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하익봉(河益鳳) |
생몰 | 1926년 8월 7일 ~ 1945년 5월 20일 |
출생지 |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면 선구리 (현 경상남도 사천시 선구동) |
사망지 | 부산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하익봉은 1926년 8월 7일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면 선구리(현 사천시 선구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3년경 경남 진주군 진주공립중학교에 재학하던 중 박노근, 김상훈(金相勳), 강필진(姜必鎭) 등과 함께 광명회(光明會)를 조직했다. 광명회는 독서 클럽으로, 한국 역사를 공부, 토론하고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단체였다. 이들은 평소 절친한 친구였는데, 특히 박노근의 아버지와 하익봉의 삼촌이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박노근과 하익봉은 졸업 후에는 독립군에 가담하기로 약속했다.1944년 9월, 하익봉은 진주공립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진해비행장 건설공사 현장에 강제 동원되었다. 이들은 천막으로 지은 막사에서 공동 숙식하며 온갖 중노동에 시달렸다. 하익봉은 그 상황에서도 동창생들에게 한국어 사용을 생활화할 것과 독립군의 활약상을 전파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하다가 1944년 9월 23일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진해헌병대 영내에서 약 40일간 구금된 채 학교 내외에 퍼져 있는 항일운동과 조선 독립을 위한 써클 활동의 사실유무 등의 자백을 강요받으며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이후 1944년 11월 7명의 동지들과 함께 군용 트럭편으로 부산지검에 송치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은 끝에 1945년 5월 20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하익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