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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22:49:49

힘의 원칙

1. 개요2. 프롤로그3. 1막4. 2막5. 3막6. 4막7. 5막8. 에필로그

1. 개요

녹서스 스토리 개편과 함께 공개된 소설. 작가는 Anthony Reynolds. 원본은 이곳으로 가면 볼 수 있다.

2. 프롤로그

내 이름은 알리사 로쉬카 글로리아나 발-로칸이다. 내 조상들은 대대로 거의 2천년 가까이 델베르홀드를 통치한 왕족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장군이나 나라, 또는 제국이 되고 싶어하는 국가들이 강철가시 산맥이 품은 자원을 탐내 우리를 무너뜨리려 했지만, 우리가 만든 견고한 요새를 돌파하지는 못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우리의 성벽에 부딪쳤다가도 우리의 칼날에 죽음을 맞을까 두려워 물러갔다.

그렇게 모두들 실패했지만... 녹서스는 성공했다.

그 이후부터 내 가문은 더 이상 왕족이 아니었다.

3. 1막

알리사는 고개를 꼿꼿이 든 채 ‘승리의 계단’을 올라갔다. 열두 단마다 정복을 착용한 경비대가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녹서스의 수도에 온 것은 난생 처음이라도, 그녀는 압도당하지 않으려 했다. 비천한 시골뜨기처럼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델베르홀드 태생이고, 몸에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계단 옆에 늘어선 경비대는 짙은 빛깔 강철 갑옷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 갑옷을 주조하는 데 사용된 광물은 알리사의 고향 산악 지대 깊숙한 땅밑에서 캐낸 것이었다. 녹서스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갑옷은 예외 없이 그러했다. 그녀의 고향이 녹서스에 정복당한 지 다섯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 계속 그러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붉은 깃발들이 저녁의 건조한 바람을 받아 펄럭였다. 그 뜨뜻한 미풍과 함께 석탄이 타는 냄새, 대장간 냄새가 풍겨왔다. 녹서스에서는 대장간의 노에 시뻘건 쇳물이 담기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불멸의 요새가 그들 앞에 어렴풋이 떠올라 있었다. 음산하고,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자기들이 부유하고 퇴폐적이라는 걸 아주 과시를 하는구나. 우린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고 있는데 말야.” 오람이 말했다. 알리사는 자신의 옆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는 오빠 오람을 곁눈으로 보았다.

오람 아크한 발-로칸은 드넓은 어깨, 강인한 팔뚝, 빼어난 검술을 갖추었지만, 동시에 오만하고 판단력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알리사는 오빠를 업신여기는 마음을 감추고 냉담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오람은 알리사보다 단 몇 분 먼저 태어났을 뿐이지만, 알리사와는 달리 장차 델베르홀드를 다스리는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알리사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쌍둥이라는 사실은 겉모습에서 잘 드러났다. 알리사와 오람은 둘 다 키가 컸고 탄탄한 체격이었으며 가문의 특징인 차가운 눈매를 물려받았다. 고귀한 혈통임을 보여주는 긍지 높은 몸가짐도 비슷했다. 또한 두 사람 다 검은 머리를 길게 길러 솜씨 좋게 여러 갈래로 땋았으며, 얼굴에는 각이 진 문신을 새겼고, 갑옷 위에 황토빛이 도는 회색 망토를 둘렀다.

두 사람은 마침내 계단 꼭대기에 도달했다.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까마귀 한 마리가 두 사람의 머리 바로 위를 날아 지나갔다.

알리사는 움찔할 뻔했으나 평정을 유지했다. “저게 불길한 징조일까, 오빠?”

그러자 오람의 양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린 너무 오랫동안 녹서스의 금고를 채워주고 병사들 갑옷을 조달했어.” 나직하긴 했지만, 경비대가 듣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대체 왜 그래야 하지?”

그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지. 알리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녹서스의 궁전 정문은 거대한 금속 문이었고,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전사 두 명이 차려 자세로 서서 쌍둥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툼한 건틀릿을 낀 손으로는 묵직한 도끼날이 달린 미늘창을 쥐고 있었다. 알리사는 흉갑에 새겨진 세 개의 문양과 짙은 붉은색의 망토를 보아 이들이 예사 경비대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군단병이야.” 오람이 속삭이듯 말했다. 평소의 거만함과 허세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남의 목숨을 뺏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녹서스에서도 정예병으로 구성된 트리파르 군단은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적에게는 물론이고 친구에게조차도. 트리파르 군단이 전장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그들과 맞서 싸우느니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편을 택하는 도시나 나라가 수두룩하다는 평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한테 예우를 차리는 거잖아.” 알리사가 말했다. “뭐해, 오빠. 그 대단하신 트리파릭스인지 3인 평의회인지를 직접 만나봐야지.”

