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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8-27 19:52:25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파일:Nádasdy.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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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장성.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나르다시는 1708년 9월 30일 슈타이어마르크의 라트커스부르크에서 헝가리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그는 프란츠 백작과 슈라텐바흐 백작 부인의 아들이었다. 1727년, 나르다시는 카자키 후사르 부대에 입대했다. 1731년부터 1735년까지, 나르다시는 이탈리아의 코르시카와 라인 강 방면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했고 1734년까지 츄겐베르크 후사르 부대의 대령을 역임했다. 또한 1737년과 1738년에는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에 참가했고 1739년엔 체스키 후사르 부대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초기인 1741년 11월, 나르다시는 보헤미아에서 프랑스-바이에른군 분견대를 격파하고 노이하우스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이 프라하에 고립된 프랑스군을 포위하는 동안, 나르다시는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국경을 급습하여 상부 팔츠 일대의 노이부르크를 공략했다. 그는 이 전공으로 소장에 임명되었다. 1742년, 나르다시는 카자키 후사르 부대를 자신의 부대로 삼고 명칭을 '나르다시 후사르'로 변경했다. 이후 나르다시는 1743년 바이에른 전역에 참가하여 바세르부르크와 프리트베르크를 공략했다. 또한 그해 3월 브라우나우에서 미누치 장군의 프랑스군을 격파한 뒤 오팅, 부르크하우젠, 묄도르프를 점령했다.

1744년 7월, 나르다시는 라인강 도하 작전에 참가해 오스트리아군의 선봉장으로서 강을 먼저 건넜고 아게노와 알자스-자베른 공략전에 참여했다. 1745년 2월 15일, 나르다시는 로탈 백작부인 마리아 막시밀리아나와 결혼했고, 이후 상부 슐레지엔 일대에 투입되어 9월 30일 조르 전투에 참가해 프로이센군에 대한 역습 작전을 이끌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같은 해 기병대장으로 승진했으며 야전군 중장이 되었다. 1746년, 나르다시는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어 3월 17일 과스탈라에서 적 구원군을 격퇴했고 6월 16일 피아첸체 전투에 참여해 승리를 이끌었다.또한 8월에 로토프레도 전투에 참여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고 오스트리아군이 노비와 제노바를 공략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1747년 2월에 제노바 공방전을 이끈 그는 전쟁이 끝난 뒤인 1754년 기병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2.3. 7년 전쟁

1756년 나르다시의 아내 마리아가 사망했다. 이후 9월 26일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의 주지사로 임명된 그는 1757년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된 프라하를 구원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던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군대에 합류했다.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 나르다시는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공격해 아군의 승리를 결정적으로 이끌어냈다. 그는 이 승리 후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8월 13일, 나르다시는 란데스후트 전투에 참가했고 9월 7일 모이 전투에서 고립된 프로이센 군단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11월 13일에 스바이드니츠를 포위해 16일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757년 12월 5일, 나르다시는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좌익 기병대를 이끌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이 우익을 치는 척하며 오스트리아 주력군을 우익 쪽에 쏠리게 만든 뒤 주력군을 적 좌익 쪽으로 이동시킨 후 사선대형을 형성한 뒤 맹공을 펼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다. 나르다시는 로이텐 패전 후 좌익 부대가 쉽사리 와해되는 걸 막지 못해 오스트리아군이 전면 패주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결국 군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남은 전쟁 기간 동안 다시는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1758년 크로아티아에서 2개의 국경 수비대 재편성을 이끌었다.

2.4. 이후의 경력

1766년 나르다시는 요제프 백작의 미망인인 수사나 말라틴스키와 재혼했다. 이후 그는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 참여해 갈라시아 육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군대를 떠났고 1783년 3월 22일 크로아티아의 카를슈타트에서 사망했다. 향년 7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