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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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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막스 베버
장르 사회학
언어 독일어
발매일 1904~05년

1. 개요2. 내용
2.1. 문제 의식2.2. 금욕주의적 직업윤리2.3. 세속적 금욕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정신으로
3. 비판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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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스 베버가 1904년(1부)과 1905년(2부) 두 번에 걸쳐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총론』에 발표한 논문. 1920년에 1부와 2부를 합쳐서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2. 내용

2.1. 문제 의식

독일 지방의 직업 통계 연구에 따르면, 기업가와 숙련노동자층에 가톨릭교도보다 프로테스탄트가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실제로 수공업 도제들 가운데 가톨릭교도들은 수공업에 머물려는 경향이 보다 크며, 따라서 수공업의 장인이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들은 공장으로 유입되어 숙련노동자층이나 경영관리층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 따라서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도는 보다 정적이고 영리 충동이 적기 때문에, 위험하고 자극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는 삶보다는 비록 보다 적은 수입일지라도 가능한 한 안전한 생애를 택하기 때문이라고. 이는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지만 과거를 살펴보면 가톨릭교도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도 '세속적인 쾌락'에 정반대되는 삶을 살아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즉 프로테스탄트들은 세속적 쾌락를 강렬한 신앙심으로 규제하면서, 사업 감각 및 성공 정신 ㅡ '자본주의 정신'을 매우 강력히 발달시켰던 것이다.[3] [4]

물론 자본주의는 중국, 인도, 바빌로니아에도 그리고 고대와 중세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자본주의에는 바로 서구적 근대 자본주의에 있는 독특한 에토스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 에토스란, 벤저민 프랭클린이 "시간은 돈"이라고 말하며 지켰던 생활양식, 즉 모든 적나라한 향락을 아주 엄격히 억제하면서, 순수한 자기 목적에서 돈을 벌고 더욱더 많은 돈을 버는 일을 개인의 의무로까지 여기는 사고방식 ㅡ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로서 설교되는 저 '자본주의 정신'을 가리킨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근대적 경제질서 아래에서 유능함의 결과인 동시에 표현이다. 이런 윤리 하에서 돈을 벌지 않고 노는 것은 일종의 의무 망각으로 여겨진다.[5]

과거의 '전통주의'적 생활양식에서 이러한 생각들은 가장 추잡한 탐욕으로 여겨져 품위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배척당했을 것이다. 이른바 '전통주의'적 태도에서 노동자들은 성경의 말씀처럼 '지족(知足)했기' 때문에 많이 버는 것보다 적게 일하는 것을 택했다. 기업가들도 경쟁보다는 소규모 재산이 충족되기만 하면 적당히 일했고 삶의 템포는 전반적으로 느긋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살기를,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기를, 그리하여 그에 필요한 만큼만 벌기를 원했다. 그러나 '전통주의'적 생활양식의 안락함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도래하자 한순간에 파괴되었다.[6] [7]

이러한 전환은 어떻게 하면 되도록 편하고 적게 일하면서도 통상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적어도 작업하는 동안만이라도 벗어나 마치 노동 자체가 절대적인 자기 목적 ㅡ '소명' ㅡ인 양 여기고 일하는 정신적 태도가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신적 태도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기간 지속되는 교육 과정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어떤 교육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시대의 많은 사례들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종교적 계기가 그러한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 어떤 종교적 계기가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8]

2.2. 금욕주의적 직업윤리

우선 근대 생활양식의 변화에 있어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의 영향을 제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루터는 그리스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집회서 11장 20-21절의 πόνος(노동), ἔργον(일)이라는 단어들을 'Beruf(부름)'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후로부터 '소명'이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독일과 프로테스탄트적 민족들 사이에서 '직업'이라는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노동과 일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과업이라는 개념은 성서 번역에서, 그것도 원전의 정신이 아니라 번역자의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세속적 일상 노동이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는 표상을 초래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의미의 직업 개념을 최초로 산출했다. 이는 은총은 정해져 있는 것이지 인간이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확고한 의식과 결부되어 있었다. 세속적 의무의 이행이 모든 상황에서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오직 그것만이 신의 의지이며, 따라서 허용된 모든 직업은 '소명'으로서 신 앞에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열광주의자들'과 농민폭동에 맞서 투쟁한 후로부터 루터는 현실정치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관철시키지는 못했다.[9] [10] [11]

그러나 칼뱅에게는 그 사태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그는 교리상의 적대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논리적 일관성을 끝까지 고수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신의 결단을 인간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도 불경한 일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일부는 구원받을 것이고 나머지는 저주받을 것이라는 사실 뿐'이라는 예정론의 교리가 일관된 논리로서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데 이 비장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비인간적인 교리는 개인 각자에게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왜냐하면 예정론의 논리에 따르면 설교자도, 성례전도, 교회도, 심지어 신조차도 그들을 도울 수 없는데, 신의 은총 또는 저주는 영원으로부터 전혀 측량할 길 없는 신의 결단에 따라 각 개인에게 그 확고하고 불변한 운명을 배당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공로나 죄과가 이러한 운명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영원으로부터 확정된 운명을 따라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12]

이러한 인간의 내적인 고립은 문화와 주관적 종교성에 내재하는 모든 감각적ㆍ감정적인 요소에 대한 청교주의의 절대적인 부정적 태도의 근거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즉 교회적ㆍ성례전적 구원의 절대적 폐지야말로 가톨릭과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고대 유대교의 예언과 더불어 시작되고 헬레니즘의 과학적 사고와 결합되어 모든 주술적 구원 추구 수단을 미신과 독신이라고 비난했던 저 위대한 종교사적 과정, 즉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 여기에서 완결되었다. 진정한 청교도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일체의 종교적 의식의 흔적을 배척했고 노래도 예식도 없이 가까운 사람의 장례를 치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그 어떠한 종류의 '미신', 즉 주술적ㆍ성례전적 방식의 구원 효과에 대한 그 어떠한 신뢰심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13] [14] [15]

이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감정적으로 강화된 죄의식을 정기적으로 '방출하는' 수단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들에게 즉각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고, 그와 더불어 다른 모든 관심사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연 선택되었는가? 그리고 나는 내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ㅡ 스스로를 신의 '도구'라고 여겼던 칼뱅 자신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후계자들과 특히 광범위한 계층의 평신도들에게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죄의식을 방출하는 수단이 사라진 그들에게는 은총 상태의 인식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구원의 확실성'이 절대적으로 중대한 의미로 격상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예정론을 고수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선택된 자들'의 일원임을 인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지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도대체 '선택된 자들'의 일원임을 인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지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신의 영광을 증대하는 데 봉사하는 기독교인의 생활양식이라는 열매를 통해서 인식될 수 있다라고 말이다. 자신의 품행이 신의 영광을 증대하기 위한 자신의 내부에 살아 있는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품행은 신이 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신이 역사한 것이라는 점을 의식함으로써, 그는 이 신앙이 추구하는 저 최고의 선, 즉 구원의 확실성을 획득한다. 요컨대 부단한 직업노동(선행)은 신으로부터 구원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는 선택의 표지로서는 불가결하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은, 실제로도 종종 표현되고 있는 대로, 자신의 구원 ㅡ 정확히는 구원의 확실성이라고 해야 하지만 ㅡ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것이며, 그러나 이러한 창조는 가톨릭에서처럼 개별적인 공로를 하나씩 쌓아감으로써가 아니라, 매 순간 선택되었는가 아니면 버림받았는가의 냉혹한 양자택일에 직면해 행해지는 체계적인 자기통제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16] [17]

