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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21 18:38:31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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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조피 루이제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베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rowcolor=#fff>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3세 빌헬름 2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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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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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0CB><colcolor=#000000>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왕비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공녀
Prinzessin Friderike Luise von Hessen-Darmstadt
파일: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공녀.jpg
이름 프리데리케 루이제
(Friderike Luise)
출생 1751년 10월 16일
신성 로마 제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플렌츨라우
사망 1805년 2월 5일(향년 53세)
신성 로마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몽비주 성
배우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1769년 결혼 / 1797년 사망)
자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크리스티네, 루트비히, 빌헬미네, 아우구스테, 하인리히, 빌헬름
아버지 헤센다름슈다트 방백 루트비히 9세
어머니 팔츠츠바이뷔르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형제 카롤리네, 루트비히 1세, 아말리, 빌헬미네, 루이제,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1. 개요2. 생애
2.1. 초반2.2. 결혼2.3. 왕비2.4. 왕대비
3. 가족관계
3.1. 자녀


1. 개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두 번째 아내이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어머니.

2. 생애

2.1. 초반

1751년 10월 16일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9세와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의 차녀로, 플렌츨라우에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헤센홈부르크 방백비 카롤리네, 헤센의 초대 대공 루트비히 1세, 바덴의 대공세자비 아말리[1], 러시아의 황태자비 빌헬미네 루이제[2],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비 루이제,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이 있었다.

2.2. 결혼

프로이센의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공녀과 이혼한 직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필리피네 공녀 또는 스웨덴의 소피아 알베르티나 공주의 혼담이 진행했으나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왕세자의 아내로 결정되었다. 1769년 7월 19일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서 결혼했다.

프로이센 왕세자비가 된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미모와 지적 능력이 부족했지만, 강인하고 이성적이며 대화가 통했다고 알려져있고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와의 사이에서 장남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비롯한 5남 2녀를 낳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에게는 수많은 정부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특히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정부들 중 빌헬미네 폰 리히테나우가 프리데리케 루이제와 결혼한 같은 해부터 사망할 때까지 내연관계를 유지했었다.

프로이센 궁정 내 프리데리케 루이제의 위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의 불륜 행각과 그의 첫 번째 부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공녀가 맞바람으로 이혼당한 전적 때문에 다소 애매했다. 당시 프로이센 국왕이자 시백부인 프리드리히 2세[3]도 두번째 조카며느리인 프리데리케 루이제에게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왕세자비였을 때 베풀었던 호의와 특권을 주지 않으며 냉대했다.[4] 프리데리케 루이제 왕세자비는 주로 포츠담에 거주했는데 그곳에서 단조롭고 지루한 은둔 생활을 하며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시백부에게 무시당하고, 베를린 방문조차 거의 허락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보고에 따르면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자녀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들의 교육 부족에 일조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정작 그녀의 남편이자 자녀들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도 자신의 적자들보다 사생아를 더 신경썼다. 뿐만 아니라 재정 문제에 끊임없이 휘말려 며칠 동안 자녀들을 함께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하며, 따라서 프리데리케 루이제의 자녀들은 시녀들과 호프마이스터 베니쉬의 양육을 받았다.

2.3. 왕비

1786년 시백부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고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로 프로이센 왕위에 오르면서 프리데리케 루이제도 프로이센의 왕비가 되었고 포츠담을 떠나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에서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왕비의 공무를 수행하고 왕실, 귀족 및 외국 사절들을 위한 응접실 환영회를 정기적으로 주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로열 리셉션에서 의도치 않게 외교적 사건을 일으켰는데 일국의 왕비는 신하들하고만 알현을 한다는 관습을 알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러시아 장관들에게만 도박 테이블에 함께 가자고 요청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이 도박 테이블 초청에 제외된 프랑스 장관은 불쾌감을 느꼈다.

