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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8-21 19:31:12

헨리 퍼시(제5대 노섬벌랜드 백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5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Henry Percy, 5th Earl of Northumberland
성명 헨리 퍼시
Henry Percy
출생 1477년 1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엘른윅
사망 1527년 5월 19일 (향년 50세)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이스트 라이딩 레슬 성
아버지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어머니 모드 허버트
형제 엘레노어, 윌리엄, 앨런, 조셀린, 앤
배우자 캐서린 스펜서
자녀 헨리, 토머스, 잉겔람, 마거릿, 모드
직위 제5대 노섬벌랜드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헨리 7세헨리 8세 치세 초기에 활동했다.

2. 생애

1477년 1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엘른윅에서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의 딸 모드 허버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엘레노어[1], 윌리엄[2], 앨런[3], 조셀린[4], 앤[5]이 있었다.

어린 시절 헨리 7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1489년 4월 28일 아버지가 영지 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가 에이튼 추신의 로버트 챔버라는 자작농이 있느는 반군에게 햄블턴의 사우스 칼링턴에서 전사한 뒤 가문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 해 11월 21일 아서 튜더 왕자가 웨일스 공이 되었을 때, 그는 11살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1492년 애티플 조약에 참석했고, 헨리 왕자(훗날 헨리 8세)가 기사 작위를 받은 1494년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95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1497년 왈실 군대에 복무하여 블랙히스 전투에서 콘월 반란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498년 5월 14일 노섬벌랜드 백작령의 영주로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그의 연봉은 약 2,300파운드였는데, 수많은 수행원들에게 연간 1,500 파운드를 지출했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궁정으로의 잦은 출장은 그에게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겼고, 이 때문에 일생 내내 빚에 시달렸다.

1500년, 헨리 7세와 펠리페 1세의 회동애 참석했으며, 성의 경비대장, 산림 감독관, 사법 위원회 위원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503년 6월 30일, 스코틀랜드 국경 동부 변경지대의 관리인이 되었고, 국왕의 딸 마거릿 튜더를 스코틀랜드로 호위해 약혼자인 제임스 4세에게 데려가는 임무를 숳애했다. 그러나 자신의 후견을 받는 부유한 상속녀 엘리자베스 헤이스팅스를 왕실 허가 없이 결혼시켰고, 그로 인해 10,000파운드라는 엄청난 벌금을 물었다. 그는 1509년 헨리 7세가 죽기 전에 이 금액의 절반을 갚았고, 새 왕 헨리 8세가 등극한 뒤 1510년 3월 21일에 나머지 빚이 취소되었다.

1513년, 헨리 퍼시는 대규모 수행원을 거느린 지휘관으로서 헨리 8세의 대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테루엔을 포위하고 긴게이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516년, 그는 제3대 버킹엄 공작이자 누이 엘레노어의 남편인 에드워드 스태퍼드와 지나치게 친분 관계를 맺고 후견과 관련된 왕실 특권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퍼시는 별궁에서 조사를 받고 곧 풀려났다.

1517년 6월, 퍼시는 스코틀랜드 왕비로 군림하던 마거릿 튜더를 요크에서 만났고, 스코틀랜드로 안내해달라는 왕비의 요청에 재정난에 시달리던 터라 꺼려 했지만, 왕실의 요청애 따라 그녀를 안내했다. 1519년 잉글랜드 대법관 토머스 울지는 왕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충성심이 의심스럽다고 보고했지만, 왕의 신임을 잃지 않았다. 1520년 6월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의 회담인 금빛 천의 들판에 참여했다. 1522년 5월 헨리 8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회담에 참여했고, 그 결과로 맺어진 조약에 서명했다.

1523년 왕의 지시에 따라 스코틀랜드를 습격해 국경지대에서 약탈을 벌였다. 그런데 제8대 데이커 남작 토머스 파인스가 그가 원정 도중 본인 깃발에 왕실 휘장을 달았다고 거짓 고발했다. 이후 그는 조사를 받았지만, 무고임이 밝혀져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1524년 다시 국경 주군군을 관리하는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1525년 헨리 8세의 사생아이자 노팅엄 백작인 헨리 피츠로이의 서임식에 참여했다. 1527년 5월 19일 요크셔 이스트 라이팅의 레슬 성에서 사망했고, 그가 이전에 교회를 지었던 베벌리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1474 ~ 1530,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의 부인.[2] ? ~ 1540, 에그네스 콘스터블과 초혼, 마거릿 소탈과 재혼.[3] ? ~ 1560,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 학장.[4] ? ~ 1532, 마거릿 프로스트와 결혼. 1605년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가톨릭 음모 집단의 일원 토머스 퍼시의 조부.[5] ? ~ 1552, 제11대 아룬덱 밸작 윌리엄 피츠앨런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