4. 2막

녹서스 궁전 알현실에 들어서는 사람이 맨 처음 보게 되는 것은 이전 황제들이 앉았던 옥좌였다. 흑요석을 조각해 만든 거대하고 육중한 구조물로, 늘어뜨린 깃발들, 각진 기둥들, 양초가 타오르고 있는 촛대가 빽빽이 늘어서 있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알현실 내부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옥좌는 텅 비어 있었다. 녹서스의 바로 전 대장군이자 황제였던 자가 죽은 후로는.

아니, 죽은 게 아니지. 알리사는 마음 속으로 정정했다. 처형당했다고 해야지.

앞으로 녹서스에는 황제가 없을 거야. 저 옥좌를 차지할 폭군도.

델베르홀드를 떠나기 전, 알리사는 녹서스에 새로이 구축된 통치 체제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그걸 트리파릭스라고 하지요.”알리사 아버지의 수석 조언자가 말해주었다. “세 명이서 통치하는 겁니다. 힘의 핵심 원칙 세 가지, 즉 예지력, 무력, 책략을 각각 구현하는 세 명이요. 이론상으로는 그 중 한 명이 무능하거나, 광기에 사로잡히거나, 타락하는 바람에 녹서스를 파멸로 이끌려 한다면, 다른 두 명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거지요.”

아주 흥미로운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검증은 되지 않았잖아. 알리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현실은 어마어마하게 큰 동굴처럼 휑뎅그렁한 느낌이었다. 알현자가 천 명은 들어와도 너끈할 크기였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옥좌 발치에 설치된 연단 위 대리석 탁자 앞에 앉은 세 명을 빼고는.

엄숙한 표정의 트리파르 군단병 두 명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알리사와 오람을 세 명이 앉아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 때문에 그들의 발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세 명은 나란히 앉아 무언가를 한창 토론 중이었으나 델베르홀드 쌍둥이 사절단이 다가오자 말을 멈추었고,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을 맞았다.

그 중 두 명은 알리사도 소문이나 세간의 평으로 아는 인물이었지만, 세 번째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세 명 중 한가운데에 앉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예리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제리코 스웨인이었다. 예지력으로 명성이 드높은, 녹서스의 새로운 대장군. 녹서스 귀족들 중에는 아직도 스웨인을 정권 찬탈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보람 다크윌을 녹서스의 옥좌에서 끌어내린 자가 바로 스웨인이었으니까. 하지만 물론, 스웨인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웨인의 시선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눈길이 먼저 오람에게 향했다가, 알리사에게 꽂혔다. 알리사는 그의 왼쪽 팔소매, 짙은 색 외투 안쪽으로 감춰넣은 팔 부분을 유심히 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실패로 돌아간 아이오니아 원정에서 칼을 쓰는 어떤 마녀에게 그쪽 팔을 잃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스웨인의 오른편에는 ‘녹서스의 실력자,’ 정예 트리파르 군단의 지휘자, 지금은 녹서스 군 전체를 이끄는 사령관인 전설적인 인물 다리우스가 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무력’의 화신 그 자체였다. 스웨인은 상체를 꼿꼿이 세운 자세였으나, 다리우스는 몸을 뒤로 젖히고 앉아 건틀릿을 낀 한 손으로 의자의 나무 팔걸이를 또닥또닥 두드리고 있었다. 양팔은 거대하다 싶을 정도로 크고 튼튼했으며, 표정은 딱딱했다.

세 번째 사람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으며 성별도 모르고 이름도 없이 “얼굴 없는 자”라고만 불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풍성하고 겹겹이 층을 낸 로브로 감싼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광택 나는 검은색의 무표정한 가면을 썼고, 눈 부분에 뚫린 구멍조차도 짙은 색 망사로 덮여 있어 도무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양손 역시 두꺼운 천 소매 속에 감춰져 있었다. 알리사는 한 순간 그 가면 뒤에서 희미하게나마 여성스러운 느낌이 풍겨나온다고 생각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가면에 빛이 비치는 형태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든 것인지도 몰랐다.