이러한 종류의 실천적인 차원의 '행위구원주의'[18]가 갖는 결정적인 의미는 이것이 중세의 평균적 가톨릭교도들의 일상적 삶과 구별짓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죄, 회개, 속죄, 평안 그리고 또다시 죄로 이어지는 참으로 인간적인 기복이 나타나지만, 칼뱅주의에서는 그러한 무계획적이고 비체계적인 성격을 벗어나 일상의 윤리적 실천으로서 생활양식 전체를 일관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형성하는 일이 나타났다. 이들이 '엄격주의자들'이라고 불려졌던 것은 모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자연적인 상태에서 은총받은 상태로 승화시키는 은총의 역사는 오직 매 순간과 모든 행위에서 삶 전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만 보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삶은 오로지 초월적인 목표, 즉 구원에 지향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세속적 삶은 철저히 합리화되었고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증대한다는 오로지 한 가지 관점에 의해 지배되었다. ㅡ 그 결과 세속적인 직업 생활에서 "모든 것은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라는 관점이 이보다 통렬하고 진지하게 고수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로써 칼뱅주의는 종교를 지향하는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금욕주의에 대한 매우 적극적인 심리학적 동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금욕주의 생활양식의 조직적 체계화는, '꼼꼼한' 청교도가 자신의 은총 상태를 부단히 점검하는 방식에서는 이미 순전히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개별적 덕목에서 자신이 이룩한 발전을 개괄적ㆍ통계적으로 신앙일기에 기록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맥박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성화(聖化)는 거의 사업 경영의 성격을 띨 수 있게 되었다.[19] [20]

2.3. 세속적 금욕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정신으로

청교주의를 대표하는 리처드 박스터[21]의 저술을 검토해보자. 그에 따르면 재산이 있는 자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설사 그가 재산이 많아서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할지라도, 그가 가난한 자와 똑같이 복종해야 하는 신의 계명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즉, 직업은 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신의 명령이다. 신의 섭리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직업(소명)을 예비하는 바, 각 개인은 부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것 자체를 위해서 노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 하에서 사교, 쓸모없는 잡담, 사치를 통한 시간 낭비 그리고 심지어 건강 유지에 필요한 시간 이상의 수면에 따른 시간 낭비도 신의 영광에 봉사하는 노동의 기회를 상실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다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신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더 적은 이윤을 창출하는 방법을 따른다면, 신에게 받은 소명의 목적 가운데 하나를 방해하는 것이 되고, 신의 청지기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죄를 짓는 것이겠지만, "진정 신을 위한 것이라면 너희는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좋다." 직업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서의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22] [23] [24]

이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재산의 무절제한 향락에 맞서 싸웠으며 소비, 특히 사치성 소비를 억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금욕주의는 이윤 추구를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신이 그것을 직접 원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전통주의적 경제윤리가 주장했던 재화 획득의 부도덕성에서 해방되는 심리학적 결과를 낳았다.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는 무엇보다 먼저 배척해야 할 태도로 보면서도 직업노동의 열매로서의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으로 보는 이러한 삶의 태도는 사경제적 부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순전히 충동적인 소유욕에 대항해서 자본주의 '정신'이 확장되는 데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외적인 결과는 자명하다. 즉 금욕적 절약 강박에 의한 자본형성이 바로 그것이다. 획득한 부의 소비적 사용이 제어되면서 그 부의 생산적 사용, 다시 말해 투자자본으로서의 사용이 촉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5] [26] [27]

이렇듯 청교주의적 인생관은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모든 상황에서 시민계층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적 생활양식으로의 발전 경향을 촉진했다. 그 생활양식은 근대적 '경제인간'의 요람이었다. 특히 무산계급에 강요한 엄격한 금욕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노동'생산성'을 강력히 촉진할 수밖에 없었음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귀족이나 졸부가 아니라 자수성가한 시민계층이 최상의 윤리적 평가를 받았으며, 신의 섭리를 따라 이윤 창출에 성공한 성도가 있으면 언제나 그를 가리켜 "신이 그의 사업을 축복하신다"고 말했다. 그런데 부가 증가함에 따라 역설적이게도 그 부를 만들었던 '금욕주의 정신'은 그에 비례해 부의 유혹에 굴복하는 빈도가 많아진다. 엄격히 규제된 삶과 억제된 소비를 통해 한번 부유해지게 되면, 그로부터 획득된 재산으로 인해 모든 형태의 자만심과 번뇌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애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교의 형식은 그대로 남으나 그 금욕주의 정신은 점차 사라져간다. 일반적으로 신의 왕국에 대한 열렬한 추구가 점차 냉정한 직업적 덕목으로 해체되기 시작함으로써 종교적 뿌리는 서서히 말라죽고 그 자리에 공리주의적 현세성이 확립된다. 단지 남은 것은 이윤 추구 행위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에토스 ㅡ 이를 통해 마침내 전형적인 시민계층적 직업 에토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28] [29]

이제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외적인 재화는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재화 자체의 힘만으로도 인간을 그 체계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끔 만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 추진력에 편입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엄청난 강제력으로 규정하며 아마도 그 마지막 톤의 화석연료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인간을 그 쇠우리 안에 가두어 놓을 것이다. 아무튼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종교적ㆍ윤리적 의미가 없어져버린 영리 추구 행위는 오늘날 그것이 가장 자유로운 지역인 미국에서 경쟁적 열정과 결합하여 일종의 스포츠적인 특성을 띠기까지 한다. 미래에 누가 저 쇠우리 안에서 살게 될는지,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발전 과정의 끝자락에 전혀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게 될는지, 혹은 옛 사상과 이상이 강력하게 부활하게 될는지, 아니면 일종의 발작적인 자기 중시로 치장된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될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만약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된다면, 그러한 문화 발전의 '마지막 인간들'에게는 물론 다음의 명제가 진리가 될 것이다.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 ㅡ 이 무가치한 인간들은 그들이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공상한다."[30]

3. 비판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적 축적에 대해 의도하지 않은 친화력이 있었다는 베버의 설명은, 무엇보다도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로 오늘날에는 많은 반박이 쌓여있는 상태이다.

가령 영국의 역사학자 Peter Marshall은 자신의 책 『종교개혁』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베버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잘못 전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는 하지만, 19세기 후반 독일 사회학자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자와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무했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불안한 칼뱅파는 물질적 성공을 예정된 구원을 받을 가능성의 표지로 해석했다. 17세기와 18세기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명백한 경제적 발전은 베버의 테제를 얼마간 뒷받침하지만, 근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테제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서 거리를 둔다. 경건한 스코틀랜드의 경제가 낙후되었던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칼뱅주의 문화와 자본주의적 번영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었다. 자본주의적 번영은 오스만 제국이 팽창한 15세기 이래 경제적·정치적 우위가 지중해에서 (가톨릭권 프랑스를 포함하는) 대서양 세력들로 넘어간 더 장기적인 추세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The Reform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12009, Oxford University Press), 이재반 번역, 교유서가, 2016, ebook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요인은 '개신교 윤리'보다는 '지리적 이유'에서 찾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Marshall과 유사하게, Jacques Delacroix과 François Nielsen은 19세기 유럽 국가들을 비교한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베버의 주장에 실증적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개신교가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막스 베버에게 크게 빚지고 있는 논지를 조사했다. 프로테스탄트 비율과 19세기 중후반 유럽 국가의 산업 자본주의 발달을 비교하면서. 발달은 5개의 변수를 이용하여 측정되었다. 이 변수는 부와 저축, 주요 주식 거래의 설립 데이터, 철도 네트워크의 확장, 농업과 산업에서의 남성 노동력 분포, 유아 사망률을 포함한다. 이 증거를 기반으로 할 때,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대한 "공통 해석"(곧 국가에서의 개신교 세력이 산업 자본주의의 초기 발달과 관련되었다는 아이디어)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에 대한 실증적 증거는 거의 없다.[31]
-Jacques Delacroix and François Nielsen, 〈The Beloved Myth: Protestantism and the Rise of Industrial Capitalism in Nineteenth-Century Europe〉, 2001

더군다나 '네덜란드와 이베리아' 같은 전혀 다른 지역 간이 아닌, '독일 내부 가톨릭권과 개신교권' 같은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지역 간 비교의 경우, 베버의 주장은 주장은 더욱 취약해진다.

