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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02:29:54

호네바미 토시로

骨喰藤四郎

1. 일본도 와키자시 중 하나
1.1. 내력1.2. 관련 일화1.3. 등장 매체
2. 도검난무의 등장 캐릭터

1. 일본도 와키자시 중 하나

파일:Honebami_Toushirou.jpg
호네바미 토시로(骨喰藤四郎)[1]
도공 불명[2] 도파 불명[3]
제작 시기 가마쿠라 시대 종류 나기나타타치와키자시
길이 59.1cm→58.8 ㎝ 현존 여부 교토국립박물관[4]
명문 무명 문화재 등록 중요문화재 공예품 제 1369호

나기나타 재도 검(薙刀直シ刀)으로는 가장 대표적인 도검.

칼의 형태는 본래 우노쿠비즈쿠리(鵜の首造り)[5]였다.
앞면에는 검에 몸을 말고있는 쿠리카라의 용이, 뒷면에는 부동명왕과 베이[6]가 새겨져 있다.
나기나타의 특징인 나기나타히(薙刀樋, 나기나타 홈)는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제작된 압형(押形)에는 그 모습이 확인되고 있으나, 현재는 없다. 메이레키 대화재후 3대 에치젠 야스츠구(越前康継)에 의해 재도(焼き直)될 당시 없어졌을 확률이 높다.
하몬(刃文)은 본래 코미다레(小乱れ)[7]로, 보우시(鋩子, 칼 끝의 모양)가 날카로우며 제법 휘어있었으나, 재도후 스구하(直刃)로 바뀌면서 보우시 역시 그 모양이 변하였다.

이름인 호네바미(骨喰み)는 헤이안 말기경부터 예리한 검에게 종종 붙여지던 호칭으로, 骨食, 骨啄, 骨喰丸, 骨噛み라고도 쓰인다. 이 검만의 고유명칭이 아니므로 동명의 단도, 태도, 나기나타 등이 다수 존재한다.[8] 유래는 베는 시늉을 하는것만으로도 뼈를 베어버릴 정도로 베는 맛이 좋은 검. 혹은 검으로 베면 뼈까지 그 아픔이 전달되는 검이라는 데에서 왔다.
고문서에는 호네바미(ほねはみ, 호네하미) 혹은 호네카미(ほねかみ)라고만 기재되어있으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혼아미가에서 요시미츠 작이라 확정한 이후로 호네바미 토시로(ほねはみ藤四郎), 호네바미 요시미츠(骨喰吉光)라 불리게 된다.

본래 칼은 명문을 보고 명문이 잘못되었는지 맞는지를 확인하며, 지하다나 하몬을 통해 작풍을 파악하고 맞는지 확인하고, 전체 모습을 보고 시대를 정하나 호네바미는 현재 이 중 어떤것도 불가능[9]한 상태이다.

유일하게 재도되지 않은 부분이 부동명왕과 쿠리카라용 부분인데, 부동명왕과 비사문천의 범어를 함께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 13세기이므로, 대략 13세기경의 도검이라 추정은 가능하다.
또한 호네바미의 도신에 새겨진 쿠리카라용은 비젠덴의 비젠 카게미츠(備前景光)의 작품인 코류 카게미츠(小竜景光)에 새겨진 쿠리카라용의 모습과 거의 일치하며, 부동명왕의 경우 비젠 카네미츠(備前兼光)의 작품과 흡사하다.[10] 관련 트윗
상기의 원인으로, 혼아미가에서 어떠한 경로로 호네바미를 요시미츠작으로 단정하였는지 확실치 않은 현재, 요시미츠작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학계에는 존재한다.