당시 프로이센 궁정은 무질서하고 관리가 부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예시로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왕비로서 연간 51,000 크라운의 연금을 받았는데 이는 엄청난 거금이었지만 "프리데리케 루이제의 취향이 관대하고 습관이 다소 풍부해서" 지출을 충당하기에 부족했다. 미라보는 한때 아파트의 불을 공급하기 위해 목재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던 반면,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의 정부에게 매년 3만 크라운를 지급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총신과 정부들은 종종 국정에 참여했지만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정치적 영향력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미라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배우자로서 프리데리케 루이제에 대해 "모든 왕비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적은 사람은 프로이센의 왕비다"고 언급했으나, 크락솔은 왕비가 "애정을 사로잡거나 남편의 항상성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왕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부터 모든 존경의 증거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1787년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자신의 시녀인 줄리 폰 포스의 중혼에 동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제부인 작센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왕과 왕비의 협상에서 대사로 임명되자 프레데리케 루이제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5]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마침내 남편의 중혼에 동의했으며 그 대신 빚을 갚는 조건으로 10만 크라운을 지급받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중혼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독일 극장은 연극 "이녜스 데 카스트로[6]"를 여러 날 연속적으로 공연했는데, 프리데리케 루이제 왕비는 왕자 시절의 페드루 1세가 아내의 시녀 이녜스에게 열정적인 사랑을 맹세하는 장면이 나오는 4막 공연 중에 항상 퇴장하면서 남편의 중혼에 대한 시위가 아니냐는 주목을 받았다. 179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또 한번 프리데리케 루이제의 시녀인 조피 폰 쇤호프를 정부로 삼아 중혼을 했다.징글징글하다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이번에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조피 폰 쇤호프는 한술 더떠 프로이센 궁정에서의 우선권을 요구하여 프리데리케 루이제를 모욕했다. 이후 프리데리케 루이제가 프로이센으로 시집올 때부터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정부로 지낸 빌헬미네 폰 리히테나우가 여백작 작위를 수여받았을 때[7], 프레데리카 루이제는 궁정에서 리히텐나우를 공식적으로 맞이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오버호프마이스터 비트겐슈타인과 알현실 시녀의 조언에 따라 화려한 초상화를 선물했다.

1796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병에 걸렸지만 왕비인 프리데리케 루이제가 아닌 빌헬미네 폰 리히테나우의 간호를 받았다. 1797년 봄에 일시적으로 회복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나솔리니의 오페라 '라 모르테 디 클레오파트라[8]'를 왕비의 정원에서 주최했다. 프리데리케 루이제 왕비도 이 행사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세간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왕비, 왕세자, 왕세자비, 그리고 다른 왕자와 공주들이 그들을 모욕적인 존재로 만든 굴욕적인 제약에 분노하여 떨었다는 사실. 국왕은 그의 창백한 얼굴에 치명적인 질병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친절한 왕비는 입술을 비틀며 병적인 미소를 지었다. 왕세자는 격렬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다정하게 사랑하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치 그들을 아버지의 정부의 아파트에서 볼 수 없다는 듯 소 옥타비아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불륜을 한탄하는 오페라의 일부 장면에서 모든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왕비에게 향했고 왕비는 손수건에 얼굴을 숨겼다." 국왕의 회복을 축하하는 공개적인 행사에서 왕비는 리히토가 왕의 곁에서 있는 동안 아프다고 주장하며 참석을 피했다.
댐프마틴이 오페라에 대해 쓴 회고록.