Davide Cantoni는 AD 1300~1900년 동안 독일 내부의 272개 도시들을 비교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신교 윤리"에 관한 막스 베버의 에세이로 가장 유명한 ㅡ 많은 이론들이 개신교가 경제 발전을 도왔다는 가설을 세웠다. 19세기까지 상당한 종교적 이질성과 교파 소속의 안정성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영토는 이 가설에 대한 이상적인 시험장을 제공한다. 1300년에서 1900년 사이에 272개 도시로 구성된 데이터 집합에서 인구 수치를 사용했을 때, 나는 경제 성장에 대한 개신교의 영향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결론은 다양한 대조군을 포함할 정도로 강력하며, 데이터 선택이나 작은 표본 크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개신교는 경제발전의 다른 그럴싸한 결정요인들과 상호작용해 보았을 때 아무런 영향이 없다.[32]
전반적으로, 이러한 결과는 개신교(루터교와 칼뱅주의)와 가톨릭 도시가 1300년에서 1900년 동안 매우 유사한 성장 궤적을 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일련의 데이터 하위 집합을 보유하기에 확고하며, 데이터 집합의 선택이거나 작은 표본 크기 때문일 가능성은 없다.[33]
-Davide Cantoni, 〈The Economic Effect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Testing the Weber Hypothesis in the German Lands〉, 2010

오히려 후기 근대에 접어들게 되면, 독일 내부에서 산업화 지역은 (농촌의 가톨릭, 도시의 개신교라는 통념과 정반대로) 거의가 가톨릭 지역이 된다.
역사적 환경상 독일의 산업화 지역은 거의가 가톨릭이었고, 특히 라인-루르 지역과 슐레지엔이었다. 부분적으로 이는 왜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 교회들보다 산업 프롤레타리아트 문제에 더 빨리 깨어있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다.[34]
Thomas Knapp, 「The Catholic Labor Movement in Germany 1850–1933: A Survey and a Commentary」, 2008

결국 베버의 주장을 뒷받침해야 할 기초적인 사실관계의 실증부터가 실패한 것이다.

