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한범우(韓範愚) |
이명 | 한우길(韓雨吉) |
호 | 해청(海靑) |
본관 | 청주 한씨 |
생몰 | 1902년 4월 16일[1] ~ 1920년 6월 22일 |
출생지 |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노림리[2] |
사망지 | 강원도 원주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범우는 1902년 4월 16일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노림리의 평민 가정에서 한공동(韓孔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노림보통학교(魯林普通學校) 졸업생으로 3월 22일 제1회 졸업식에 참가했다. 이때 교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배부받은 그는 3월 27일 오후 4시 30분경 부론면사무소 앞길에서 한돈우(韓敦愚)·김성수(金性秀) 등 수명과 함께 모여 만세시위운동을 의논하고 있을 때 마침 원주군수 오유영(吳唯泳)이 퇴청하여 귀가하는 것을 붙잡아 미리 준비한 '대한독립만세기'를 휘날리며 "철원(鐵原) 군수도 만세를 불렀는데 왜 원주군수는 부르지 않느냐"고 힐책하며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했다. 이후 그곳에 모여든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이후 1919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언도받고# 항소했지만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으며# 상고하였지만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4일 가출옥했으나, 출옥 3개월만인 6월 22일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한범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4월 4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한기악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