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본관 | 남양 홍씨[1] |
출생 | 1892년 2월 15일 |
충청도 직산현 삼동면 용정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용정리)# | |
사망 | 1956년 3월 8일 |
충청남도 천안군 |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2. 생애
홍찬섭은 1889년 2월 15일 충청도 직산현 삼동면 용정리(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용정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당시에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칠곡리에 거주했다. 1919년 4월 1일, 그는 안성군 양성면 칠곡리에서 이유석(李裕奭)·이근수(李根洙)·이희용(李熙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그는 이날 오후 8시경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등불과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시위행진하여 가던 중, 양성면에서 시위행진하여 오던 시위대열 1천여 명과 만나 서로 합세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 순사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을 파기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시위대가 해산되고 주동자들도 체포되었지만, 그는 피신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가 지방 선전대로서 활동하였다. 후에 국내선전의 임무를 맡아 귀국하여 활약하다가 마침내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8년 8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홍찬섭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당홍계 30세 섭(燮)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