4. 여담



[좌]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실린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총론』 표지.[우] 해당 잡지 내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첫 페이지.[3] 수공업 도제들 가운데 가톨릭 교도들은 수공업에 머물려는 경향이 보다 크며, 따라서 수공업의 장인이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이에 반해 프로테스탄트들은 공장으로 유입되어 숙련노동자층이나 경영관리층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 이러한 경우에 의심할 여지 없이 다음과 같은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즉 여기서는 습득된 정신적 특성,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향과 가정의 종교적 분위기에 의해 조건 지어진 교육 방향이 직업 선택과 그 후의 직업적 운명을 결정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50~51)[4] 가톨릭의 보다 강한 '비세속성'과 그 최고의 이상인 금욕적 특성이 신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재화에 대해 보다 강하게 무관심을 보이도록 교육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공식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과거에는 상황이 이와 아주 달랐다. 즉 영국, 네덜란드, 미국의 청교도들을 특징짓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세속적 쾌락'과 정반대되는 것이었으며, 더구나 그것은 나중에 다시 보겠지만,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52~53)[5]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매일 노동을 통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리며 지낸다면, 비록 그가 이러한 쾌락을 즐기는 동안 6펜스밖에 지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 밖에도 5실링을 더 지출한 셈이 된다. 아니 내다 버린 셈이 된다." (중략) 이글에서 우리에게 설교하고 있는 사람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프랭클린이 이 글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설파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중략) 이 '탐욕의 철학'에서 독특한 것으로 눈에 띄는 것은 신용 있는 신사의 이상, 그중에서도 특히 자기 목적으로 전제된 자본증식에 대한 관심을 개인의 의무로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여기서는 단순히 처세술이 아니라 독특한 '윤리'가 설교되고 있는바, 이 윤리를 위반하는 것은 우둔한 짓으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의무 망각으로 취급된다. 바로 이 점이 본질적이다. 프랭클린의 앞의 글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영리한 사업술'이 아니다. 이 글에서 표현되는 것은 하나의 에토스이며,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이러한 특성이다. (중략) 후자에서는 윤리적으로 채색된 생활양식의 준칙이라는 성격을 띤다. 여기서는 이러한 특수한 의미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이 사용될 것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72~76)[6] '윤리'의 옷을 입고 등장하며 규범에 구속된 특정한 생활양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정신'이 일차적으로 추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적수는 전통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의식과 행동 방식이었다. (중략) 근대적 기업가가 '그의' 노동자들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한의 노동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즉 노동강도를 높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적 수단 가운데 하나가 성과급이다. (중략) 그런데 여기에서 독특한 난점이 발생했다. 즉 성과급을 올리자 동일한 기간의 노동 성과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한 주목할 만한 결과가 자주 나타났던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성과급 인상에 대해 일일 노동량 증가가 아니라 감소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중략) 왜냐하면 그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2와 1/2마르크를 벌었고 성경 말씀처럼 '지족(知足)했기' 때문이다. 많이 버는 것이 적게 일하는 것보다 덜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즉 그는 자기가 가능한 한 최대한 노동하면 매일 얼마를 벌 수 있는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까지 벌었고 자신의 전통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액수 ㅡ 2와 1/2마르크 ㅡ를 벌려면 하루에 얼마나 일해야 하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주의'라고 불리는 태도의 일례이다. 즉 인간은 '본성상' 더욱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살기를,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기를, 그리하여 그에 필요한 만큼만 벌기를 원하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노동강도를 높임으로써 인간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작업을 시작한 모든 곳에서, 전 자본주의적 경제 노동의 그러한 기본 동기에 의해 굉장히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82~84)[7] 전(前) 세기의 중엽 무렵까지 선대업자의 삶은, 적어도 대륙 방직공업의 많은 부문에서는 오늘날 우리의 개념으로 보면 상당히 느긋했다. 그 삶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이 표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영업시간은 적당했고 ㅡ 대략 하루에 5~6시간이었고 그보다 훨씬 짧은 때도 있었으나 대목이 생기면 그보다 길어졌다 ㅡ 웬만한 벌이는 품위 있는 생활을 영위하고 호시절에는 소규모 재산을 적립하기에 충분했으며, 대체로 사업 원칙에 대한 광범위한 일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경쟁자들은 상호 간에 비교적 상당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매일 '클럽'을 찾아 오랜 시간 머물렀으며, 그 밖에도 상황에 따라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거나 정기적인 서클 모임에 참석했다. 삶의 템포는 전반적으로 느긋했다. (중략) 그러나 언젠가 이 안락함이 갑자기 파괴되었다. 그것도 대개 조직 형태의 그 어떠한 근본적 변화ㅡ 예컨대 폐쇄적 기업이나 기계 방적기로의 이행 등 ㅡ도 일어나지 않은 채 파괴되었다. (중략) 선대업에 종사하는 어느 집안의 한 젊은이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내려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직조공들을 엄선하고 그들의 의존성과 그들에 대한 통제를 점차 강화함으로써 그들을 농민에서 노동자로 교육시켰다. 그리고 다른 한편 최종 구매자인 소매업자들과 가능한 한 직접 접촉하여 판매를 완전히 자기 수중에 장악했고, 손수 고개들을 확보해 매년 정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하여 무엇보다 생산물의 품질을 전적으로 그들의 수요와 요구에 맞춤으로써 그들의 '구미에 맞추'는 동시에 '박리다매' 원칙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와 같은 '합리화' 과정의 결과로서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기 마련인 현상이 여기서도 반복되었다. 즉 상승하지 못하는 자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면서 목가적 풍경은 붕괴되었고 거액의 재산이 축적되었는데, 이는 이자를 위한 목적으로 굴리지 않고 계속해 사업에 투자되었다. 또한 쾌적하고 안락한 옛 생활 방식은 엄혹한 냉정함으로 바뀌었다. 즉 합리화 과정에 참여해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는 쓰지 않고 벌기만을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낡은 방식을 고수한 사람들의 경우는 절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ㅡ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ㅡ 그와 같은 경우에 일반적으로 이러한 변혁을 야기한 것은 가령 새로운 화폐의 유입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정신, 즉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도래였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90~92)[8] (어떤 종류의 질적 노동 또는 예컨대 값비싸고 손상되기 쉬운 기계의 사용을 요구하거나 일반적으로 어떤 고도의 주의력과 창의력이 요구되는 생산물의 제조가 문제시되는 경우에) 저임금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의도한 바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비단 고도의 책임감이 필수 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 즉 어떠헥 하면 되돌록 편하고 적게 일하면서도 통상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적어도 작업하는 동안만이라도 벗어나 마치 노동 자체가 절대적인 자기 목적 ㅡ '소명' ㅡ인 양 여기고 일하는 정신적 태도가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정신적 태도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략) 다시 말해 전통주의적 구습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는 다름 아닌 종교적 교육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86~87)[9] 이미 Beruf(직업ㆍ소명)라는 독일어 단어에, 그리고 어쩌면 한층 더 분명하게 calling(직업ㆍ소명)이라는 영어 단어에 종교적 표상 ㅡ 즉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과업 ㅡ이 적어도 공명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이 단어를 구체적인 경우에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더욱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중략)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이 단어는 성서 번역에서, 그것도 더구나 원전의 정신이 아니라 번역자의 정신에서 유래했음이 드러난다. 루터의 번역에서는 시락서(집회서)의 한 구절(제11장 20, 21절)에서 최초로 완전히 오늘날의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그러자 이 단어는 곧바로 모든 프로테스탄트적 민족의 세속언어에서 오늘날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중략) 아무튼 적어도 절대적으로 새로운 사실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속적 직업에서의 의무 이행을 도덕적 자기 행위 일반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내용으로서 존중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필연적으로 세속적 일상 노동은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는 표상을 초래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의 직업 개념을 최초로 산출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121~122)[10] 루터는 전전주에서 인용한 예수 시락의 말들(이는 70인역에서는 ἐν τῷ ἕργῳ σου παλαιώθητι와 και ἕμμενε τῷ πόνῳ σου로 번역되어 있다)을 "너의 노동에 머물러라"(bleibe bei deiner Arbeit) 대신에 "너의 직업을 떠나지 마라"(beharre in deinem Beruf)와 "너의 직업에 머물러라"(bleibe in deinem Beruf)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후일의 가톨릭 성서 번역은 여기서도 그저 루터를 따랐을 뿐이다. 루터의 이 시락서(집회서) 구절 번역이야말로 내가 아는 한 독일어의 Beruf라는 단어가 전적으로 오늘날의 순수한 세속적 의미로 사용된 최초의 경우이다. (중략) 후대 및 현재의 의미에서의 '직업'(Beruf)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 전의 독일어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전의 성서 번역자들이나 설교자들도 사용하지 않았다. 루터 이전의 독일어 성서는 시락서의 그 구절을 '일'(Werk)로 번역했다. 레겐스부르크의 베르톨트는 설교에서 오늘날 우리가 '직업'(Beruf)이라고 불러야 할 경우에 '노동'(Arbei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어휘 사용은 고대의 그것과 동일하다. (중략) 루터의 경우에는 세속적 '직업노동이 신성한 삶의 색채를 취하게 되었다. 즉 그는 그때 시락서에 나오는 πόνος(노동), ἔργον(일)를 그에 적합한 단어가 당시까지 수도승의 번역에서 유래하는 (라틴어의) 유사한 말밖에는 없었다는 이유로 Beruf로 번역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146,149)[11] 루터는 이러한 사상을 자신의 종교개혁 활동의 첫 10년 동안 발전시켰다. 