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피니어스 게이지 Phineas Gage | |
본명 | 피니어스 P. 게이지 Phineas P. Gage |
출생 | 1823년 7월 9일 |
미국 뉴햄프셔주 그래프턴 카운티[A] | |
사망 | 1860년 5월 21일 (향년 36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A]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8cm, 68kg[3] |
부모 | 아버지 제시 이튼 게이지[4] 어머니 해나 트러셀 스웨트랜드 게이지 |
형제 | 페브 제인 사턱 로스웰 록웰 게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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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리학에서 전두엽이 성격이나 자제심에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예시이다. 하도 예시로 많이 나와서, 사망한 사람을 그저 연구 수단으로서만 대한다는 생각에서 고인 모독의 피해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심리학뿐만이 아니라 신경과학, 정신의학 심지어 철학에서도 예시로 나온다. 기질성 뇌증후군[5]의 대표 예시이자 두부외상성 치매의 대표 예시.[6]
2. 게이지가 당한 사고와 그에 따른 영향
미국 버몬트에 사는 평범한 철도직원이었으나, 1848년 폭발물의 잘못된 매설로 굵기 3cm 길이 1m의 쇠막대가 얼굴을 꿰뚫는 사고를 당했다. 쇠막대는 왼쪽 뺨을 통과해 왼쪽 눈을 지나 전두엽을 완전히 통과해 버렸다. 게이지는 25m를 날아갔지만 놀랍게도 살아있었고, 금방 일어났으며 말도 했다.[7] 막대는 그의 머리를 관통하고 더 날아가 멀리 떨어졌고, 곧 회수되었다.머리와 입에서 피와 뇌수 등을 흘리며 그는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가까이에 있던 병원을 찾아갔고, 공교롭게도 그 병원의 의사는 당시 미국 뇌손상 최고 권위자였던 존 마틴 할로우(John Martin Harlow; 1819 - 1907)였다. 처음 며칠간은 의사 본인도 회생 가능성이 없다며 반쯤 포기한 상태였고, 실제로 그의 상태 또한 머리에서 고름을 쏟아내고 간발적으로 코마 상태에 빠지는 등 절대 좋지 못했지만, 의사의 치료에 힘입어 결국 회복했다. 사고 한 달 만에 지인들을 완벽하게 알아보고 의사 몰래 병원을 빠져나가 돌아다니는 등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왼쪽 눈을 잃은 것 이외에는 건강을 거의 완벽하게 회복했지만, 게이지는 더 이상 예전의 게이지가 아니었다. 적어도 얼마간은.
사고 이전에는 말수도 적고 성실하며 온순하고 인내심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두엽의 부상에 의해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버려서, 감정 기복이 심해져 자주 화를 내었으며 끈기나 시간을 요구하는 숙련작업의 효율이 엄청나게 떨어졌다. 결국 숙련공 위주로 운영되었던 철도회사 입장에서는 더 이상 가치가 없어졌기에 해고당했다.
다만, 이는 할로우의 초기 진료기록에 따른 것인데, 할로우는 이후 게이지가 칠레로 건너가며 그와 일체의 연락이 끊겼고, 본인도 이런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한다는 것이 환자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게이지 사후에야 출판을 하게 되었다. 칠레로 건너가기 전에도 그는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되찾고 재(再) 사회화도 마쳤다느니. 원래의 쾌활하고 성실한 성격을 되찾았고, 동물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자상한 성격으로 되돌아왔다는 기록이 그를 칠레에서 만난 의사의 기록과 그의 지인들을 수소문해 인터뷰한 할로우 박사의 후기 논문에 남아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여론에 대한 반작용으로 쓰여진 소설로 보이고 확실한 건 그가 칠레에서 7년을 보냈다는 것 정도밖에 없다.
