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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6년,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해군이 아프리카를 탈출하려다 히포 레기우스 앞바다에서 푸블리우스 시티우스가 이끄는 마우레타니아 해군에게 습격당하면서 벌어진 해전.2. 상세
푸블리우스 시티우스는 기원전 63년 카틸리나 일당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몰리자 탈출한 뒤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보쿠스 2세의 용병대장이 되었다. 기원전 4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소 카토의 재촉에 따라 30척의 배에 자유인과 노예로 구성된 혼성군 2,0000명을 이끌고 마우레타니아 해안 근처 마을인 아스쿠룸을 공격했다가 패퇴한 사건이 벌어지자(아스쿠룸 전투), 보쿠스 2세는 시티우스에게 누미디아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시티우스는 누미디아로 쳐들어가 수도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사로잡은 시민들을 모두 죽였다. 당시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도우러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고 있던 유바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30마리의 코끼리만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보낸 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당시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전력상 절대적으로 열세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바 1세가 돌아간 틈을 타 추가 병력을 규합해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후 유바 1세는 부하에게 본국 수비를 맡기고, 재차 3개 군단과 누미디아 기병대, 3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합세했다. 스키피오는 누미디아군과 함께 카이사르를 상대로 탑수스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투 결과는 카이사르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적의 추격을 피해 해안가로 달아나 배를 타고 히스파니아 속주로 피신하려 했다. 당시 그와 함께 간 인사들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다마시포스, 플라테리우스 루스티아누스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배는 역풍으로 인해 더 가지 못하고 히포 레기우스에 정박했다. 그때 시티우스가 이끄는 더 큰 함대가 이들을 덮쳤고,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다마시포스, 루스티아누스 등이 모두 전사했다.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적 함대가 항구를 봉쇄하여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되자 자결을 결심하고, 검으로 자기 몸을 찔렀다. 병사들이 이 광경을 보고 동요하자, 그는 태연한 얼굴로 한 마디 한 뒤 숨을 거뒀다.
"Imperator se bene habet(임페라토르는 괜찮다.)"
이후 시티우스는 누미디아 전역을 공략했지만 곧 카이사르에게 돌려줬고, 카이사르는 누미디아 서부를 마우레타니아 왕국에게 넘기고 동부는 아프리카 속주로 재편시켰다. 카이사르는 시티우스의 공적을 치하하며, 그에게 누미디아의 옛 수도였던 키르타를 영지로 줬다. 시티우스는 5,0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곳에 정착했다. 훗날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탈리아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식민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정착지는 나중에 키르타 시티아노룸(Cirta Sittianorum)으로 일컬어졌고, 이 지역에 주둔한 부대는 시티아니(Sitiani)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