초기에 그는 전적으로,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변하는 현저히 중세적인 전통의 의미에서 세속적 노동을 비록 신이 원한다 할지라도 피조물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불가결한 자연적 토대이기는 하지만 먹고 마시는 것처럼 그 자체로는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오직 믿음만으로'의 사상이 보다 명백하게 관철되고 그럼으로써 각종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그리고 그 사상을 통해 가능해진, '악마에 의해 명령된' 수도원 생활에 대한 가톨릭의 '복음적 권면'과의 대립이 점차 첨예해지면서 직업의 의미도 커져갔다. 수도승적 생활양식은 이제 신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수단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이 전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그는 더 나아가 그것을 세속적 의무를 회피하는 이기적인 냉혹함의 산물로 간주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속적인 직업노동은 이웃 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여겼다. (중략) 즉 세속적 의무의 이행은 모든 상황에서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것이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신의 의지이며, 따라서 허용된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열광주의자들'과 농민폭동에 맞서 투쟁한 후에 루터에게는 각 개인이 신으로부터 그 안으로 보내진 객관적인 역사적 질서가 더욱더 신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유출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에, 삶의 세부적인 진행 과정에서도 점점 섭리를 강조함으로써 점차 '운명' 사상에 상응하는 전통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즉 각 개인은 근본적으로 신이 일단 정해준 직업과 신분에 머물러야 하며, 그의 지상에서의 노력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사회적 지위의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략) 이런 논의 방식으로 인해 루터는 절대 근본적으로 새롭거나 아니면 어떠한 원칙이 있는 토대에 입각해 직업노동과 종교적 원리를 결합시킬 수 없었다. (중략) 그러므로 루터주의적 의미에서의 단순한 '직업' 사상이 우리가 이제까지 볼 수 있는 한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에 대해 지니는 의미는 어느 모로 보나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123~130)[12] 예정론이 형성되는 데는 두 가지 경로가 가능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등장한 저 위대한 기도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기도자들에게는 종교적 구원의 감정이라는 현상이, 모든 것은 오직 한 객관적 힘의 전유적인 작용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지 절대 그 자신의 가치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고한 의식과 결부되어 있었다. 죄의식에 의해 초래되는 무시무시한 정신적 긴장감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희열에 찬 확신과 그것이 주는 강렬한 감정이 돌연히 그들의 마음에 밀려와, 이 엄청난 은총의 선물은 그 자신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협력한 덕택이라든가 자신의 신앙과 의지의 공로나 특성과 결부될 수 있다는 표상의 모든 가능성을 근절해버린 듯하다. 루터도 자신의 종교적 독창성이 최고조에 달해 『기독교인의 자유』를 쓸 수 있었던 시기에 신의 '은밀한 결단'을 자신의 영속적인 종교적 은총을 가장 확고하게 보장해주는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무한한 원천으로 보았다. 그는 이후에도 신의 은밀한 결단이라는 사상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ㅡ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신학사상에서 결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책임 있는 교회정치가로서 어쩔 수 없이 더욱 '현실정치적'이 되어감에 따라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중략) 그러나 칼뱅에게는 그 사태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즉 교리상의 적대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예정론 교리의 중요성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증대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 3판에 이르러서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발전했으며, 그의 사후 도르트레히트와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종식시키고자 시도했던 대규모의 문화투쟁들에서 비로소 그 중심적인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칼뱅의 경우 이 신의 '가공할 결정'은 루터의 경우처럼 체험된 것이 아니라 사유된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 온통 신에게만 집중되는 종교적 관심의 방향에서 그의 사유가 점점 논리적 일관성을 띠게 되면서 그 교리의 중요성도 점차 증대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179~180)[13] 그런데 이 비장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비인간적인 교리는 그 장엄한 논리적 일관성에 몸을 내맡긴 한 세대의 정서에 대해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즉 각자 개인이 직면하는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인간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삶의 관심사는 다름 아닌 영원한 구원이었는데, 이제 그들은 영원으로부터 확정된 운명을 따라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설교자도 도울 수 없었다. ㅡ 왜냐하면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신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례전도 도울 수 없었다. ㅡ 왜냐하면 성례전이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신에 의해 명령된 것이며, 또한 그러므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신의 은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단지 신앙의 주관적인 '외적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도 도울 수 없다. ㅡ 왜냐하면 참된 교회를 멀리하는 자는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들에 결코 속할 수 없다는 읨에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명제가 타당하기는 하지만,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도 교회에 속하며, 아니 교회에 속하고 그 규율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통해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신의 영광을 위해 신의 계명을 지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심지어 신조차 도울 수 없다. ㅡ 왜냐하면 그리스도 역시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었으며, 신은 영원으로부터 그들을 위하여 속죄의 죽음을 내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즉 (루터주의에서는 아직도 완전한 논리적 일관성을 띠는 형태로 발전하지 못한) 교회적ㆍ성례전적 구원의 절대적 폐지야말로 가톨릭과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고대 유대교의 예언과 더불어 시작되고 헬레니즘의 과학적 사고와 결합되어 모든 주술적 구원 추구 수단을 미신과 독신이라고 비난했던 저 위대한 종교사적 과정, 즉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 여기에서 완결되었다. 진정한 청교도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일체의 종교적 의식의 흔적을 배척했고 노래도 예식도 없이 가까운 사람의 장례를 치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그 어떠한 종류의 '미신', 즉 주술적ㆍ성례전적 방식의 구원 효과에 대한 그 어떠한 신뢰심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신이 은총을 거부키로 결정한 자에게 다시 그 은총을 얻게 해주는 주술적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수단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인간의 내적인 고립은 모든 피조물이 절대적으로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절대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냉혹한 교리와 결합되어, 한편으로 문화와 주관적 종교성에 내재하는 모든 감각적ㆍ감정적인 요소에 대한 청교주의 절대적인 부정적 태도의 근거를 제공했으며 ㅡ 왜냐하면 그러한 요소는 구원에 무익하고 감상적인 환상과 피조물 신격화의 미신을 촉진하기 때문에 ㅡ 또한 그럼으로써 모든 감각적 문화 일반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의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내적 고립은 다른 한편으로 청교주의적 과거를 지닌 국민들의 '국민성'과 제도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저 탈환상적이고 비관주의적인 색채를 띠는 개인주의의 원천 가운데 하나를 형성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182~183)[14] 예정론도 실상은 여기에서 우리가 분석하려는 주제인 신에 대한 신뢰의 배타성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예컨대 특히 영국의 청교주의적 문헌에 눈에 띄게 자주 나타나는, 인간적 부조나 인간적 우정을 일절 신뢰하지 말라는 경고가 그러하다. 심지어 온건한 박스터조차 가장 친한 친구도 깊이 신뢰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으며, 베일리는 아무도 신뢰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타협적인 말을 하지 말라고 직설적으로 충고하고 있다. 오직 신만이 신뢰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주의와 지극히 대조적으로 칼뱅주의가 완전히 발달한 지역에서는 이러한 삶의 태도가 칼뱅 자신이 단지 성례전적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위험시한 개인적 고해성사가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사실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이 신앙 형태가 작용하는 방식의 징후로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신자들의 윤맂거 태도를 발전시키는 심리학적 자극제로서도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즉 이제 감정적으로 강화된 죄의식을 정기적으로 '방출하는' 수단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상적 삶의 도덕적 실천에 대해 지니는 중요성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종교적 상황 전체에 대해 지니는 효과는 명백하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참된 교회에 소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뱅주의자들은 깊은 내적 고립 속에서 신과 교통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183~185)[15] 어떻게 세계가 개인을 에워싸고 속박하는 아주 견고한 끈들을 내적으로 끊어버리는 저 경향과 사회조직의 측면에서 칼뱅주의가 보여주는 의심할 여지 없는 우월성이 결합될 수 있었을까가 처음에는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처럼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바로 이러한 사회조직상의 우월성이야말로, 기독교적 이웃 사랑이 칼뱅주의적 신앙으로 인해 개인이 내적 고립의 압력에 처한 상황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색채에서 도출된다. 그것은 거기에서 우선 교리적으로 도출된다. 세계는 신을 찬미하도록 ㅡ 그리고 오로지 이를 하도록 ㅡ 정해져 있으며, 선택된 기독교인은 자신이 맡은 바 본분을 다해 신의 계명을 집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신의 영광을 증대하기 위하여 ㅡ 그리고 오로지 이를 위하여 ㅡ 존재한다. 그러나 신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활동과 성취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신은 기독교인의 삶이 자신의 계명에 따라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자신의 영광을 증대하는 목적에 이바지하기를 원한다. 