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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7 14:01:58

후쿠나가 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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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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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福永洋一とエリモジョージ.jpg
<colbgcolor=#268300><colcolor=white> 이름 후쿠나가 요이치([ruby(福永洋一, ruby=ふくなが よういち)])
Fukunaga Yoichi
국적 일본파일:일본 국기.svg
출생 1948년 12월 18일([age(1948-12-18)]세), 고치현 고치시
가족 배우자 키타무라 유미코([ruby(北村, ruby=きたむら)][ruby(祐美子, ruby=ゆみこ)])
아들 후쿠나가 유이치([ruby(福永祐一, ruby=ふくなが ゆういち)]) ([age(1976-12-09)]세)
소속 일본중앙경마회
타케다 분고(릿토)
(1968.3.2 - 1981)
데뷔 1968년 3월 2일
은퇴 1981년
[마지막기승] 1979년 3월 4일
승수 중상 49승
GI · JpnI 급 9승
통산 5086전 983승
[2]
1. 개요2. 경력
2.1. 낙마 사고와 이후
3. 천재성4. 기승 스타일
4.1. 신체적 측면4.2. 정신적 측면
5. 성격6. 여담7. 중상 승리 말(GI/JpnI 급)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 중앙 경마 기수. 일본 역대를 통틀어 독보적인 천재 기수로 꼽힌다. 마일러로 3200미터 천황상을 제패하거나 불가사의한 마군돌파를 선보이는 등 안되는 레이스를 되게 만드는 스타일의 기승이 눈부셨다. 불의의 낙마사고로 전신불수가 되어 당시의 현창기수 기준인 1000승에 아깝게 다다르지 못했음에도 이견이 세워지는 일 없이 곧바로 현창기수로 기려질 정도로 그의 천재성에 대한 일본 경마계의 신뢰는 두터웠다.

2. 경력

오카베 유키오, 시바타 마사토, 이토 마사노리 등의 기수들과 마사공원[3] 15기 동기로, 이들 마사공원 15기는 소위 '꽃의 15기'라고 불릴 만큼 탄탄한 실적을 쌓는다.

지주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났으나 토지 제도의 변혁으로 삽시간에 빈민이 되어 5세 무렵 어머니가 실종되고, 4년 뒤 아버지마저 뇌출혈로 사망해 누나 시댁에서 머무는 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매형이 고치 경마장 소속 기수였고, 장남은 교토에 타케 헤이조 구사에 입문하고, 차남, 삼남은 각각 오오이, 후나바시에서 기수가 되어 4남인 요이치도 경마계와 연이 닿게 되었으며, 1961년 중학교 2학년 때 장남이 있던 교토로 이사해 중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기수과정 모집에 도전해 합격해 기수의 길을 밟게 되었다.

1968년 3월 2일 첫 기승했으나 3착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2주 뒤인 17일 같은 말을 다시 타서 첫 승리를 올렸다. 이후 1968년은 총 14승을 올려 중앙경마 간사이 방송기자클럽 상을 수상했으나, 그해 7월 20일엔 사행으로 후속 기수가 낙마하는 사고가 발생해 4일간 기승 정지, 이듬해인 1969년 5월 4일엔 부담중량을 덜 달고 기승한 것이 밝혀져 3개월간 기승 정지를 받는 등의 제재가 있었다.

기승정지기간 중 사사키 타케미의 기승을 보고 배우고, 차남인 후미오 기수에게 기승법을 교육받는 등 여전히 기승법을 연구했고, 정지기간이 끝난 후엔 호성적을 거둬 총 45승 11위 기수가 되었다.

이 즈음 요이치의 천재성이 알려져 요이치에게 들어오는 기승 의뢰가 늘어나게 되었고, 구사측에서도 요이치의 천재성을 보고 좋은 말을 우선적으로 연결시켜줘, 1970년엔 첫 중상 승리를 거두는 등 총 86승을 거둬 데뷔 3년만에 리딩 자키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후 1971년엔 니혼 필로 무티에에 기승해 고베신문배, 교토신문배에 이어 킷카상에서 우승을 거둬 첫 G1레이스, 첫 8대경주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특히 킷카상에선 그동안 선입~추입으로 달리던 니혼 필로 무티에를 계획적으로 강선행~도주로 달리게 해서 거둔 승리였기에, 킷카상 기승을 기점으로 '천재기수'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이후로 1972년엔 가을 천황상, 76년엔 봄 천황상, 77년엔 사츠키상, 킷카상, 엘리자베스 여왕배, 78년엔 오카상 등을 우승했고, 동시에 77년엔 연간 126승으로 연간 최다승 기록을 갱신, 이듬해인 78년에 131승으로 다시 갱신하며 1970년부터 1978년까지 9년연속 리딩 자키를 유지했다.

