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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22:12:20

황보탁

1. 개요2. 생애


皇甫倬
(? ~ ?)

1. 개요

고려의 문신.

2. 생애

과거에 열 번을 응시해 의종 8년(1154) 5월 최윤의김존중이 주관한 진사시에서 마침내 장원 급제한다. 『파한집』에 황보탁의 임관 초 일화가 남아있다. 의종이 정원에서 작약을 감상하며 시를 짓는데, 아무도 화답하는 시를 짓지 못하는 와중에 황보탁이 나서서 답시를 읊는다.
誰導花無主, 龍顔日賜親 꽃에 주인이 없다고 누가 이끌었는가, 용안이 날마다 친히 내리는데
也應迎早夏, 獨自殿餘春 당연히 이른 여름을 맞이하고 스스로 남은 봄을 끝내네
午睡風吹覺, 晨粧雨洗新 낮잠 자다 바람 불어 깨고 새벽에 빗물로 씻어 새로 단장했구나
宮娥莫相妬, 雖似竟非眞 궁녀들이여 서로 시샘하지 말라, 비록 닮았으나 끝내 진짜(사람)는 아닐지니
의종은 황보탁의 시를 칭찬하며 상을 하사한다. 훗날 황보탁이 선발돼 관직에 임명될 때 의종이 그 이름을 알아보며, "이 사람은 일찍이 작약에 응해 시를 지어 올린 자가 아닌가?"[1]라고 말한다. 황보탁은 의종으로부터 직접 낙점돼 동관(東館, 내시부)에서 근신으로서 왕을 모시게 된다.

황보탁은 의종 사후 명종 시기까지 10여년간 왕을 대신해 조서를 지으며 대각(臺閣)에 출입했다. 기거주에 임명되고 명종 8년(1178) 찰방사로 춘주도(春州道)에 나가 민정을 살피고 지방관의 실적을 조사해 보고했다. 명종 16년(1186)에는 동지공거와 지공거를 한 번씩 맡아서 4월에 임민비와 함께 송순광 등 38명을, 7월에 대사성으로서 좌산기상시 이지명과 함께 양공준 등 37명을 선발했다.


[1] 莫是嘗進應制芍藥者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