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수쿠스(중국가비알) Hanyusuchus, Chinese Gharial | |||
학명 | Hanyusuchus sinensis Iijima et al., 2022 | ||
분류 | |||
계 | 동물계(Animalia) | ||
문 | 척삭동물문(Chordata) | ||
계통군 | 석형류(Sauropsida) | ||
목 | 악어목(Crocodilia) | ||
과 | 가비알과(Gavialidae) | ||
아과 | 가비알아과(Gavialinae) | ||
속 | †한유수쿠스속(Hanyusuchus) | ||
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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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언어별 명칭】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CCCCC,#212121>한국어 | 한유수쿠스, 중국 가비알 | |
영어 | Hanyusuchus, Chinese Gharial | ||
중국어 | 韓愈鱷屬, 中華韓愈鰐 | ||
일본어 | ハンユスクス |
복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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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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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박물관에 전시된 화석 |
2. 특징
크기 |
생김새 |
화석은 1963년에서 1980년 사이에 처음 발견되었지만 공식으로 학명이 붙은 건 2022년이다. 이 악어와 외관상 가장 가까운 현생 동물은 말레이가비알이며 몸길이가 5.43~6.19m 정도로 현생 가비알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몸 색깔은 현생 악어들과 별 차이없는 갈색을 띈 노란색 또는 짙은 녹색 혹은 흰색 계열의 색이었다고 하며 새끼는 노란색이나 흰색이었다 한다.
3. 역사 및 멸종
총 6개의 표본이 남아있으며, 모식 표본은 기원전 제4천년기 경의 화석으로 추정된다. 당나라, 송나라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홍콩, 마카오, 하이난섬 등 중국의 제일 남부 지역에서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적이자 경쟁 상대로는 호랑이와 비단뱀, 바다악어 외에는 없었을 듯하다. 가비알처럼 물고기만 먹고 살았던 게 아니라 말레이가비알처럼 성격이 사납고 거친 동시에 공격적이여서 육지 동물도 자주 사냥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가축을 자주 사냥했기에 사람과 한유수쿠스의 대립은 상당히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1]1461년의 보고서에는 항저우 동쪽에 "악어 동굴"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1630년 하이난 섬에서 악어에 의한 가축과 인명피해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보고서가 없다.
결국 중국 남부 지방에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서 해수 구제나 가죽 수요 등의 이유로 폭탄, 독극물[2] 같은 여러 방법으로 남획되고, 서식지도 계속 파괴되면서 먹이가 부족해지고 살 곳도 잃어가다가 결국 중국 명나라 시대[3]인 15세기 무렵에 기록이 거의 없는 걸로 보아 멸종한 것으로 여겨진다.[4]
4. 기타
양쯔강악어, 바다악어와 함께 용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대한 크기와 인간을 공격했다는 포악한 성격을 고려하면 이쪽이 매우 유력한데, 일례로 기원전 3천년기에 살았던 'SM E1623'라는 표본은 청동기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즉 한유수쿠스와 인간은 최소 기원전 30세기 무렵부터 이미 충돌이 있었다는 것인데, 당시 청동 무기(혹은 석기)로 이런 거대한 악어를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용을 상대하는 것과 다를바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접촉사례가 그대로 전설로 남아 용의 전설로 승화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위, 진, 남북조 시대에는 이미 양쯔강악어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해진 모양이다. 당나라 무렵에는 후레이(忽雷)나 고레이(骨雷)라는 호칭으로 악어와 구분해서 불리웠다고 한다. 이때는 이미 전설상의 용과 완전히 인식이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광동, 대만, 일본의 화석 연구에 따르면 한유수쿠스가 토요타마피메이아에 포함될 수 있어 속명이 변경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화석에서 일부 연조직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한유수쿠스의 고대 DNA를 추출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악어의 진화를 보다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멸종되지 않았다면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렸을지도 모르는데, 멸종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복원을 시도한다는 소식이 없다.[5]
한유수쿠스와 비슷하게 광둥성 등 중국남부에 서식했다가 남획으로 멸종했다고 알려진 석형류 생물로는 짐새가 있다. 다만 화석같이 명백한 물적 증거가 발견되는 한유수쿠스와 달리 기록에만 등장할 뿐 화석과 같은 어떠한 물적 증거조차 발견되지 않고 발자국같은 간접증거가 발견된 크립티드인 예티보다도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는 상태이다.[6][7]
[1] 당시 중국 남부에서는 '호랑이가 여름에 물속의 악어로 변하고 악어가 가을에 산림의 호랑이로 변한다'는 신화가 퍼지기도 했고, 장이라는 10살 정도의 어린 아이가 한유수쿠스에게 잡아먹히자 해당 개체가 사냥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발굴된 화석 대부분이 날붙이에 절단된 흔적들이 발견된다.[2] 악어가 발견되자 물에 산화칼슘을 왕창 뿌려버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3] 당시 한국은 조선 시대였다.[4] 바다악어의 중국 남부 개체 또한 19세기에 멸종했다.[5] 선사 시대에 멸종된 털코뿔소나 기원전에 멸종된 털매머드도 복원 시도가 있다. 명나라 때 유물은 문화대혁명으로 거의 다 사라져 버렸지만, 동시대 다른 지역의 유물은 많이 남아있다. 복원을 시도할 만큼의 DNA를 추출할 흔적이 문화대혁명으로 사라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6] 명나라 시기 기린(상상의 동물)과 기린을 착각한 기록이나 화석을 용골이라 부르며 약재로 쓴 기록에서도 보이듯이 단순히 기록에 짐새나 짐독이 나온다고 해서 짐새가 실존했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으며 짐새가 논밭 위를 날면, 그 아래 작물은 모두 말라 죽었다거나 또 그 깃털에 술잔이 스치기만 해도 이를 마시는 사람은 곧 독사(毒死)한다는등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묘사도 문제이다.[7] 종종 독이 있는 실존 조류인 두건피토휘의 존재가 알려지며 짐새 역시 실존했던 동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나 고립된 섬에 분포하는 두건피토휘와는 달리 짐새는 대륙에 분포하였고 기록상 날 수 있었음에도 서식지가 중국남부에 국한되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의심되는것이 짐새처럼 독사를 주식으로하는 뱀잡이수리와 비교해봐도 비행이 가능한 조류들은 서식지가 넓은데다가 짐새를 보이는 족족 없앴다지만 인류가 멸종시킨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구체적으로 얼마나 잡았는지에 대한 기록자체가 전혀 없으며 인간과 서식지를 공유하고 인간과의 접촉 및 충돌이 분명히 기록된 한유수쿠스와 달리 짐새는 뱀과 전갈이 출몰하고 고목이 하늘을 찌르는 깊은 산속 원시림 속에서만 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게 인간이 침입하기 힘든 원시림에 사는 생물이었다면 청나라 말기인 1870년에나 존재가 알려진 황금들창코원숭이처럼 인간의 눈을 피해 조용히 살 수 있기에 멸종하기가 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