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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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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1. 개요

회곽묘(灰槨墓)는 무덤 양식의 일종으로, 묘광 안에 관과 곽을 보호하기 위한 석회층을 만들어 관과 곽을 안치하는 방식이다.

2. 상세

석회층을 만드는 과정은 회격(灰隔)이라 하며, 주자가례에 나온 바로는 석회 3, 가는 모래 1, 황토 1의 비율로 섞어 만든다.
대한민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초기까지는 돌방무덤이 대세였지만[1] 조선 시대에 들어서 세조가 승하할때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당시 중국 남부에서 성행하던 회곽묘가 왕가를 중심으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이후 사대부와 민간에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회곽묘는 정통 성리학적 무덤 양식이며, 돌방무덤(석실묘)보다 무덤의 크기가 훨씬 작아 부장품이 적게 들어 도굴을 덜 당했고[2], 무덤을 만드는 비용이나 인력도 적게 들었다.

회곽묘를 조성할 때에는 시체가 들어가는 구덩이, 즉 묘광(墓壙)을 파고, 그 안에 숯과 삼물(석회모래황토를 섞은 것)을 깔아 회격을 한 후에 만들어진 석회층 안에 나무관과 나무곽을 안치한다. 석회층을 만드는 이유는 시신은 결국 썩는 것이 맞으나 시신이 썩기 전에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갈 때까지 벌레나 나무 뿌리와 같은 외부 요소로부터 무덤이 침투당하는 것을 방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아예 나무곽을 생략하고 회격으로 만들어지는 석회벽을 곽으로 삼기도 했는데 이때 석회가 주위의 수분을 흡수하면서 굳어질 때 열을 방출, 내부를 섭씨 200도 가량으로 고온 살균해버린 뒤 밀봉하게 되니 자연적으로 미라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 당연하지만 미라가 되면 부패가 진행될 리도 없고, 수분만 그 상태로 증발하여 말 그대로 몸이 바싹 말라 있어[3] 모발 한 올까지 보존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부터 회격묘는 내관 위에 외곽을 만들고, 그 위에 석회를 부어 회곽을 만드는 형태로 변모하여 한층 더 공기가 통하기 어렵게 되어 시신이 미라화되기 쉬운 환경이 되었다. 특히, 목관의 경우 못을 쓰지않고 '나비장'[4]기법으로 관을 만들었고 긴 시간이 지나도 관이 뒤틀리지 않아 공기가 통하지 않았다.

본래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적으로도, 유교적 관점에서도, 고인의 시신은 온전히 부패해 흙이 되어야 좋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미라를 만든 것은 결코 아니었음에도 오히려 회곽묘가 시신을 썩지 않게 했다는 점이 조금은 아이러니.

다만 회곽묘도 무덤 만들기가 번거롭고 비용 역시 꽤 들다 보니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잘 행해지지 않았다.

회곽묘 양식으로 만들어진 조선왕릉은 두터운 석회층 때문에 도굴이 어려워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서처럼 역사상 몇 없는 도굴 시도도 거의 실패했고, 현재까지 도굴에 성공한 사례가 임진왜란 당시 성종과 중종의 무덤이 도굴당한 선정릉 도굴사건 외에는 없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때는 남연군묘가 회곽묘 방식으로 매장되어 화를 면한 바가 있다. 이 때 석회를 조금도 아니고 평균 사용량의 몇 배나 썼기 때문에 관을 둘러싼 땅 전체가 매우 단단한 강도가 돼버려서 오페르트 일당이 처음 도굴을 시도했을 때는 강철을 들이부었다고 착각했을 정도였으며, 드릴로도 뚫리지 않아 도저히 도굴할 수 없다고 판단해 도주했다.

회곽묘는 시신이 잘 보존되어 있고, 도굴도 거의 되지 않아 나중에 조선왕릉을 발굴해 선왕의 시신을 분석하면 조선왕실의 어진을 복원하는데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


[1] 다만 돌방무덤 역시 회곽묘처럼 시신이 부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2] 도굴이 성행하는 묘는 전부 묘의 크기가 크고 부장품이 많던 돌방무덤이다. 때문에 돌방무덤에서 부장품은커녕 시신조차 발견된 사례는 거의 없고 벽화만 남아있다.[3] 이는 공기가 조금이라도 통해서 수분이 빠져나간 경우로, 석회를 굉장히 많이 써서 완전 밀봉되면 아예 피부가 마르지도 않는다. 대구 달성군 구지면에서 발견된 한 미라는 그 밀봉상태가 완벽하여 피부의 습기까지도 보존되어 있었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처럼 탄력이 있는 형태는 아니지만, 만지면 물컹물컹하다고 표현될 정도.[4] 나비모양의 홈을 파 목재를 끼우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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