이후 박물관에 살아있는 전시물로서 한동안 본인을 전시하기도 했고, 그 뒤로는 광고 등에 기용되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렇게 번 돈으로 그는 작은 마굿간을 운영했고, 사고 4년 만인 1852년 칠레로 건너가 장거리 역마차 운수업에 종사했다. 이때 그의 동료들의 평가 등을 보면 상당히 긍정적이었고, 무엇보다 말 여섯 마리를 끌고 비포장 도로를 13시간 동안 100마일 이상 달리는 당시 장거리 역마차 운수업의 특성상 성격적,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 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성격적 결함도 이때는 상당 수준 복구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거꾸로 똑같은 작업을 매일같이 계속하는 생활이었기에 뇌손상을 입은 그가 꽤 오래 버틸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그 시절은 동료들의 평가 같은 건 없었고 다만 그를 재미있게 여겼던 현지 의사가 남긴 짧은 기록만 있는데 너무 소략하여 큰 가치를 두기는 힘들다. 이렇게 고된 일을 7년간 계속한 결과 그의 신체, 정신에 심각한 무리가 오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1859년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는 산타클라라에서 얼마간 농장 일을 보기도 했지만, 7년간의 고된 노동의 결과 그의 몸은 극도로 망가져 뇌전증 발작에 시달리게 되어 일을 그만두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뇌전증 지속증(status epilepticus)[8] 끝에 사망하였다. 향년 36세.
게이지의 뇌를 꿰뚫은 쇠막대는 회수되어 그의 소유가 되었고, 그는 사고 1년 후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 박물관에 이 막대를 기증하였으나, 얼마 후 마음이 바뀌었는지 친척을 통해 도로 되찾아갔다. 이후 그는 평생 이 막대를 자신의 보물 1호이자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며 가는 곳마다 들고다녔다고 한다. 게이지 사망 후 할로우 박사는 유족들의 동의하에 그의 두개골과 쇠막대를 받아가 세상에 공개했고, 현재 그의 두개골과 쇠막대는 그가 쇠막대를 잠시나마 기증했었던 하버드 의과대학 소속 워런 해부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인격이 회복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인권사상이 강해진 현대에 그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대하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주장일 뿐, 실제로 그의 인격이 회복되었는지의 여부를 알 길은 없다. 그 시절에는 그냥 걷고 움직일 수 있으면 정상이라고 판단했고 현대와 같은 뇌기능 분석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3. 유언비어와 고인드립의 피해자
워낙에 충격적이고 인상적인 사고의 주인공이라 그런지, 그를 둘러싼 소문들이 많은데, 대부분은 근거 없는 고인드립에 불과하다. 그의 성격 변화는 다소 난폭해지고 욕쟁이가 되었으며, 성질이 급해져 철도회사에서 해고되었다는 것[9] 정도만이 그의 생전에 작성된 할로우 박사의 논문에 기록되어 있고, 그나마도 후에 회복되어 사고 이전 이상으로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워낙 자료가 적다 보니 자세한 정황은 현재에도 불명이다. 그가 거짓말을 일삼거나,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거나, 성욕에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은 그의 생전에 기록된 적도, 그의 지인들이 증언한 바도 없으며 대부분은 그의 사망 이후 부풀려진 소문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의 성격 변화 자체도 두부 외상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남자가 갑자기 큰 사고를 당하고 기적적으로 회복하는 과정, 또는 이 과정에서 찾아온 인생의 변화 및 주변의 관심 증가 등에 인해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자주 간과되는 부분인데, 피니어스 게이지가 뇌에 기질적인 손상을 입은 것과 별개로, 순수하게 심리적인 차원에서 PTSD 등의 정신장애가 생겼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 대상에 놓아야 한다.
워낙에 뇌 자체가 알려진 것이 적은 기관이고, 게이지와 같은 사고를 당하고 살아남아 의사들이 소견을 남긴 경우는 더더욱 적기 때문에 그의 일설 자체가 상당히 과장되거나 왜곡된 면이 없지 않다. 대표적으로 앗! 시리즈에 의하면 그가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서커스단에서 머리에 막대를 꽂은 상태로 등장했으며, 죽은 직후 시체를 부검하고자 온갖 대학 병원 및 의학 박사들과 시체 몸값을 두고 경쟁을 벌였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전부 잘못된 정보이다. 애초에 그의 상처는 뼈도 상당히 아물었고 피부 또한 재생되어 큰 흉터가 남긴 했지만 절대 쇠막대를 다시 꽂을 수는 없었다. 시체의 몸값을 두고 의사들이 경쟁했다는 일화는 뇌과학 계열의 또 다른 대표 케이스로 분류되는 H.M의 일화와 뒤섞인 것으로 보인다.