2.1. 낙마 사고와 이후

1979년 2월 말까지 24승을 거두는 등 호성적을 거두던 중,3월 4일 마이니치배에 메리 조이에 기승했다. 그날 이전 레이스에서도 우승을 거두는 등 좋은 기세를 이어가고 있었으나, 마지막 직선에서 앞서 가던 하쿠요 카츠히데가 그 앞말과 부딪히며 기수였던 사이토 히로미가 낙마했고, 낙마한 사이토에 메리 조이가 부딪히며 고꾸라지며, 기승했던 요이치는 땅바닥에 던져지듯 날라가며 낙마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4]

요이치는 바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사고 당시에는 관계자들 모두 그렇게 중상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낙마하며 이미 뇌에 큰 충격을 받아 반년 뒤인 9월에 처음으로 자력보행을 할 수 있었고 12월에는 인사말을 건낼 수 있을 정도였으며, 몇 십년이 지난 현재도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어려운 모습을 보인다.

결국 2년 뒤인 1981년 기수에서 은퇴하게 되었고, 1984년엔 낙마사고 이후 처음으로 승마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2009년 고치 경마장에서 열린 토크쇼에 아들인 후쿠나가 유이치가 "고치는 아버지의 고향인 만큼 아버지의 이름이 붙은 레이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이후, 2010년부터 고치 경마장에 요이치의 이름을 딴 '후쿠나가 요이치 기념'이 신설되어 본인인 요이치가 직접 상을 수여해주거나, 후쿠나가 유이치가 기수로 참가하는 등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3. 천재성

요이치가 떨어지고 경마는 변했다. 단 한 사람 없어진 정도로 경마가 변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이도 있었지만, 역시 요이치가 떨어져서 경마는 변해버렸다. 요이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던 경주에서 그 중심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만약 지금도 요이치가 건강했다면 타케나 젊은 기수들과 함께 어떤 경마를 보여줬을까. 상상해보면 여간 유감스러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요이치가 없어져 경마가 재미없어진 면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요이치와 같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짐작조차 안 가는 자키는 이제 없다.
스기모토 키요시, 전 간사이티비 경마 아나운서
타케 유타카 이전 일본 경마 최고의 천재로 손꼽혔고 타케의 커리어가 얼추 완성되어가는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 평가를 뒤집지 않는 전문가들이 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기승기술의 소유자였다. 특히 안되는 경마를 되게하는 기술에서 독보적이었는데, 도주부터 추입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완주에 의의를 둬야할 하위권 주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입상에 밀어넣는 능력이 있었다. 관계자들의 평은 하나같이 어떤 발상으로 그 전법을 취했는지, 왜 후쿠나가 요이치만이 이 말을 승리로 이끄는지 통 이해할 수가 없다는 후문들 뿐이다.
요이치를 태우면 능력적으로 모자람이 있는 말에서도 달려버린다. 게다가 레이스의 내용이 다른 기수를 태울때와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그때까지는 추입을 해오던 말을 당겨 도주를 시켜버리거나, 반대로 버티는 것에 장점이 있던 말을 직선일기로 끌어내본다거나. …… 지시와는 다른 경마를 하고 거기에 결과까지 가져오니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이토 유지 전 조교사
그 분 기승의 훌륭함은 말이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에 딱 맞는 부드러운 기승 스타일이라던가, 포지셔닝의 능숙함이라던가,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의미밖엔 없고, 그보다 위대한 후쿠나가 씨만의 무언가가 있었다. …… 나는 후쿠나가 씨의 천재성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타케 군은 확실히 능숙하지만, 후쿠나가 씨와 비교하면 어쩌면 귀엽다는 느낌도 있겠다.
마토바 히토시 기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유일한 기수였다. 유타카는 이러저러한 점을 들어 그 재능을 설명할 수 있는 유형. 반면 후쿠나가 씨는 무언가 단 하나 설명할 수 없는 레벨의 것을 가지고 있었다. …… 그의 기승에는 하늘을 날고 있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같은 사람이 밟아나간 길을 후배로 뒤쫓을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지금 타케 유타카와 동시대에 뛰면 타케를 당해낼 수 없다는 사람도 여럿 있지만 그건 말이 안되는 소리다. 기술과 지식량에서 타케가 그를 능가할지 몰라도, 한판 승부에서 후쿠나가 씨는 내가 본 사람 중 제일이다. 아직까지 절정기 후쿠나가 요이치를 능가한 기수는 없다.
타바라 세이키 기수
이토 유지는 타케 유타카의 강함을 『페이스를 감지하는 능력은 세계에서도 탑급. 정밀한 스피드 미터를 탑재한 기수이기 때문에 포지셔닝에 실수가 없는 수십년에 한명짜리 명수』라 설명하면서도 일본 최고의 기수는 여전히 후쿠나가라고 단언했다. 마토바는 자신이 천재성을 느낀 기수로 프랭키 데토리, 올리비에 펠리에 등을 열거하며 자국내에서는 후쿠나가 요이치만을 그와 동렬에 두고 평가했다.

