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찬석 河燦錫 | |
직업 | 바둑기사 |
소속 | 한국기원 |
출생 | 1948년 12월 20일 경상남도 합천군 |
사망 | 2010년 9월 14일 (향년 61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입단 | 1967년 |
단급 | 九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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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바둑 기사이다. 1963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1975) 九단의 문하생으로 유학을 간 후 일본기원 五단까지 승단한 뒤[1] 1970년 귀국해 한국기원 四단을 인정받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제18기 국수전에서 하찬석은 당시 국수전 타이틀 보유자인 동문 윤기현 七단(당시)을 3-1로 꺾고 첫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이듬해 제8기 왕위전에서 동문 선배 김인 七단(당시)마저 3-1로 무너뜨려 2관왕에 올랐다. 1975년 김인과 제9기 왕위전 결승에서 다시 만나 접전끝에 2-3으로 타이틀을 내주었지만 제19기 국수전에서는 강철민 五단(당시)을 3-1로 누르고 국수 2연패를 달성했고 새로 창설된 MBC배에서는 결승에 올라 김희중 四단(당시)에게 1-2로 패하고 준우승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조훈현이 귀국하면서 하찬석의 시대는 너무 빨리 저물었다.1976년 제20기 국수전에서 1-3으로 타이틀을 조훈현에게 빼앗긴 후 1977년 제16기 최고위전과 제2기 TBC왕위전 결승에서 다시 맞섰으나 두 기전 모두 풀세트 접전끝에 각각 2-3으로 패했다. 1978~79년 국수, 왕위, 국기, 최고위전 등 4개 기전에서 또다시 조훈현에게 도전한 하찬석은 이번에는 모조리 0-3으로 완패했다. 각 기전 모두 5판 3승제였으니 20번기를 벌인 셈인데 12전 12패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왕위전과 국수전에서는 0:2로 막판에 몰린 후 칭병하고 각각 3국을 기권하였다.
1980년 제15기 패왕전 결승에서 다시 조훈현에게 0-3으로 패퇴한 후 그는 고향 합천으로 내려가 칩거하면서 중앙 무대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오랜 침잠을 거쳐 1985년 제3기 MBC 제왕전 결승에 올라 다시 조훈현에게 0-2로 물러났지만 이어서 열린 제2기 박카스배 결승에서 상대전적 25연패를 딛고 드디어 난적 조훈현을 3-1로 꺾으면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86년 제25기 최고위전에서 다시 조훈현에게 도전하여 1-3으로 물러나고 제3기 박카스배 결승에서도 조훈현에게 0-3으로 무너져서 조훈현의 제3차 천하통일을 허용하였지만 제5기 KBS 바둑왕전에서 8강전에서 조훈현을 꺾은 후 결승에서 김희중을 2-1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여 조훈현의 전관독점을 다시 무너뜨렸다. 1992년 八단전에서 우승하였고 2003년 九단에 오른 뒤에도 고향인 합천과 대구 등지에 거주하면서 상대적으로 바둑 불모지인 이 지역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바둑서적 저작에도 힘을 기울였다.
2010년 9월 14일 지병인 직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향년 61세.
2010년 고인을 기리는 의미에서 합천군이 후원하고 한국기원이 개최하는 하찬석 국수배 영재바둑대회가 탄생했다.
2. 기풍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기타니 도장에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九단과 가지와라 다케오(梶原武雄) 九단의 지도하에서 세력바둑을 깊이 연구하고 실전에서 이를 실험해보았다고 한다. 1969년 三단시절 아마노 마사후미(天野雅文) 三단(당시)에게 4월23일에 벌어진 승단전에서 시도한 팔진도같은 기묘한 포석[2]이나 8월28일에 열린 제18기 왕좌전 예선에서 사카키바라 쇼지(榊原章二) 八단(당시)에게 시도한 화점 어깨 짚음[3]이 그 예이다.후일 한국기원 부총재를 역임한 관전기자 박치문은 1976년 바둑잡지 "기도"에 연재한 칼럼에서 서서히 끈질기게 조여가는 하찬석의 기풍을 "무딘 칼날의 명검"으로 묘사하였다.
3.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1] 일본에서는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유학시절중 조훈현과는 1무승부, 조치훈과는 1승1패를 기록하였다.[2] 동년 5월17일 제6기 프로십걸전 5,6위 결정전에서 동문인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五단(당시)이 하시모토 쇼지(橋本昌二) 九단에게 같은 포진을 시도하여 쾌승하고 주목을 받았다. 하찬석 본인은 1985년 10월7일에 열린 제10기 기왕전 본선리그 24국에서 김희중에게 다시 시도하고 승리하였다.[3] 바둑의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1988년 9월3일 제1회 후지쓰배 결승에서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九단이 린하이펑(林海峰) 九단을 상대로 화점의 어깨짚음을 구사하고 쾌승하여 절찬을 받은 적이 있다.[4] 덤이 없는 일본 승단전에서 비긴 적이 있고 1974년 12월 MBC TV 송년특집 초대국에서 삼패로 비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