4. 비슷한 사례
피니어스 게이지보다 먼저 몸에 큼직한 구멍이 나고도 살았던 일이 있었다. 1822년 6월 6일, 미국 미시건주 매키낵이란 마을에서 만 19세 캐나다 국적 프랑스계인 알렉시스 생 마르탱(Alexis St. Martin, 1802~1880)이 우연히 산탄총을 몸에 맞았다.[10] 군의관 출신이던 윌리엄 버몬트(William Beaumont, 1785~1853)가 2시간 넘는 수술 끝에 총알을 제거했다. 하지만, 왼쪽 젖꼭지에서 반뼘 정도 아래쪽, 바깥쪽으로 아기 주먹보다 큰 구멍이 생겼다. 마취제도 없던 시절이라 의식을 차린 마르탱이 놔두라고 하여 놔뒀는데 덕분에 이 구멍을 통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위를 버몬트 의사는 엄청나게 연구 관찰할 수 있었다. 채소가 고기보다 천천히 소화된다든지, 술이나 찬 것을 마시고 위가 다르게 반응한다든지 당시로선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들이 이 실험으로 입증되었기에 그야말로 마르탱이 없었더라면 연구도 확증도 못할 일이었다.게이지와 달리 마르탱은 당시 천수를 누리고 결혼도 하여 가정도 가졌고 나중에는 캐나다군 부사관까지 될 정도로 몸은 지극히 멀쩡했다. 그래도, 이 구멍을 통하여 위를 정밀 조사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버몬트 의사는 집게로 위를 만져보기도 하여 마르탱이 기겁했을 정도로 별별 실험을 해댔다. 이 사례 역시 앗! 시리즈에서 다뤘는데 여기에선 정확하게 그려졌다. 이 책자에선 버몬트가 위를 자꾸 건드려 마르탱이 달아나고 버몬트가 기다리라고 쫓아가는 그림도 있었는데 이 또한, 확실한 실화이다. 사실, 지금이라면 버몬트가 욕을 먹고 처벌당할 일을 했는데 생마르탱이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실험을 수행하도록 허용한 것이 아니라 버몬트가 글을 모르는 마르탱이 하인으로 일하기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었던 것. 이럼에도 이 일을 국내 사이트 검색하면 아주 왜곡시켜 마르탱이 협조하여 둘이 사이가 좋았다고 왜곡되어 나온 것도 있다.
당연히 마르탱은 목숨 살려준 댓가로 그렇게 해줬으니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분노했고 결국, 10년 넘게 실험에 협조하던 마르탱은 더는 못 버티겠다고 실험 협조를 거부하고 캐나다 퀘벡으로 멀리 이사가버렸고 버몬트가 죽은 뒤 장례식에 오지도 않았다. 이럼에도 버몬트는 더 실험을 하려고 마르탱을 별별 억지를 부려 다시 불러오게 하려고 20년동안 온갖 추악한 시도를 했다. 하지만, 마르탱은 이쯤되면 결혼하여 아내를 통해 글도 알고 법적으로 지식도 쌓아서 11년동안 실험체로서 당한 온갖 일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관련 책자 판권도 요구했다. 버몬트는 거절했고 당연히 마르탱은 그럼 댁과는 평생 만날 일이 없을거라고 화냈기에 둘은 이렇게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버몬트는 11년동안 실험한 것을 1833년 `위액에 관한 실험과 관찰 그리고 소화생리학'을 출간해 유명해졌다. 이 책에서 위액의 특성과 일반적인 소화과정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개의 위장을 뚫어 실험한 베르나르와 파블로프를 포함한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에 기반이 되었기에 그는 `위장 생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것으로 이름을 날려 세인트루이스 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에도 미국에 윌리엄 버몬트 병원이란 이름으로 기려져 남아있다.
