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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3:24:55

한국증권거래소

대한증권거래소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1101022291850005010-002.jpg
1977년 전산화 되기 전 명동 구관 내부 모습

파일:한국증권거래소 로고.svg

1. 개요2. 역사
2.1. 명동 시대 (1956~1979)2.2. 여의도 시대 (1979~2005)
3. 소훈4. 역대 임원5. 출처6. 관련 문헌

1. 개요

1956년부터 2005년까지 존속했던 증권거래기관. 한국거래소의 전신이기도 하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kse.or.kr'이었다.

2. 역사

2.1. 명동 시대 (1956~1979)

1945년 8.15 해방 후 한국 증권계는 증권구락부를 중심으로 증권거래소 설립을 꿈꿨으나, 당시 사회/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1954년 정부와 대한증권업협회를 중심으로 '증권거래소 설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고, 1955년 '대한증권거래소 설립위원회' 조직 후 준비과정을 거쳐 1956년 2월 11일, 일제 때 만들어진 '조선증권취인소령'에 따라 금융/보험/증권단이 출자한 영단제 조직 '대한증권거래소'가 정식 설립되었고, 본사는 1922년 준공된 3층건물인 명동 구 조선증권취인소(取引所) 건물로 했다.

그해 3월 3일 개장 이래 주식 16개 종목 및 국채 3종목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시 상장회사 주식이 분산 안 돼 건국공채 매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출범 원년 상장기업은 본사를 비롯해 경성전기, 남선전기, 대한조선공사, 대한해운공사, 조흥은행, 동화약품, 한국상업은행, 경성방직, 한국저축은행, 조선운수 등 12개사였다. 당시 상장사 중 존속 중인 기업은 동화약품, 경방이다.

1962년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따라 개발자금 마련을 위해 '증권거래법'이 제정되어 4월 주식회사제로 개편됐으나, 투자자 보호보다 영리가 우선되어 거래량 증가에만 혈안이 되었고, 이에 따라 과열 투기가 유발되어 동년 5월 '증권파동'으로 증권시장에 대한 불신이 늘자 1965년 5월 정부 출자를 받아들여 공영제 개편 후 '한국증권거래소'로 개칭한 뒤 증권시장 공신력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1971년 청산거래제 대신 보통거래제를 도입하였으며 1975년 격탁(딱딱이) 및 손짓을 대신해 포스트매매제로 바꿨다.

1974년 자회사 한국증권대체결제, 1977년 한국증권전산을 각각 세웠다. 1979년 9월 여의도 신관으로 이전하였으며, 이후 명동 구관은 1980년부터 제일종합금융(당시 제일투자금융) 본사로 썼으나, 1998년 제일종금 퇴출 후 상가로 사용되다 2005년 근대문화재 예고 와중에 철거되었으며 이듬해 명동 아르누보센텀이 들어섰다.

2.2. 여의도 시대 (1979~2005)

한국증권거래소는 1979년 7월 명동을 떠나 전광판까지 갖춘 여의도 신관으로 이전해 '여의도 증권가' 시대 개막에 공헌했고, 9월 국제증권거래소연맹(FIBV)에 17번째로 가입했다. 1983년 매매주문 전달을 전화기 대신 단말기로 바꿨고, 1986년 3저 호황에 따른 증권시장 호황과 1987년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계획에 발맞춰 1988년 3월 정부소유 주식을 25개 증권사에 팔아 민영화한 뒤 회원제로 전환하고 전산매매를 개시했다. 1992년 외국인의 주식투자를 허용 후 부산사무소롤 시초로 1995년 광주/대구사무소를 각각 열었고, 1997년 주가지수 옵션시장을 열고 1998년 외국인 투자한도까지 철폐했다. 2000년 신주인수권 증서시장을 연 뒤 2002년 개별주식옵션시장, 환매조건부채권매매 시장, 상장지수펀드를 잇따라 열었다. 2005년 한국선물거래소, 코스닥증권시장, 코스닥위원회와 합쳐져 '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되면서 유가증권시장본부로 개편됐다. 여의도 사옥은 2007년 이후 서울지사가 됐다.

3. 소훈

4. 역대 임원

5. 출처

6. 관련 문헌


[1] 1984년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제정 후 1988년 민영화 전까지 존재함.[2] 1984~1988년 민영화 전까지 '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