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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23:59:35

후나고시 기친


파일:Fugakoshi_gichin.jpg
출생 1868년 11월 10일 류큐, 오키나와 슈리
사망 1957년 4월 26일 (향년 88세) 일본 도쿄도
국적
[[류큐 왕국|]][[틀:국기|]][[틀:국기|]] →
[[일본|]][[틀:국기|]][[틀:국기|]]
본명 후나고시 요시토시[1]
직업 무도가
무술 쇼레이류 공수도, 쇼린류 공수도, 송도관 공수도(창시)
단수 5단, 10단(사후)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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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키나와 류큐 왕국 출신 일본무술인. 오늘날 전통 가라테 최대 유파인 송도관 가라테(공수도)의 창시자이다.

2. 상세

젊은 시절 스승으로 아사코 안코, 이토스 안코, 소콘 마츠무라, 세이쇼 아라카키에게 사사하였다. 특히 오키나와 테의 중흥조이자 오늘날엔 후나고시 기친과 함께 근대 가라테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이토스 안코(1831~1915)의 제자 중 한 명으로서, 후나고시는 이토스의 술기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독특한 무술 세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 탓에 사형인 토야마 간켄에게 동문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건 후나코시 기친 본인의 실전력이 떨어진 탓도 있는데, 실제 후나고시는 일본에서 후나고시가 가라테로 사업적 성공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일종의 도장 깨기를 하러 온 오키나와 왕족 출신 모토부 쵸키[2]한테 여러 번 깨지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단아적인 일면이 오히려 가라테 입장에선 긍정적으로 작용했는데, 결과적으로 오늘날 가라테 유파 중 가장 인지도가 큰 것이 쇼토칸인 것이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실전력이 떨어져도 잘 가르치면 성공할 수 있다. 쇼토칸 가라테가 사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으면, 오늘날 공수도는 커다란 세를 형성하지 못하고 오키나와의 토착 무술로써 명맥만 이어가는 수준이었을지도 모른다.

후나고시 기친이 설립한 송도관 공수도는 이후 몇몇 무술들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이곳에서 수련한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창시한 무술인 태권도극진공수도 등이 그렇다.[3] 다른 공수도 유파들도 송도관의 체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자로는 아들인 후나고시 기고[4], 오오츠카 히로노리[5], 오바타 이사오, 나카야마 마사토시, 기마 마코토, 데가미 신게루, 오카노 토모사부로, 오카자키 텐루유키, 아사이 테츠히코, 코니시 야스히로, 니시야마 히데타카, 오시마 츠토무, 카세 타이지, 하라다 미츠스케, 카나자와 히로카즈, 이원국[6], 노병직[7], 에노에다 케이노스케 등이 있었다.
[1] 船越 義珍에서 義珍을 훈독하면 '요시토시(よしとし)'가 되고, 음독하면 '기친(ぎちん)'이 된다.[2] 서양인 복서와의 대결에서도 승리한 적이 있다.[3] 다만 극진공수도의 창시자 최영의는 강유류 공수도, 유도 등 다른 무술들도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태권도도 핵심 재료가 된건 맞지만, 택견이나 중국 무술 등 기타 무술들도 일부 혼합되었다.[4] 일본식 이름은 후나코시 요시타카, 1945년 39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일본 입성 후 실질적으로 쇼토칸 스타일을 창시한 인물이었다. 명성에 비해 실전력은 별로였다는 아버지에 비해 센스가 뛰어났는지 가라테 천재라 불리기도 했다.[5] 화도류 창시자.[6] 태권도 창시 원로 중 한 명.[7] 태권도 창시 원로 중 한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