아군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이후 콜베르크 요새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던 루먄체프는 1762년 1월에 즉위한 표트르 3세가 철수 명령을 내리자 러시아로 귀환했다.

2.3. 이후의 경력

1764년, 루먄체프는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우크라이나의 최고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1796년 사망할 때까지 32년간 우크라이나의 주지사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1768년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일어나자, 루먄체프는 군대를 지휘해 아조프를 함락하러 진군했다. 그는 7월 7일 라르가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고 8월 1일 카훌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오스만 제국군을 섬멸했다. 이후 그는 도나우 강을 건너 왈라키아 공국몰다비아 공국으로 진군했고, 예카테리나 2세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육군 원수로 승진시키고 '자두나이스키(Zadunaisky: 도나우강을 건넌 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774년 루먄체프의 군대가 슈멘에 당도하자,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압뒬하미트 1세는 전의를 상실하고 화평을 청했다. 이리하여 7월 21일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러시아는 이 조약에 따라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을 오스만 제국에게 반환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정교회 신도들을 보호하게 했으며 오스만 제국이 이를 어길 경우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또한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러시아에 사실상 편입되었으며, 러시아는 캅카스의 카바디아, 아조프에 대한 무제한의 주권을 확보하고 케르치 반도의 케르치와 에니칼레 항, 부크 강과 드네프르 강 사이의 예디산[2] 지역 일부를 획득했다.

이후 루먄체프는 '지시(1761년)', '병역 문화(1770년)', '생각들(1777년)' 등 여러 서적을 잇달아 출판해 군사 전략과 부대 관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고 그레고리 포템킨이 러시아군을 재조직할 때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던 1787년 러시아-오스만 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군대를 지휘하게 된 루먄체프는 1789년 이아시호틴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는 포템킨이 자신을 질투해 의도적으로 군량을 감축시켰다고 의심했고, 결국 지휘관 직책을 사임했다.

1794년, 루먄체프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코시치우슈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진압군을 지휘한 이는 그의 라이벌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였고, 그 자신은 우크라이나의 저택에 머물렀다. 그러던 1796년 12월 19일, 그는 자신의 저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71세.

[1] 표트르 대제가 젊은 시절에 길려낸 소년 보병 연대에서 기원한 근위대로, 7년 전쟁 시기엔 4,500명에 달하는 정예 보병 연대였다.[2] 현재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