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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5 05:03:45

황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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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공조판서
장무공(莊武公)
황형
黃衡
파일:황형.jpg
본관 창원 황씨(昌原 黃氏)[1]
출생 1459년 3월 1일 (세조 5)
사망 1520년 12월 12일(중종 15)
국적 조선
시호 장무(莊武)
부모 부친 황예헌(黃禮軒)
모친 의령남씨(宜寧 南氏)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묘소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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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포왜란의 명장으로 당시 방어사로 왜적을 대파한 무신이다.

2. 생애

1480년(성종11년) 무과에 급제, 1486년(성종17년) 무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고 1510년(중종5년) 삼포왜란때 경상좌도 방어사가 되어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전임되었다. 이후 도총관·지훈련원사를 역임했다. 1512년(중종7년) 함경도지방의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순변사로서 진압하고, 평안도·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를 두 번 지내고 시호 장무(莊武)를 받고 1520년(중종15년)에 생을 마감했다.

3. 가족관계

고조부는 창원황씨 공희공파 파조인 고려시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지낸 회산군(檜山君) 황석기(黃石奇)이고, 증조부는 황창(黃昌), 조부는 대흥현감을 지낸 황선경(黃善慶)이며, 아버지는 선공감정을 지낸 황예헌(黃禮軒)이다.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사헌부 감찰을 지낸 남인보(南仁甫)의 딸이다.

4. 묘소

5. 여담

무인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읽었으며, 문(文)과 무(武)가 애당초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2] 강화도에 시골집이 있었는데, 예순두 살 때 소나무 수 천 그루를 심었다. 이미 늙었는데 무엇 하러 그렇게 소나무를 많이 심으냐고 사람들이 묻자 나중에 두고 보면 알게 될것이라고만 대답했고 얼마 뒤 죽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로부터 70년쯤 뒤인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연전연패하며 무너진 끝에 보름도 되지 않아 한양이 왜군에 점령당하고 임금이 의주로 도망을 친 상황에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김천일 장군과 최원 장군이 강화도에 본영을 차렸는데, 황형이 70년쯤 전에 심어두었던 소나무가 배를 비롯해서 전쟁에 필요한 기구를 만드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왜구들의 노략질을 보고 언젠가 큰 난리가 날 것을 미리 내다본 듯

6. 관련 문서


[1] 공희공파(恭僖公派) 5세손[2] 기록을 보면 아버지인 황예헌이 했던 말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