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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8-27 19:53:50

프란츠 사버 폰 하라크-로라우

파일:Harrach.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7년 전쟁2.3.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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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군인.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프란츠는 1732년 10월 2일 팔라틴 백작령의 카웁 근처 라인강 유역을 지나고 있던 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에서 남편과 함께 여행을 하던 중 배 위에서 건강한 쌍둥이를 출산했다.[1] 프란츠가 속한 하라크로라우 가문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사이의 국경 지역을 기반으로 삼은 백작 가문이다.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라크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 마리아 엘리자베트의 최고 시종이자, 보헤미아의 최고 수상 겸 황금 양털 기사였다. 또한 프란츠의 어머니는 엘레오노라 후르스틴 폰 리히텐슈타인이었다. 프란츠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있는 부모의 저택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한 이래 1752년에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보병대의 대위가 되었다.

2.2.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하자, 프란츠는 푸에블로 보병대로 옮겨져서 중령으로 승진했다. 1757년 6월 18일, 그는 레오폴트 요제프 장군의 휘하에서 콜린 전투에 참전해 중앙에 배치된 제1 보병 연대를 지휘했다. 이후 그는 여름 동안 프로이센군과 맞서다가 짧은 시간 동안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고 11월 22일에는 브레슬라우 전투에 참가했으며 12월 5일에는 로이텐 전투에 참가했다가 군대 전체가 와해되는 걸 목도해야 했다. 1758년 10월 14일, 프란츠는 콜로레도 장군 휘하에서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호크키르히 전투에 참가해 아군의 승리에 일조했고 1759년 푸에블라 보병대의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1759년 10월 5일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1760년 11월 3일, 프란츠는 토르가우 전투에서 용맹을 발휘했다. 적이 아군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병사들에게 적군이 50걸음 이내에 접근할 때까지 발포를 금지했다가 적이 50걸음 이내에 들어서자마자 일제사격을 가해 패주시켰다. 이후 프로이센군이 또다시 공격을 감행했을 때, 그는 말을 잃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계속 이끌었다가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이날 그의 연대는 사상자 900명을 잃었고, 비록 전투는 패했지만 그의 명성은 이로 인해 치솟았다. 그러나 그는 토르가우에서 중상을 입은 뒤 7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떤 전투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761년 12월 22일, 프란츠는 토르가우에서 용맹을 떨친 공로를 인정받아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2.3. 이후의 경력

전쟁이 끝난 후, 프란츠는 1773년 4월 26일 중장으로 승진했고 1774년 나이펜베르크 보병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1779년, 그는 롬바르디 방면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2년만인 1781년 2월 15일 밀라노에서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 이 때문에 그는 친구들로부터 '라인 백작'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