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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10 15:59:08

히밀코(제1차 포에니 전쟁)


히밀코
Himilco | Chimilkât
<colbgcolor=#eee8aa><colcolor=#000> 출생 미상
미상
사망 미상
미상
국적 카르타고
지위 카르타고 릴리바이움 수비대 지휘관
참전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
-릴리바이움 공방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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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맞서 싸운 고대 카르타고 장군. 릴리바이움 공방전에서 로마군의 오랜 공세를 막아낸 인물이다.

2. 행적

기원전 250년, 로마 정부는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세력의 최후의 거점인 릴리바이움을 공략하기로 결의했다. 당해 집정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는 4개 로마 군단병과 4개 이탈리아 동맹시 보조 군단, 200척의 전선과 해군 분견대를 맡겨 릴리바이움 공략에 투입했다. 이에 맞서는 히밀코 휘하 릴리바이움 수비대는 7,000명의 보병과 700명의 기병이었으며, 대부분 그리스인과 켈트인으로 구성된 용병대였다.

로마군은 릴리바이움에 도착한 뒤 2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세운 후 투석기, 공성추 등 수많은 공성 병기를 제작하고 릴리바이움 요새의 남동쪽 측면을 공격하여 해자를 메우고 외벽의 탑 6개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에 땅굴을 파서 성 내부로 들어가려 했지만 카르타고군이 낌새를 눈치채고 역시 땅굴을 파서 로마군의 공사를 훼방놓는 바람에 실패했다. 또한 로마군의 약탈과 학살을 피해 릴리바이움으로 도주한 민간인들은 매일 밤 성벽과 탑의 손상을 복구하는 데 힘을 보탰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평원에서 맞붙었을 때 입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막대한 사상자를 입었으며, 질병, 썩은 고기가 포함된 열악한 식량으로 인해 고통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군의 연이은 공세에 수비대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용병들 사이에서 "이럴 바에 로마군에게 투항하자"라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일부 갈리아 용병들은 아예 실천에 옮기려 했지만, 알렉손(Ἀλέξων)이라는 이름의 그리스 용병이 이 사실을 히밀코에게 보고했고, 히밀코가 주모자들만 처형하고 나머지 병사들에게 급료를 두둑이 주며 차후에 승리하면 더 많은 보너스를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군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후 로마군의 공성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50척의 카르타고 전함이 아이가테스 제도에 집결했다. 그들은 해상을 봉쇄한 로마 전함들을 예의주시하다가 강한 서풍이 불자 적이 반응하기 전에 릴리바이움 항구로 빠르게 이동한 뒤 수비대에게 대량의 보급품과 지원군을 전달했다. 지원군 규모는 4,000에셔 10,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히밀코는 야밤을 틈타 요새를 포위한 로마군을 습격해 공성 무기들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필사적인 전투를 치른 끝에, 카르타고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요새로 철수했다.

기원전 249년, 새 집정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해상 봉쇄를 완수하기 위해 시칠리아 방면 카르타고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드레파나 항구를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는 드레파나 해전에서 아드헤르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해군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 후 아드헤르발은 70척의 퀸퀘레메를 이끌고 온 카르탈로에게 30척을 추가해준 뒤 릴리바이움을 포위한 로마군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카르탈로는 즉시 릴리바이움 해상으로 출격해 여러 로마 선박을 파괴했다. 이때 그도 성밖으로 출격해 로마 해군 편대를 상당수 격파했다.

이후에도 로마군의 공세로부터 릴리바이움을 지켜냈지만, 기원전 241년 전쟁이 끝났을 때 릴리바이움을 로마군에게 넘긴 사령관은 그가 아니라 기스코였다. 그가 언제 기스코로 교체되었으며 어떤 경위로 그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