1.1. 내력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서국에 내려갔을 당시 오토모 우지토키가 충성의 표시로 헌상한 이래 미카즈키 무네치카, 오오텐타 미츠요, 오니마루 쿠니츠나 등과 함께 아시카가 가의 중대 보검으로 전래되었다. 한때 아시카가 가의 가신에게 주어진 적이 있다고 하나, 아시카가 요시테루 집권기에 아시카가 가로 돌아왔다고 한다.[11] 에이로쿠의 변 당시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부하가 쥐고 휘둘렀다는 설이 있으나, 거론된 부하는 당시에는 이미 고인인지라 다른 보검들과 함께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휘둘렀거나, 혹은 보관되어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이로쿠의 변 이후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소유물이 되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이 검을 대단히 아꼈으나,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오토모 소린이 호네바미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이를 거부하다 결국 3천냥과 각종 보물을 받고 오토모 소린에게 양도하였다. 이후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네바미의 헌상을 요구하였기에 오토모 요시무네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반 강제로 헌상하게 되는데, 요시무네는 당시 호네바미가 없는 오토모는 망할 것이라며 눈물을 머금고 헌상했다고 한다.[12]
히데요시의 손에 넘어갈때 혼아미가에서 무네와 나카고를 갈아내고, 오시가타를 찍은 기록이 있다. 이때에 아와타구치 요시미츠의 작품임을 확정하였다. 도요토미 가에서는 이 검을 1번 도검상자의 1번 도검으로 기록한 바 있다.
히데요시 사후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가게 된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과 기록이 있는데, 진흙 속에서 발견된 호네바미를 농민이 주워다 혼아미가에 전달하고[13], 혼아미가에서는 이를 이에야스에게 보였다는 설, 오사카 겨울 전투 이후 키무라 시게나리에게 하사되어 전투당시 차고있던 와키자시를 도쿠가와군이 강탈하여 바쳤다는 설 등 여러가지가 있다.[14] 당시 이에야스는 무겁고 길어 자신이 차기에 어렵다 하며 이를 히데타다에게 보이라 하였고, 히데타다는 매우 기뻐하며 이를 받았다[15]고 전해진다. 이후 메이레키 대화재때 불탔으며, 이를 복원한 후에 키슈 도쿠가와가 및 도쿠가와 쇼군가를 오가며 소장하다 1926년에 도요쿠니 신사의 재건당시 봉납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봉납 당초에는 재건 주최가 국가였기에 국가 소유의 문화재라는 의미에서 국보가 되었다.[16] 1950년 문화재보호법 시행 이후 중요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1.2. 관련 일화

1.3. 등장 매체[18]

2. 도검난무의 등장 캐릭터

호네바미 토시로(도검난무)


[1] 2016년 11월 3일 교토박물관에서 열린 도검난무 공식 강연회에서는 이 검을 호네바미 카게미츠(骨喰景光)라 표기[2] 아와타구치 요시미츠(粟田口吉光)추정[3] 아와타구치(粟田口) 추정[4] 소유는 도요쿠니 신사이나 보관을 교토 국립박물관에서 대행해 주고 있다[5] 시노기(鎬)가 모노우치(物打)근처에서 무네(棟)에 인접하여, 킷사키(切っ先, 칼 끝)부분에서 무네를 남기고 시노기를 깎아내는 형태. 단도에서만 보이며, 나기나타히(薙刀樋)가 있는 경우도 있다.[6] 비사문천의 범어[7] 정확하게 베꼈다는 우츠시의 하몬은 쵸우지(丁字)가 섞인 코미다레이다[8] 아와타구치 쿠니요시(粟田口国吉)의 단도 호네바미, 미이케텐다 미츠요(三池典太光世)의 나기나타 호네바미, 오니오우마루(鬼王丸)의 태도 호네바미마루 등[9] 명문이 없는 무명도, 불에 탔기에 본래의 지하다와 하몬이 사라짐, 나기나타를 재도하여 본래 모습을 잃음[10] 쇼와14년 후지시로 요시오(藤代義雄)가 「일본 도공 사전 고도편(日本刀工辞書古刀篇)」에서 발표.[11] 이 시점에서 이미 나기나타에서 태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12] 오오토모 흥폐기(大友興廢記) 기록[13] 이 때 당시, 농민이 내다팔려고 하였으나 두려워하여 아무도 사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14] 다만, 다른 기록에는 키무라 시게나리가 하사품을 전부 거절하였다고 되어있기도 하므로 시게나리 설은 확신하기가 어렵다.[15] 혼아미가에서 바친 기록의 경우, 히데타다가 이를 사들였다고 한다.[16] 이 당시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를 모두 '국보'라고 불렀다.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되자 이들은 중요문화재로 재지정되었으며, 이들 중 그 가치가 유달리 뛰어난 것들은 특별히 국보로 승격되었다. 오늘날 문화재보호법 시행 이전의 국보는 '구 국보', 시행 이후의 국보는 '신 국보'로 부른다.[17] 간혹, 도검난무의 유행 이후에 보이는 설이라고 주장하는 유저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게임에서 이 검이 아이템으로 등장할 경우, 설명란에 가끔 나온다.[18] 검의 이력이 소개되는 경우 혹은 이력이 확실한 전 주인이 소지한 경우 혹은 호네바미 토시로(요시미츠 포함)라 표기되는 건만 기재했음.[19] 잘 보면 롱기누스만 롱고미안트, 게이볼그, 궁그닐, 아라드바르 등 전설의 창 이름이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