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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6 01:41:06

프랑스 침공/독일군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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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A집단군3. B집단군4. C집단군

1. 개요

독일군은 1940년 3월을 기점으로 만슈타인 계획, 즉 지헬슈니트 기동을 기본 작전안으로 설정하고 예하 부대의 배치 및 운용계획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총 3개 집단군으로 나누어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 국경선 일대에 전개되어 각각의 임무에 따라 해당 국가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독일군의 3개 집단군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은 주공인 A집단군으로, A집단군의 전개 구역은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그리고 일부가 프랑스에 속한 아르덴 고원 전면이었다. 독일군은 이들 A집단군을 주공으로 삼아 프랑스 영내로 종심 깊은 공격을 감행, 프랑스 북동부에 전개된 프랑스군 및 벨기에군과 영국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 집단군인 B집단군은 A집단군에 이어 두 번째로 강력한 세력으로, 전개 구역은 A집단군의 우익인 네덜란드 및 벨기에 북부 방면 전면이었다. B집단군은 제1차 세계 대전당시 독일군 주공과 마찬가지로 벨기에를 침공하는 임무를 받았는데, 이 공세가 단순 조공에 불과함에도 A집단군이 포위섬멸할 목표물인 프랑스 북동부전선 부대들이 독일군의 포위기동 기도를 깨닫지 못하게 해야 했기 때문에 그 공격 기세 및 충격효과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우익이 벨기에 및 프랑스에 가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해야 했다. 이 때문에 B집단군은 개전 초기 독일 공군의 가용한 지상지원 공군력 거의 전부를 배정받았고, 아울러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부대였던 공수부대 거의 전 병력을 공군으로부터 지원받아 네덜란드 및 벨기에에 대한 공지합동작전을 감행하도록 명령받았다. 유명한 에반-에마엘 요새 공격이 바로 이 공수부대에 의한 공격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지막으로 C집단군은 단 19개 사단만을 보유함으로서 가장 약한 집단군이었으며, A집단군의 좌익인 프랑스-독일 국경선, 즉 마지노 선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적극적인 기만행동을 통해 C집단군이 마지노 선 전면을 강습하거나, 마지노 선을 남쪽으로 우회해서 스위스를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는 마지노 선 일대에 배치된 프랑스군이 A집단군의 돌파전면보다 자신들의 전면에 집중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에는 C집단군만이 아니라 A집단군에서도 예하 1개 군단이 투입되었는데, 이들은 실제로 단 한 지점이긴 하지만 마지노 선을 돌파해 버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2. A집단군

A집단군은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작전 주공부대로 선정되었으며, 예하에 4개 야전군을 가지고 있었다. 사령관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이었으며, 참모장은 원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중장이었다가 그가 38군단 군단장으로 이임한 후 게오르크 폰 조덴슈테른 중장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야전군은 아니지만 야전군과 대등한 작전술 제대인 기갑집단을 보유한 유일한 집단군이기도 했다.

3. B집단군

B집단군은 C집단군과 함께 프랑스 침공의 조공부대로 선정되었다. 다만, 그저 견제에 불과한 임무만을 받고 있는 C집단군과는 달리 B집단군은 가능한 한 많은 적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고착, 견제하면서 심대한 타격까지 입혀야 했다. 사실상 B집단군은 며칠 내에 네덜란드의 항복을 받아내고 벨기에의 절반 이상을 석권하는 등, A집단군보다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어려운 임무를 맡은 셈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B집단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기갑군단끼리 충돌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지만, 이때의 기갑전은 2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발생한 최초의 기갑전이었고, 또한 프랑스 침공 당시 발생한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조공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매우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그 전력은 공수부대와 기갑군단을 가지고 있는 등 비교적 높은 수준이었다. 사령관은 페도어 폰 보크 상급대장이고, 참모장은 한스 폰 잘무트 소장이었다.

특징적인 것은 B집단군이 가진 강력한 조공부대, 특히 적의 주의를 최대한 끌어야 하는 피에로로서의 임무 때문에, 이때까지 전 세계를 통틀어서 대대 이상 규모로 운용된 적이 없는 공수부대가 사단 규모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공수부대가 아닌 공중강습부대, 현대 기준으로 말하면 항공수송 가능한 경사단이었으나, 이들의 선도를 위해 공군 소속 정규 공수부대가 대대 단위로 투입되었고 그 패턴은 현대 공수사단이 전개하는 방식의 원형이기 때문에, 정규 공수사단의 전개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 공수부대의 투입은 연합군이 독일군의 주공방향을 오판하게 만드는 최대의 요소가 되었다.

또한 B집단군 예하 군단 다수, 그리고 1개 야전군은 침공 이후 A집단군으로 전속되었다. 이를 전후해서 B집단군 예하 부대는 기만 목적을 포함한 다양한 작전명령을 통해 하루이틀 간격으로 수많은 사단과 군단이 이리저리 오갔기 때문에, B집단군의 편성은 매우 혼란스럽다. 따라서 아래의 편성표는 A집단군의 그것에 비해 훨씬 부정확하다. 원래 독일군은 전통적으로 예하 부대의 자율성을 충실히 보장하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하급 제대를 다른 상급 제대 아래로 보내거나 넘겨받는 부대이동 및 임무 전환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훗날 편제표 정리하는 사람들이야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지겠지만 이런 자율성은 독일군의 임기응변 능력을 한층 높였고,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이런 기능들 덕분에 독일군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부대를 뒀다 뺐다 하는 복잡한 기동을 순조롭게 실시했다.