칼뱅주의자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사회적 노동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한" 노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의 현세적 삶에 이바지하는 직업노동도 역시 그러한 성격을 띤다. 우리는 이미 루터가 '이웃 사랑'으로부터 분업적 직업노동을 도출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불확실하고 순수한 구성적ㆍ사유적 단초에 머물던 것이 칼뱅주의자들에 와서는 윤리적 체계의 특징적인 일부분이 되었다. '이웃 사랑' ㅡ 그것은 피조물의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신의 영광에만 봉사해야 하므로 ㅡ은 일차적으로 자연법에 의해 주어진 직업 과제의 이행에서 나타나며, 이 과정에서 독특하게 즉물적ㆍ비인격적인 성격,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질서의 합리적 형성에 이바지하는 성격을 띠게 된다. 왜냐하면 성서적 계시에 따르든 자연적 통찰에 따르든 인류의 '유익함'에 봉사하도록 신에 의해 기획된 것이 명백한 이 사회질서를 탁월하게 합목적적으로 형성하고 조직하는 일이야말로 이러한 비인격적인 사회적 유익함에 봉사하는 노동이 신의 영광을 촉진하는 것이며, 또한 바로 그런 연유로 신이 원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190~191)[16] 내세가 현세적 삶의 모든 관심사보다 더 중요시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많은 점에서 더 확실시되었던 시대에 이러한 교리가 어떻게 용납될 수 있었단 말인가? 모든 신자들에게 즉각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고, 그와 더불어 다른 모든 관심사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연 선택되었는가? 그리고 나는 내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ㅡ 그러나 칼뱅 자신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신의 '도구'라고 여겼고 자신의 은총 상태를 확신했다. (중략) 그러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후계자들과 특히 광범위한 계층의 평신도들에게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는 은총 상태의 인식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구원의 확실성' (certitudo salutis)이 절대적으로 중대한 의미로 격상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예정론을 고수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선택된 자들'의 일원임을 인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지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중략) 최소한 개인들에게 자신의 은총 상태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는 한, 정통주의 교리가 적어도 원칙상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결코 없는 입장과 동일한 칼뱅의 자기 증언, 즉 확고부동한 신앙은 은총이 안간 안에서 작용한 결과로 생겨난다는 자기 증언에 만족핟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 교리에 의해 야기된 온갖 고통을 다루어야 했던 목회 실천에서는 더구나 그러했다. (중략) 첫째로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간주하고 일체의 의심을 악마의 유혹으로서 물리치는 것이 절대적인 의무가 된다. 왜냐하면 자기 확신의 결여는 실로 불충분한 신앙의 결과이며, 궁극에는 은총의 작용이 불충분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르심을 '굳게 하라'는 사도의 권고가 여기서는 나날의 투쟁에서 자신의 선택됨과 칭의에 대한 주관적 확실성을 쟁취하는 의무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루터가 만약 참회하는 신앙 속에서 신에게 의탁하면 은총이 있으리라고 약속한 저 겸양한 죄인들 대신에, 자본주의의 영웅적 시대의 강철같이 굳건한 청교도 상인들에게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개별적인 사례에서 재발견할 수 있는 저 자기 확신이 강한 '성도들'이 훈육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러한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직업노동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수단이라고 철저히 가르쳐 각인시켰다. 직업노동이 그리고 오직 직업노동만이 종교적 회의를 씻어버리고 은총 상태의 확실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191~194)[17] 이것이 실천적 차원에서 의미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은, 실제로도 종종 표현되고 잇는 대로, 자신의 구원 ㅡ 정확히는 구원의 확실성이라고 해야 하지만 ㅡ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것이며, 그러나 이러한 창조는 가콜릭에서처럼 개별적인 공로를 하나씩 쌓아감으로써가 아니라, 매 순간 선택되었는가 아니면 버림받았는가의 냉혹한 양자택일에 직면해 행해지는 체계적인 자기통제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198)[18] 물론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행위구원주의'가 아니지만, 심리적 차원에서 의도치 않게 '행위구원주의'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즉 칼뱅의 예정론은 '행위구원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지만, 칼뱅의 후계자들은 실질적으로 '행위구원주의'적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베버의 주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참조.[19] 세계의 '탈주술화', 즉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주술을 배척하는 일이 가톨릭적 신앙에서는 청교주의적 싱앙에서 볼 수 있는 만큼 철저하게 수행되지 않았다. 가톨릭 교도들은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의 은총을 자신의 부족함을 상쇄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사제는 화체의 기적을 행하고 열쇳권을 장악한 주술사였다. 그들은 회개와 참회로써 사제에게 의지할 수 있었으며, 사제는 그들의 죄를 사해주고 그들에게 은총의 희망을 베풀고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으며, 또한 그럼으로써 그 속에서 사는 것이 빠져나올 수도 없고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경감될 수 없는 칼뱅주의자들의 운명인 저 가공할 긴장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칼뱅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이고 인간적인 위안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가톨릭교도들이 아니 심지어 루터교도들조차 그랬던 것처럼 나약하고 경솔하게 산 시간을 강한 선의지로 산 다른 시간으로 벌충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칼뱅주의의 신은 그 신자들에게 상호 간에 아무런 관련도 없이 수행되는 개별적인 '선행들'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고양된 행위구원주의를 요구했다. 칼뱅주의에서는 가톨릭에서 나타나는 바 죄, 회개, 속죄, 평안 그리고 또다시 죄로 이어지는 참으로 인간적인 기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또한 현세적 형벌로 죗값을 치르고 교회의 은총 수단으로 죄의 사함을 받음으로써 한 인간의 전 생애에 대한 결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일언반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상인의 윤리적 실천은 무계획적이고 비체계적인 성격을 벗어나 생활양식 전체를 일관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 18세기 청교주의 사상의 마지막 위대한 부흥운동의 담지자들에게 '메서디스트들'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사실이나 17세기 그들의 정신적 선조들에게 그 명칭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를 갖는 '엄격주의자들'이라는 명칭이 적용된 사실은 모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자연적인 상태에서 은총받은 상태로 승화시키는 은총의 역사는 오직 매 순간과 모든 행위에서 삶 전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만 보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삶은 오로지 초월적인 목표, 즉 구원에 지향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현세적 진행 과정에서 철저히 합리화되었고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증대한다는 오로지 한 가지 관점에 의해 지배되었다. ㅡ 그 결과 "모든 것은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라는 관점이 이보다 통렬하고 진지하게 고수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200~202)[20] 아무튼 칼뱅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가 가톨릭적 승단 생활의 합리적 형태와 공유하는 저 윤리적 생활양식의 체계화는, '꼼꼼한' 청교도가 자신의 은총 상태를 부단히 점검하는 방식에서는 이미 순전히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죄와 유혹 그리고 은총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성장을 연속적으로 또는 개괄적으로 기록하는 신앙일기는, 주로 예수회에 의해 창조된 근대적 가톨릭의 경건성과 교회적으로 가장 열광적인 개혁파 종교집단들에 공통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앙일기가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의 완비라는 목적에 봉사했거나 '영혼의 지도자'에게 신자들 내지 여신자들을 권위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반면, 개혁파 기독교인들은 신앙일기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자신의 맥박이 뛰는 것을 느꼈다." 모든 주요한 도덕신학자들이 신앙일기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이 개별적 덕목에서 자신이 이룩한 발전을 개괄적ㆍ통계적으로 기장(記帳)한 것은 여전히 그에 대한 고전적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신이 기장을 한다는 옛 중세의 관념은 버니언에 이르러서 심지어 무미건조한 특성으로 강화되어, 죄인과 신의 관계가 고객과 가게주인의 관계에 비유될 정도였다. 즉 일단 빚을 진 사람은 자신의 온갖 활동을 통해 벌어들이는 소득으로 기껏해야 불어나는 이자나 갚을 수 있을 뿐이지 원금은 결코 갚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후기 청교도들은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듯이 그렇게 신의 행동도 점검했으며, 삶의 모든 세부 항복에서 신의 손길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리고 칼뱅이 원래 가르친 것과 달리, 그들은 왜 신이 이러저러한 조치를 취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삶의 성화는 거의 사업 경영의 성격을 띨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현존재 전체가 철저히 기독교화된 것은 윤리적 생활양식의 이와 같은 조직적 특성의 결과였는데, 이 특성은 루터주의와 대조적으로 칼뱅주의가 신자들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직적 특성이 삶에 대한 영향력에서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은 칼뱅주의가 그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212~214)[21] Richard Baxter, 1615~1691: 영국 청교주의 목사이자 설교자이며 저술가로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실천신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영국 청교도 교사들의 우두머리'라고 칭해질 정도로 청교주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가 절대적이다. 영국에서 '박스터주의'라고 하면, 온건한 칼뱅주의를 뜻한다.[22] 박스터의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과 『기독교 훈령집』 또는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저작을 검토해보면, 부와 부의 획득에 대한 판단에서 신약성서의 에비온파적 요소가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대번에 눈에 띈다. 부라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위험한 것이며, 부의 유혹은 끝이 없고 부의 추구는 신의 나라가 갖는 엄청난 중요성에 비하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의심스러운 것이다. (중략) 우리는 돈과 재화의 추구를 죄악시하는 사례를 청교주의 문헌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며, 그것을 이 점에서 훨씬 자유로웠던 중세 후기의 윤리적 문헌과 대비해볼 수 있다. 게다가 부에 대한 청교주의의 이와 같은 의구심은 아주 진지한 것이었다. ㅡ 그러나 그것의 결정적인 윤리적 의미와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윤리적으로 진정 배척해야 하는 것은 요컨대 소유에 안주하는 것이고, 부를 향락하며 그 결과 태만과 육욕에 빠지는 것이고, 특히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유는 달리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러한 안주의 위험을 수반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렇다. 