이윽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 그는 포츠담에 있는 빌헬미네 폰 리히테나우를 맞이했고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베를린에 머물며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179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죽었을 때 그는 아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를 현관으로 안내해 달라고 요청했고 리히테나우에게 작별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프리데리케 루이제 왕비는 감동을 받아 리히테나우를 포옹하고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봐준 것에 대해 감사해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왕세자는 아버지의 정부인 리히테나우를 비판했다.[9]

2.4. 왕대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사후 장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즉위하면서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프로이센의 왕대비가 되었다. 어머니와 각별한 사이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어머니를 무시하고, 정부들에게만 빠져지낸 아버지를 원망해왔기 때문에 프리데리케 루이제에게 효도를 다했다. 프리데리케 루이제 왕대비도 장남 부부와 손주들의 관계가 원만했기 때문에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왕대비 시절에는 괴팍한 인물로 알려졌는데 유령을 본다는 이유로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 있는 등,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했다고 한다.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왕비로 즉위한 1788년부터 줄곧 여름을 보내온 바트 프라이엔발데에서 왕대비가 된 이후에도 머물렀고 그곳으로 종종 자녀들과 손자들이 놀러왔다고 한다. 이 덕분에 프라이엔발데 주변 도시의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전했고 특히 프리데리케 루이제가 머무는 동안 여러 건물이 지어졌다. 1799년 프로이센 건축가인 다비트 길리가 지은 여름 궁전도 프리데리케 루이제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805년 베를린에서 53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인해 사망했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
1770년 8월 3일 1840년 6월 7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슬하 5남 4녀[10]
1녀 크리스티네 공주
(Princess Christine)
1772년 1773년
2남 루트비히 카를 왕자
(Prince Louis Charles)
1773년 11월 5일 1796년 12월 28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
슬하 2남 1녀
2녀 네덜란드의 왕비 빌헬미나
(Wilhelmine, Queen of the Netherlands)
1774년 11월 18일 1837년 10월 12일 빌럼 1세
슬하 2남 2녀[11]
3녀 헤센의 선제후비 아우구스테
(Augusta, Electress of Hesse)
1780년 5월 1일 1841년 2월 19일 헤센의 선제후 빌헬름 2세
슬하 3남 3녀
3남 하인리히 왕자
(Prince Henry)
1781년 12월 30일 1846년 7월 12일
4남 빌헬름 왕자
(Prince Wilhelm)
1783년 7월 3일 1851년 9월 28일 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슬하 2남 2녀[12]

[1] 바이에른의 왕비 카롤리네, 러시아의 황후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스웨덴의 왕비 프레드리카, 바덴 대공 카를, 헤센의 대공비 빌헬미네의 어머니.[2] 파벨 1세의 황태자 시절 첫 부인. 러시아어 이름인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로 잘 알려져 있다.[3]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백부. 프리드리히 2세는 자녀가 한명도 없었기 때문에 조카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후계자로 삼았다.[4] 이는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프리드리히 2세의 또 다른 조카(여동생 필리피네 샤를로테의 딸)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 2세는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를 왕세자비 시절부터 마음에 들어했고 여러 남자와 맞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해서도 다그치긴 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여성편력도 이에 만만치않아서 조카딸을 불쌍하게 여겨 이혼만은 절대 안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내연남의 아이를 임신하고 야반도주까지 계획하자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강권으로 이혼을 허락했다.[5]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뻔뻔한 중혼 요청에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오, 네! 동의하겠지만, 그 대가는 엄청날 거예요!" 라고 웃으면서 외쳤다고 한다.[6]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의 정부로 페드루 1세와의 내연 관계와 그녀의 가족들이 부리는 전횡에 분노한 시아버지 아폰수 4세에게 살해당한 이야기로 유명하다.[7] 국왕의 내연녀가 귀족 작위를 하사받았다는 건 공식 정부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다.[8]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클레오파르타 여왕의 불륜을 다룬 오페라.[9]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리히테나우에게 "내 아들이 너에게 뭐라고 말했느냐?"고 묻고 리히테나우가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감사의 말이 없느냐? 그러면 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왕실은 리히테나우가 왕실의 결정이 아니라 리히테나우의 결정이라고 생각했다고 비난했다고 한다.[10]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 왕자 등.[11] 빌럼 2세 등.[12] 헤센의 카를 공자비 엘리자베트, 바이에른의 왕비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