총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상급대장.
(이 야전군은 프랑스 침공전 중인 1940년 5월 15일에 창설되었으며, 창설기간 중에 타 야전군 및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3개 군단을 배속받았다. 따라서 개전 시점의 편성표에서는 사단이 없고, 야전군 사령부 역시 창설 준비 중인 단계이다.)

4. C집단군

C집단군은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직후부터 서부 독일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야전군이었으며, 1940년 5월 시점에서 그 규모는 단 19개 사단이며, 실제로는 18개 사단에 1개 사단 규모에 해당하는 고정배치 국경수비부대인데다가 그나마도 제대로 무장된 사단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이들 C집단군은 A집단군 우익에서 스위스 국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프랑스 침공에 임해서 현재 마지노 선일대에 배치된 프랑스군을 현 위치에 고착시키는 기만작전 임무를 맡았다. 사령관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상급대장이었고, 참모장은 한스 펠베르 중장이었다. 참고로 C집단군 전임 참모장이 바로 프랑스 침공 당시 A집단군 참모장이었던 조덴슈테른 중장이었다. 이후 조덴슈테른 중장이 프랑스 침공 준비단계 및 초기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신중론을 펼쳐 부대지휘에 지장을 끼친 데에는 집단군 창설 초기 자르 침공에 맞서 워낙 압도적인 프랑스군을 상대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기획했던 경험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임무를 위해 C집단군은 예하에 보유한 19개 사단 이외에도 수많은 부대를 더 가진 것처럼 정부 및 군 상층부의 지원 하에 적극적인 기만작전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B집단군이나 A집단군으로 갈 부대를 기차 타고 가는 길에 잠깐 C집단군 구역 근처에서 한 번 내려놓고 며칠 있다가 한밤중에 몰래 "얘들아 여기가 아닌갑다" 하고 도로 기차 태워서 원래 담당구역으로 보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병력 규모를 뻥튀기하는 건 기본이고, 보병 출신 병사 몇 명한테 기갑병 전투복을 입히고 거리에 내보내서 흥청망청 쓰게 만든다거나, 특급호텔 하나 앞에다가 보초 두 명 세우고 군단 사령부 간판만 세운 다음 집단군 사령부에서 장교들이 식사하러 왔다갔다 하거나(오오! 공금으로 비싼 밥 먹기!), 방송국에서 초대형 스피커와 라디오 중계기를 빌려다가 다른 데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갑부대 이동 소음을 생중계하거나, 철도 운행이 끊긴 한밤중에 지역 철도청을 구슬러서 기관차하고 화차 몇 대를 왔다갔다 하게 하고 그 위에 짐을 전차 비슷하게 쌓고 방수포로 덮어둔 다음 병사들이 우우 몰려다니게 하거나 하는 등등.

이때의 기만공작 중에서 가장 걸작은, 이 부대들 중 상당수가 스위스를 침공하러 가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필요하다면 중립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침공하는 짓을 서슴치 않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고 이는 1차 세계대전이 확전된 원인도 사실 독일이 중립을 보장했던 벨기에를 무단 침공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만 봐도 충분했다. 여기에 더해서 스위스가 충분히 강력한 예비군 세력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막강한 독일군 앞에선 아침식사거리밖에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탓에, 결국 이런 기만공작은 스위스를 침공한 독일군이 무방비 상태인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3국 국경을 통해 이탈리아군과 연합해서 남프랑스를 침공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연합국 사령부에 부각되었다. 물론 병력도 뭣도 부족한 독일이 스위스를 진짜로 침공할 리는 없었지만서도.

하여튼 이런 기만공작에도 불구하고 C집단군은 프랑스 침공에 참가하는 3개 집단군 중에서 제일 취약한 전력을 보유했다. 기갑부대는 사실상 없고, 예하 야전군 2개의 휘하 군단들 중에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유한 군단조차 사실상 없는 등, 말 그대로 허울뿐인 야전군이었다.

[1]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독일 1기갑군을 지휘한 그 후베다.[2] 이들이 사실상 A집단군의 핵심이었으며, 이들 중에서도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이 최선봉이었다. 정작 이 제1기갑집단은 제대로 된 야전군이 아닌 어디까지나 임시편제라 참모부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3] 19기갑군단에 일시배속. 이 시점에는 아직 사단으로의 편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장 친위대 산하 기갑사단들이 창설 당시에는 연대로 출발했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4] 이 사단에는 육군 병력만이 아니라 당시엔 연대 규모로 존재하던 독일 공군 공수부대가 대대 규모로 포함돼 있어서, 이들이 수송기 착륙에 필요한 비행장 확보 임무를 맡았다.[5] SS 예비동원사단. 이 사단은 후에 SS 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모체가 된다.[6] 훗날 제1공수사단으로 개편된 사단. 예하 2개 공수연대는 보유한 대대 일부를 노르웨이 침공 및 육군 22공중강습사단에 파견한 탓에 실제 프랑스 침공 투입 병력은 연대 규모가 되지 못했다.[7] 훗날 원수가 되었고, 히틀러 저항운동에 참가한 최고위 장군이다.[8] z.b.V는 이런저런 잡다한 부대를 모아 특정 임무 수행을 맡기는 임시 부대고, Höheres Kommando는 군단급 지휘부를 가리킨다. 직역하면 특수임무사령부가 되지만, 혼동의 여지가 있어 임시군단으로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