4. 기승 스타일

4.1. 신체적 측면

동기 오카베 유키오에 따르면 요이치는 특별히 운동신경에 두각을 보이지 않았으며 야구를 하면 공을 때리는 일은 없고 외야에서 공을 머리로 받아내곤 한다며 동기들의 개그맨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런 녀석이 말만 타면 사람이 변한다며 천성적인 소질이 엿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스승 타케다 분고는 처음 그를 말에 기승시켜봤을 때부터 자세가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고 첫인상을 증언하고 있다.

신체적으로 특히 등 근육이 탄탄해 어지간한 일로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으며 취미인 골프에서는 비거리 머신이란 별칭으로 불렸다는 증언이 있다. 동기 이토 마사노리는 스태미나와 지속력을 높이 사며 거의 무산소 운동을 하는 와중에서 폼도 무너지지 않고 말의 리듬을 백퍼센트 끌어낸다고 증언했다.

4.2. 정신적 측면

걸어다니는 경마 기록지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사계보나 경마신문 등을 항상 주변에 쌓아놓고 지내며 관동 모든 소속마의 각질을 머리에 담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기억력과 노력을 바탕으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고 새로운 파트너와 합을 맞출 때도 버릇 등을 즉각 포착하고 최고의 페이스를 탐지해 말을 끌어가는 기술이 부각됐다.

후쿠나가 요이치와 라이벌리를 형성했던 타케 쿠니히코는 후쿠나가의 특장점으로 순간의 판단력을 짚었다. 또 동기 이토 마사노리는 이 특징에 대한 예로 하드 버지를 이끌어 승리한 사츠키상을 거론했다. 『안을 찌를지 밖으로 나갈지 좌우조차 잃어버린 그 마군 속 몇초 남짓의 순간에』 후쿠나가만이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 한번도 마군에 갇히는 일 없이 레이스를 풀어나간 데 대해서는 『앞이 열려서 가는 것이 아니다. 요이치의 경우는 (열리는 곳을 예상해서)갔는데 간 곳이 열린다』라고 증언했다.

5. 성격

승리에 대한 탁월한 집념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로부터 탈출하려는 의지와 주변인들로부터의 지지에 대한 책임감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스기모토 키요시는 그의 경마관을 두고 "이른바 우등생 타입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깨끗하게 타고 지는 것보다 억지로 타고 이기는 것을 우선하는 격렬함이 내재되어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어린 시절 친했던 이웃 해경과 자주 도시락을 걸고 내기를 하면서 이기고 왔을때도 아버지와 연구를 거듭해 상대에게 뒤집히는 일을 허락지 않을 만큼 승부욕이 탁월한 편이었다.

사석에서는 이른바 요이치 스마일이라고 불리는 호인으로 견습시절 일과를 깜박하거나 조교 기승이 서투른 등 덜렁이 기질이 있음에도 누구라도 화를 풀게 되는 서글서글한 미소에 대해 스승과 관계자들의 증언이 남아있다.

6. 여담

7. 중상 승리 말(GI/JpnI 급)



[마지막기승] [2] 사진은 에리모 조지이며 1976년 하코다테 기념 우승 당시이다.[3] 馬事公苑. 1934년 제국경마협회로 설립되었고, 1948년 농림성 축산국 경마부 도쿄 경마사무소로 개칭됐으며, 1982년에 현재의 기수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기수 양성도 담당했다.[4] 현재는 자기 소유 말들에 특이한 이름만 붙여대는 걸로 유명한 오다기리 유이치가 막 마주가 되었을 때 들인 최초기 말 중 하나이자 첫 중상 승리마였다. 진명마만 생산하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멀쩡하게 이름 짓던 시기라 이 말도 선배의 결혼을 기념하여 marriage에서 메리를, 결혼 후의 인생을 즐기라는 뜻에서 Joy를 붙여 메리 조이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5] 타바라 세이키는 1978년 데뷔했으니 기수학교 시절부터 후쿠나가 요이치의 최전성기를 보며 성장한 셈이다.[6] 등자를 짧게 잡을 수록 기수의 무게중심이 높아져서 낙마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심지어 등자에 있는 홈도 길어서 따로 묶어서 더 짧게 잡기도 했다는 듯.[7] 당시 명칭은 '한신 3세 스테이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