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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6 13:50:46

피레아스


그리스의 도시
피레아스
Πειραιάς
Piraeus
<colbgcolor=#004C98> 국가
[[그리스|]][[틀:국기|]][[틀:국기|]]
행정구역 아티키주 피레아스현
면적 50km2
인구 448,051명 (2021년 기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시간대 UTC+02:00 (EET)

1. 개요2. 역사3. 자매결연 지역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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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의 도시로 전통적으로 아테네의 외항이다. 그로인해 고대 아테네의 모든 무역과 해운업을 담당하였고 해군기지가 위치해 있었다.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에도 피레아스는 그리스의 주요 항구로 유럽에서 5번째로 큰 항구로 매년 437만명의 승객을 수송한다.

2. 역사

기원전 26세기 부터 피레아스 일대에는 사람이 거주하였다. 본격적으로 피레아스가 발전한 것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직전이다. 페르시아와의 긴장감이 높아지자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아테네에서 기존에 쓰던 팔레룸이 낡고 수심이 얉아 트리에레스를 건조하고 정박할 수 없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기원 전 493년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 하에 피레아스에 조선소가 만들어지고 요새화하였다. 그 결과 피레아스는 페르시아와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이후 피레우스는 아테네 해군의 기항이 되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기원 전 471년 테메스토클레스는 아테네와 피레우스를 잇는 성벽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는 크세르크세스대왕이 아테네를 불태웠기 때문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위해서는 성벽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코린트 지협만으로 충분히 페르시아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벽 건설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아테네는 성벽 건설을 강행하였고 이는 스파르타와 사이가 나빠지는 데 역할을 하였다. 성벽은 키몬페리클레스 하에 더 보강되었고 항구도 더 크게 확장되어서, 그 결과 피레우스는 더욱더 번영하였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가 패배함으로 피레우스는 이전과 같은 위상을 잃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테네의 자랑이었던 해군이 전쟁으로 전멸되었고 피레우스를 안전하게 보호하던 성벽도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피레우스의 자리를 로도스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 이후 피레우스는 그저 그런 항구 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비잔틴 제국시기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매우 떨어져 있어서 피레우스 항구를 쓸 이유가 없었고, 이는 오스만 제국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피레우스가 다시 발전한 것은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나서다. 그리스 왕국은 수도를 아테네로 정했고, 피레우스는 아테네와의 근접성 덕분에 그리스의 주요 항구이자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1869년 아테네-피레우스 철도의 완공 그리고 1893년 코린트 운하의 건설로 피레우스는 더더욱 발전하였고 그리스의 경제 수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피레우스의 발전은 주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피레우스와 그 배후 도시인 아테네는 개발이 제한되어서 공업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결국 테살로니키파트라에게 그리스 제2의, 제3의 도시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레우스는 그리스의 주요한 도시이자 항구로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3. 자매결연 지역

4.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