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26 09:43:34

프란츠 막시밀리안 얀누스 폰 에베르슈타트

파일:Jahnus.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의 경력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군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얀누스는 1711년 8월 16일 밀라노에서 태어났따. 그는 튀링겐의 옛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아돌프 빌헬름은 오스트리아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했으며 1731년 토르토나 총독으로 재임하던 중 사망했다. 얀누스는 1729년부터 1732년까지 이에나에서 공부했고 1732년 21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보병 연대에 입대해 비교적 빨리 승진하여 1742년 레오폴트 요제프 보병대의 중령에 이르렀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44년, 얀누스는 휘하 연대와 함께 트라운 백작의 지휘를 받으며 라인 강에서 복무했다. 이후 그는 보헤미아를 침공한 프로이센군에 맞서기 위해 트라운의 군대와 함께 보헤미아로 진군했으며 1745년 6월 4일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 참가했고 같은 해 9월 30일에는 조르 전투에 참가했다. 1746년, 얀누스의 연대는 북이탈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장군의 군대에 배속되었다.

1746년 6월 15일, 얀누스는 피아첸차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상당했고 티돈 강과 트레비아 강 사이의 일대에서 적을 교란시키는 임무를 맡은 분견대를 이끌었다. 그해 연말, 얀누스는 프로방스 전역을 이끈 브라운 군단에 배속되어 비정규 보병대와 척탄병 10개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이 부대를 이끌고 바르 강을 건넌 뒤 생 로랑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로 후퇴한 후 1748년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얀누스는 발칸 반도의 국경 지대로 옮겨져서 그렌저 군단 재편성에 참여했다. 1750년 2월 5일, 얀누스는 슬라보니쉬-브로더 그렌저 연대의 대령이 되었다.

2.3. 7년 전쟁

1757년 7월 10일, 며칠 전 슐레지엔 침공을 진행하기 위해 분견대를 이끌고 출격한 얀누스는 란데스후트 마을을 점령한 뒤 그곳을 기지로 삼아 슐레지엔을 급습했다. 이후 란데스후트, 슈미데베르크, 히르슈베르크에서 보헤미아 국경 지대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한 얀누스는 8월 13일 란데스후트에서 크로이트젠 소장 휘하 프로이센 군단 8천명의 공격을 받아 그의 말을 잃는 등 고전했으나 끝내 격퇴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8월 21일 소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11월까지 슐레지엔의 란데스후트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오스트리아군이 로이텐 전투에서 완패하자 본국으로 철수했다.

1758년 3월 7일, 얀누스는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수여받았고 1758년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의 군단에 합세하여 모라비아를 침공한 프로이센군의 보급로를 교란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특히 6월 11일 호프와 베른 사이의 일대에서 프로이센 호송부대를 급습해 300대의 보급 마차를 포획하고 400명을 죽이고 3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6월 말 돔슈테트 전투에 참가해 프로이센 보급 마차 4,000대 중 250대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파괴하거나 포획하는 대전과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 7월 18일 프로이센군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그를 쾨니히호프로 보내 프로이센군이 슐레지엔으로 가는 길을 위협하게 했다.

1759년 7월, 경기병대 사단의 지휘관을 맡은 얀누스는 7월 13일 프리틀란트에서 오스트리아 경기병 300명을 공격해 7명의 장교와 38명의 병사들, 그리고 뤼데리츠 장군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7월 16일에는 슈바이드니츠에서 란데스후트로 보급품을 수송하는 적 호송부대를 공격해 타격을 입혔고 7월 27일 라민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분견대와 접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이후 프리틀란트에서 적과 대치하던 얀누스는 10월 초 오스트리아 본군이 작센으로 진입했을 때 보헤미아 수비를 맡았다.

1760년 3월 9일, 얀누스는 중장으로 승진했고 5월에 슐레지엔을 향한 오스트리아의 공세에 참가했다. 그해 6월 6일, 얀누스는 3개의 그렌저 대대와 후사르 연대를 이끌고 란데스후트 마을을 점령했다. 이에 슐레지엔 주둔 프로이센군 지휘관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드 라 모트 푸케는 란데스후트를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공세를 가했고, 얀누스는 약간의 저항을 벌였다가 라우돈 남작의 군단이 있는 곳으로 퇴각했다. 6월 23일, 얀누스는 라우돈 남작의 지휘하에 란데스후트 전투에 참가해 푸케의 프로이센군을 궤멸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후 그는 라우돈 남작과 함께 적을 향한 공세 작전을 이끌었으나 9월 17일 호치거스도르프 전투를 치른 뒤 남은 한 해 동안 어떤 주요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1761년, 얀누스는 그는 슐레지엔을 향한 오스트리아의 공세 작전을 이끌었다. 7월 31일 얀누스는 루진스키 장군과 함께 하센베르크와 스타인베르크에 자리를 잡았고 8월 9일 베르커스도르프로 진군했으며 8월 17일 프라이베르크를 거쳐 8월 19일 호치거스도르프로 진군했다. 이후 10월 1일 라우돈 남작의 시비드니차 요새 공략전에 참가한 그는 라우돈 남작이 요새에 대한 주 공격을 지휘하는 동안 그렌저 부대들과 함께 우회 공격을 감행해 와세르 요새에 이르렀다. 이때 와세르 요새에는 400명의 오스트리아 그렌저 포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스트리아군이 와세르 요새를 공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감옥을 탈출하여 아군이 요새에 진입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데 성공했다. 얀누스는 이 상황을 틈타 요새로 진입해 오전 7시에 요새를 공략했다.

2.4. 이후의 경력

그러나 라우돈 남작과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라우돈 남작과 갈등을 빛고 있는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질시를 받아 이후로는 어떠한 전투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1763년 2월 15일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의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다가 함부르크 시의 수비대 지휘관 임무를 제안받자 이를 수락한 그는 1770년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육군 원수가 되어달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말년을 평온하게 보내던 얀누스는 1772년 1월 26일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