또한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이란 내세에 있으므로, 이 지상에서 인간은 자신의 은총 상태를 확신하기 위해 "낮 동안에는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한다. 태만과 향락이 아니라 오직 행위만이 명백히 계시된 신의 의지에 따라 신의 영광을 증대하는 데 이바지한다. 따라서 시간 낭비야말로 모든 죄 가운데 제일가는 그리고 원칙적으로 가장 무거운 죄가 된다.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각자의 소명을 '굳게 하기'에 너무나도 짧고 소중하다. 사교, '쓸모없는 잡담', 사치를 통한 시간 낭비 그리고 심지어 건강 유지에 필요한 시간 ㅡ6시간에서 아무리 길어도 8시간ㅡ 이상의 수면에 따른 시간 낭비도 절대적인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아직 프랭클린의 경우처럼 "시간은 돈이다"라는 명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시간이라는 것은 무한히 귀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낭비한 모든 시간은 신의 영광에 봉사하는 노동의 기회를 상실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335~336)[23] 그(박스터)의 설교에서는 두 가지 동기가 함께 작용한다. 첫째, 노동은 이미 오래전에 그 효과가 검증된 금욕의 수단이다. (중략) 종교적 회의와 소심한 자책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처방된 것과 동일한 것이 모든 성적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처방되었다. 그것은 ㅡ 절제적인 섭생, 채식, 냉수욕 외에도 ㅡ "네 직업에서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었다. 둘째, 노동은 그 이상의 것으로서 무엇보다 신이 규정한 삶 일반의 자기 목적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명제는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노동 의욕의 결핍은 은총받지 못한 상태의 징후이다. 바로 여기서 중세적 태도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사도 바울의 저 명제를 해석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노동이란 단지 개인과 전체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중략) 그러므로 노동하지 않고도 재산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에게는 이 계명이 무관하며, 또한 그와 동일한 논리에서 인간이 신의 왕국에서 영적으로 활동하는 형태인 명상은 문자적으로 해석되는 그 계명보다 우위에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중략) 그러나 박스터가 이처럼 윤리적 노동의무를 범하는 교리를 폐기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부조차 사도 바울의 저 무조건적인 계명에서 면제될 수 없다는 원칙을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하게 설파했다. 재산이 있는 자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설사 그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 할지라도 그가 가난한 자와 똑같이 복종해야 하는 신의 계명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즉 신의 섭리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직업(소명)을 예비하는바, 각 개인은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 더구나 이러한 직업은 루터주의에서처럼 인간이 순응하고 만족해야 할 운명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신의 명령이다. 외견상 사소해 보이는 이 미묘한 차이가 실은 중차대한 심리학적 결과를 낳았으며, 이미 스콜라철학에서 시작된 저 경제적 질서에 대한 섭리적 해석이 더욱더 발전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337~338)[24] 청교주의의 실용주의적 해석 틀을 충실히 따른다면 직업 분화의 섭리적 목적이 무엇인가는 바로 그 분화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스터가 상세히 논하고 있는데, 그의 논의는 여러 측면에서 애덤 스미스의 저 유명한 노동 분업 찬미론을 상기시킨다. 직업의 전문화는 노동자의 숙련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노동 성과를 양적ㆍ질적으로 향상시키며, 그 결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복지와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일반 복지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 동기부여가 순전히 공리주의적이고 당시에 이미 세속적 문헌에서 널리 통용된 관점들과 매우 유사하지만, 박스터가 논한 것을 보면 특별히 청교주의가 거기에 가미한 것이 무엇인가가 금방 드러난다. 먼저 박스터는 자신의 논의의 중심에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시한다. "누구든 고정된 직업 없이 노동을 한다면 그 성과는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일하는 데보다는 빈둥거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박스터는 다음과 같이 그 명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직업노동자)는 질서 속에서 자신의 노동을 수행하는 반면, 고정된 직업이 없는 자들은 끊임없이 혼란에 빠져 자신이 일할 시간도 장소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정된 직업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최선의 것이다." 통상적인 일용노동자들이 강요당하는 비고정적인 노동은 때때로 불가피하기는 하나, 어느 경우든 바람직하지 못한 중간 상태일 뿐이다. '직업 없는 자'의 삶에는, 이미 살펴본 대로, 세속적 금욕주의가 요구하는 체계적ㆍ조직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 퀘이커교 윤리에서 보더라도 인간의 직업 생활은 일관되게 금욕의 덕목을 실행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에게 자신의 직업에 신중하고 조직적으로 종사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양심을 통해 그의 은총 상태를 확증하는 것이다. 신이 원하는 바는 노동 자체가 아니라 합리적 직업노동인 것이다. 청교주의적 직업 관념에서는 그 강조점이 언제나 직업적 금욕의 이러한 조직적 성격에 놓여 있지, 루터에서처럼 신으로부터 일단 부여받은 운명에 만족하는 데 놓여 있지 않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340~341)[25] 이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ㅡ 우리는 지금까지 논한 것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ㅡ 혼신의 힘을 다해 재산의 무절제한 향락에 맞서 싸웠으며 소비, 특히 사치성 소비를 억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금욕주의는 전통주의적 경제윤리의 장애로부터 재화 획득을 해방시키는 심리학적 결과를 낳았고, 또 이윤 추구를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신이 직접 원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질곡을 분쇄해버렸다. 육욕에 대한 투쟁이나 외적인 재화에 집착하는 태도에 대한 투쟁은, 청교도들과 더불어 퀘이커교의 위대한 호교론자인 바클레이도 명백히 입증하고 있듯이, 합리적인 부의 취득에 대항하는 투쟁이 결코 아니라 부의 비합리적인 사용에 대항하는 투쟁이었다. 그런데 부의 비합리적 사용은, 피조물 신격화가 되기 때문에 배척해야 하는 그리고 더 나아가 봉건적 감각과 매우 유사한 과시적 형태의 사치를 높이 평가하는 데서 특히 잘 엿볼 수 있다. 이는 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개인적 삶과 전체적 삶의 목적을 위해 부를 합리적이고 공리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상치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고행을 강요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산을 필요하고도 실제적으로 유용한 일에 사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금욕주의에서는 '안락함'이라는 개념이 재화 사용의 목적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범위를 특징적인 방식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지사이지만 이 개념과 결부된 생활양식의 발전이 세속적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인생관 전체를 가장 일관되게 대변한 퀘이커 교도들에게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명확하게 관찰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화려한 허식과 외관의 기사 계급이 견고하지 못한 경제적 토대에 의존하면서 절제적인 소박함보다 추례한 우아함을 선호한 데 반해, 퀘이커 교도들은 시민계층적 '가정'이 주는 정결하고 견고한 안락을 이상으로 내세웠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351~352)[26] 무엇보다 어떤 한 직업의 유용한 정도와 그에 상응해 신이 기뻐하는 정도는 물론 일차적으로 도덕적 척도에 따라서,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그 직업에서 생산되는 재화가 '전체 사회'에 가지는 중요성의 척도에 따라서 평가되지만, 그에 이어 세 번째로 그리고 자명한 일이지만 실천적으로 가장 중요한 관점이 대두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경제적 '이윤성'이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이 삶의 모든 자에서 역사한다고 믿는 신이 그의 신자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이윤의 기회를 준다면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깊은 기독교인이라면 그러한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신의 부름에 따라야 한다. "만약 신이 너희에게 너희의 영혼이나 다른 자들의 영혼에 해를 끼치지 않고도 다른 방법보다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이 방법을 거부하고 오히려 더 적은 이윤을 창출하는 방법을 따른다면, 너희는 너희가 받은 소명(calling)의 목적 가운데 하나를 방해하는 것이 되고, 신의 청지기(stewart)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되며, 또한 신의 선물을 받아 신이 요구할 때 신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물론 육욕과 죄를 위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진정 신을 위한 것이라면 너희는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좋다." 이렇게 부는 단지 나태한 무위와 죄악적인 삶의 향락으로 유혹하는 경우에만 의심스러운 것이며, 부의 추구도 단지 후일 근심 없고 안일하게 살 수 있기 위해 행해지는 경우에만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에 반해 직업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서의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절실히 요구되기도 한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341~342)[27] 사경제적 부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금욕주의는 부정직성에 대항해 투쟁한 것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충동적인 소유욕에 대항해서도 투쟁했다. ㅡ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욕이야말로 금욕주의가 '탐욕', '배금주의' 등으로 배척했던, 부유해지는 것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삼는 부의 추구이기 때문이었다. 즉 소유 그 자체는 유혹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금욕주의는 "항상 선을 원하면서도 항상 악을" ㅡ 소유와 그 유혹이라는 금요주의적 의미에서의 악 ㅡ "낳는" 힘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금욕주의는 구약성서와 더불어 그리고 '선행'에 대한 윤리적 평가와 매우 유사하게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를 무엇보다 먼저 배척해야 할 태도로 보면서도, 직업노동의 열매로서의 부의 획득을 신이 축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금욕주의가 부단하고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세속적 직업노동을 단연 최상의 금욕적 수단으로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거듭난 인간과 그 신앙의 순수성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확증으로 평가한 이유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금욕주의가 선과 악을 동시에 낳는 힘이라는 명제를 뒷받침해주는 이 두 가지 근거 가운데 후자가 전자보다 우리의 논의에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그와 같은 종교적 평가야말로 이 연구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지칭해온 저 삶의 태도가 확장되는 데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욕주의에 의한 소비의 억압을 금욕주의에 의한 영리 추구의 해방과 결합해서 본다면, 그로부터 나타나는 외적인 결과는 자명하다. 