마르탱은 이후 부사관으로 자원해 입대했으며 어렵게 살지 않다가 천수를 누렸는데 늘그막에 술에 빠져 고생하긴 해도 게이지와 다른 삶을 누린 셈이다. 그는 아들과 손자들에게 유언으로 내 시체를 편히 땅에 잠자게 하라고 남겼다. 마르탱의 시체를 돈주고 부검하려고 하던 의사들이 찾아왔지만, 자손들은 유언을 이야기하며 모조리 거절해 마르탱은 무덤에 묻혀졌다. 게이지는 얼굴과 뇌를 크게 다쳤고 마르탱은 상반신에 구멍이 났기에 정도가 다르긴 해도 둘 다 그 부상을 통해 인류 의학 및 여러 연구에 큰 기여를 하게 한 셈이다.
5. 방송에서의 소개
방송에서는 스펀지에서 '무서운 스펀지' 특집 때 소개된 적이 있다. 다만 이때도 잘못된 정보들을 위주로 다뤘는데, 하다못해 위키페디아의 서술을 검색만 좀 했어도 바로잡을 수 있었던 이야기도 있었다.또 2018년 5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부분을 다루었다. '두개골의 서書'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으며 그의 생애보다 뇌과학을 중심으로 밝혔다. 그의 생애에 대해선 그가 두개골을 다친 후 성격이 난폭해졌고 서커스에서 자신의 관통상을 보여주거나 칠레에서 몇 년 동안 마부로 활동한 것 등에 대해 다뤘으며 그의 사후 그가 여러 대학 박사들에게 자신의 신체를 해부할 권리를 돈을 받고 팔아 사후 하버드대학교에 그의 두개골이 전시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미드 기묘한 이야기 시즌2 3화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된다.
미국의 유튜브 채널 CrashCourse의 과목 중 하나인 심리학에서도 소개된다. 특히 4화에서는 섬네일 이미지에도 게이지의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하며 해당 화의 주제가 '뇌를 알아보자'이기에 게이지의 사례를 심도 있게 설명한다.
두뇌공조 4화에서도 피니어스 게이지의 이야기가 짧게 언급된다.
[A] "Phineas Gage: American railroad foreman",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A] [3] 출처[4] Jesse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영어식 표기로 남자 이름으로도 종종 쓰인다.[5] 기질성 정신장애라고 하지만 좋지 않은 용어이기에 최근엔 쓰지 않고 이런 식으로 부른다.[6] 치매라고 해도 알츠하이머와 혈관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저렇게 뇌손상이나 종양 그리고 간질과 신경매독이 장기화되어 성격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면 치매로 분류한다. 흔히 술 마시다가 넘어져서 머리가 깨지게 되면, 저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7] 실제로 그와 비슷한 사고를 당했던 사람들은 피니어스 게이지를 제외하고는 전원 즉사했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게이지처럼 왼쪽 눈을 지나 전두엽을 완전히 통과해 버린 사람도 있었다.[8] 뇌전증 발작이 5분 이상 지속되는 경우. 현재는 벤조디아제핀 및 항경련제를 투여하여 응급상황에 대응한다.[9] 다만 현대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가 겪은 사고를 산업재해로 판단할 수도 있다. 애초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사건사고를 겪은 사람이 뇌손상을 입지 않았음에도 성격변화를 겪는 것은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만약 게이지가 자신의 사고에 회사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가 난폭하게 반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장 당신이라면 회사에서 일하다가 머리가 관통당했는데 이전처럼 일하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제정신이겠는가?[10] 뚱딴지 시리즈에서 80년대 나오길, 마르탱이 밤중에 보안관을 놀라게하여 오발하게 만들었다고 만화로 그린 바 있었는데, 검색하면 가게에서 우연히 오발했다든지 원인불명 오발이라고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