즉 금욕적 절약 강박에 의한 자본형성이 바로 그것이다. 획득한 부의 소비적 사용이 제어되면서 그 부의 생산적 사용, 다시 말해 투자자본으로서의 사용이 촉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352~353)[28] 청교주의적 인생관은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모든 상황에서 ㅡ 그리고 이 점이 단순히 자본형성을 조장한 것보다 훨씬 중요함은 물론이다 ㅡ 시민계층적이고 합맂거인 경제적 생활양식으로의 발전 경향을 촉진했다. 청교주의적 인생관이야말로 이러한 생활양식의 가장 본질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그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담지자였다. 그것은 근대적 '경제인간'의 요람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교주의적 삶의 이상은 청교도들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부의 '유혹'에서 오는 시험이 너무나 강한 경우에는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아주 빈번하게 관찰하는 현상이 있으니, 그것은 청교주의 정신의 가장 참된 추종자들이 이제 막 사회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한 일련의 소시민과 농민계층에서 나오는 반면, '부유층'은 심지어 퀘이커 교도들 가운데서도 흔히 초기의 이상을 기꺼이 부정할 채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우리는 여기에서 존 웨슬리로부터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것에 대해 충분히 모토가 될 만한 구절 하나를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염려하는 바는, 부가 증대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종교의 속 알맹이가 그에 비례해 감소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문제의 본질상 참된 신앙의 부흥을 그것이 어떤 것이든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필연적으로 근면과 검약을 낳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이 근면과 검약은 부를 창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가 증대하면 그에 따라 모든 형태의 자만심과 번뇌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애착이 증가한다. (중략) 그리하여 종교의 형식은 그대로 남으나 그 정신은 점차 사라져간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355~356)[29] 그 전까지 화폐 취득은 단지 합법적 형태로만 이루어졌을 뿐 종교적 정당성은 확보하지 못했다. 이제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지난하다"는 중세적 명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형적인 시민계층적 직업 에토스가 탄생했다. 즉 시민계층적 기업가들은, 만일 자신이 형식적 공정성의 한계를 지키고 자신의 도덕적 품행이 나무랄 데 없으며 자신의 부를 비속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신으로부터 충만한 은총과 확실한 축복을 받았다는 의식을 갖고 자신의 영리적 이해관계를 추구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종교적 금욕주의의 힘은 그 밖에도 시민계층적 기업가들에게 냉정하고 양심적이며 고도의 노동능력을 소유하고서 노동을 신이 원하는 삶의 목적으로 삼고 거기에 매진하는 노동자들을 제공했다. 그리고 종교적 금욕주의의 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민계층적 기업가들에게 현세에서 재화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은 신의 섭리의 특별한 역사라고 확신시키으로써 위안을 주었다. (중략) 그리고 다른 측면, 즉 노동자의 경우를 보면, 예컨대 친첸도르프류의 경건주의는 영리를 추구하지 않고 직업에 충실한 노동자들을 사도들이 보인 모범에 따라 살고 또 그럼으로써 제자의 은혜로운 능력을 부여받은 자라 하여 찬양했다. (중략)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이러한 관점을 아주 철저하게 심화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 규범이 경제 영역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요소를 창출해냈다. 즉 노동을 소명으로, 은총 상태를 확신하기 위한 최선의, 아니 궁극적으로는 유일한 수단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규범에 심리학적인 동인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또다른 한편으로 기업가의 화폐 취득도 '소명'으로 해석함으로써 이와 같이 특별한 노동 의욕을 가진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이렇게 보면 신의 나라에 대한 배타적인 추구, 다시 말해 오직 소명으로 주어진 노동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신의 나라에 도달하려는 시도와 교회규율이 당연지사지만 특히 무산계급에 강요한 엄격한 금욕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노동'생산성'을 강력히 촉진할 수밖에 없었음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영리 활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기업가의 특징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노동자의 특징이 되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359~360)[30] 이만큼 논의가 진행된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이 논문의 서두에서 인용한 프랭클린의 글을 읽어보면, 거기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지칭한 정신적 태도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우리가 지금까지 청교주의의 직업적 금욕의 내용이라고 밝혀낸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다만 프랭클린의 경우에는 그 종교적 정초가 결여되어 있는데, 이는 그사이에 서서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중략) 고대 아태네의 전성기가 되풀이될 수 없듯이, 그러한 시대 역시 우리의 문화 발전 과정에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ㅡ 반면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골방에서 나와 직업 생활 영역으로 이행함으로써 세속적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또 공장제ㆍ기계제 생산의 기술적ㆍ경제적 전제 조건과 결부된 저 근대적 경제질서의 강력한 우주를 건설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그 추진력에 편입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ㅡ 비단 직접적으로 경제적 영리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ㅡ 엄청난 강제력으로 규정하며 아마도 그 마지막 톤의 화석연료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규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스터의 견해에 따르면, 외적인 재화에 대한 염려는 마치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 있는 얇은 외투"처럼 성도들의 어깨 위에 걸처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 외투를 쇠우리로 만들어버렸다.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외적인 재화는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에서 결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오늘날 금욕주의의 정신은 그 쇠우리에서 ㅡ 영구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ㅡ 사라져버렸다. 아무튼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략) 미래에 누가 저 쇠우리 안에서 살게 될는지,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발전 과정의 끝자락에 전혀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게 될는지 혹은 옛 사상과 이상이 강력하게 부활하게 될는지, 아니면 ㅡ 둘 다 아니라면 ㅡ 일종의 발작적인 자기 중시로 치장된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될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만약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된다면, 그러한 문화 발전의 '마지막 인간들'에게는 물론 다음 명제가 진리가 될 것이다.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 ㅡ 이 무가치한 인간들은 그들이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공상한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364~367)[31] We investigate the thesis widely credited to Max Weber that Protestantism contributed to the rise of industrial capitalism by estimating the associations between the percentage of Protestants and the development of industrial capitalism in European countries in the mid- to late nineteenth century. Development is measured using five sets of variables, including measures of wealth and savings, the founding date of the principal stock exchange, extension of the railroads network, distribution of the male labor force in agriculture and in industry, and infant mortality. On the basis of this evidence, there is little empirical support for what we call the "Common Interpretation" of Weber's The Protestant Ethic, namely the idea that the strength of Protestantism in a country was associated with the early development of industrial capitalism.[32] Many theories, most famously Max Weber’s essay on the “Protestant ethic,” have hypothesized that Protestantism should have favored economic development. With their considerable religious heterogeneity and stability of denominational affiliations until the 19th century, the German Lands of the Holy Roman Empire present an ideal testing ground for this hypothesis. Using population figures in a dataset comprising 272 cities in the years 1300–1900, I find no effects of Protestantism on economic growth. The finding is robust to the inclusion of a variety of controls, and does not appear to depend on data selection or small sample size. In addition, Protestantism has no effect when interacted with other likely determinants of economic development.[33] Overall, these results show that Protestant (Lutheran and Calvinist) and Catholic cities followed very similar growth trajectories in the period 1300–1900. These findings are robust, hold in a series of subsets of the data, and are unlikely to be due to selection into the dataset, or small sample size.[34] By historical circumstance the regions of industrial concentration in Germany were also heavily Catholic, notably the Rhine-Ruhr area and Silesia. This may explain, in part, why the Catholic church awoke sooner than the Protestant churches to the problem of an industrial proletariat.[35] 베버는 이 책에서 칼뱅주의를 계속해서 '비인간적, 비합리적, 냉정함, 엄혹함' 등의 부정적인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36] 물론 본 책을 언급하는 경우가 간혹 있으나, 그럴 때에도 칼뱅계열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되도록 피해서 인용하는 편이다. 아무튼 언급했다가 궁금증이 생겨서 볼 경우도 있으니 거의 언급 자체를 안하는 편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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