다리우스가 눈에 띌 듯 말 듯 미세하게 턱을 끄덕이자, 쌍둥이를 안내한 군단병 두 명은 건틀릿을 낀 손으로 흉갑을 두들겨 경례를 하고는, 알리사와 오빠를 트리파릭스 앞에 남겨둔 채 대여섯 걸음 물러섰다.

“자, 앉으시게.” 스웨인이 맞은 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서 있겠습니다, 대장군.” 오람이 대꾸했다.

“좋으실 대로.”

스웨인 대장군의 언행에는 포식동물 같은 위험스러움이 배어나왔다. 절름발이에다 노인네가 다 되어가는 나이치고는 꽤 무시무시한데. 알리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람과 알리사 발-로칸. 델베르홀드 총독의 셋째, 넷째 자녀.” 스웨인이 말을 이었다. “강철가시 산맥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긴 여정이었을 테니, 사교상 방문한 것은 아니겠군.”

“제 부친의 인장을 가지고 왔으니, 저의 말이 곧 제 부친의 말입니다.” 오람이 말했다.

“그럼 말해 보게.” 다리우스가 말했다. 어스름늑대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격식 따윈 필요 없어. 여긴 녹서스지, 고상한 궁전이 아니니까.”

스웨인의 교양 있고 세련된 말투와 달리, 다리우스의 말투는 거칠고 천박한 평민의 그것이었다. 알리사는 오빠가 품은 경멸감을 거의 손에 잡힐 듯 느낄 수 있었다.

“델베르홀드는 수십 년 동안 충성을 다했습니다.” 오람은 들으란 듯이 왕족다운 고상한 억양을 강조하며 말을 시작했다. 저런 식으로 우월감을 표출하는 건 현명하지 못할 텐데. “그동안 우리가 캐낸 금이 제국의 정복 작전을 지원했습니다. 우리의 철로 만든 갑옷과 무기가 제국의 부대를 무장시켰습니다. 트리파르 군단도 포함해서요.”

다리우스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철가시에서 나는 광물로는 최고의 방어구를 만들 수 있지. 트리파르 군단을 보호하는 데 그 이상 가는 방어구는 없네. 자부심을 느끼게나.”

“자부심은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군주시여.” 알리사가 말했다.

“난 군주가 아니네. 특히 자네들의 군주는 더더욱 아니야.”

스웨인이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었다. “자자, 다리우스의 말은… 녹서스에서는 그 어떤 남자나 여자도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뜻일세. 모든 사람은 혈통이 아니라 능력과 행동으로 자신의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 그런 말이지.”

“물론 그렇습니다.” 알리사가 수긍했다. 속으로는 실수를 저지른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우리는 산맥 아래 깊디깊은 광산의 암흑 속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오람이 말했다. “그런데도 매일 목격하는 것은 우리 노력의 결실을 담은 마차 행렬이 사라졌다가는 텅 빈 채로 돌아오는 광경입니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사는데도 먹을 것은 부족—”

“아, 그런가?” 스웨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자네 손바닥을 좀 보여주게.”

“네?” 오람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손을 보여달라니까.” 다리우스가 반들거리는 탁자 위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산맥 요새 아래 컴컴한 광산 속에서 매일 매일 돌멩이와 흙먼지와 싸우며 노예처럼 일하는 그 손을 보여 달라 이 말이야.”

오람은 이를 악물며 몸을 움츠리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다리우스는 코웃음을 쳤다. “이 녀석은 태어나서 단 하루도 힘든 일을 해본 적이 없어. 저 여자애도 그렇고. 굳은살이 있다 해도 노예 같은 노동 때문에 생긴 건 아닐 테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가만히 참고 있…” 오람이 입을 열었으나, 알리사가 달래듯 한 손을 오빠의 어깨에 얹었다. 오람은 어깨를 사납게 비틀어 그 손을 뿌리쳤으나, 현명하게도 방금 내뱉은 말은 더 이상 잇지 않았다. “산맥의 광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신중해졌다. “아예 고갈되어 버린다면,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녹서스 군에게도 분명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사정을 봐 주셨으면 합니다.”

“오람 아크한 발-로칸, 어디 말해 보게.” 스웨인이 말했다. “델베르홀드는 녹서스 군에 전사를 몇 명이나 보내고 있는가? 매년, 대략 어느 정도인가?”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다른 쪽으로 제국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광산에서 광물을 캐는 것과, 야만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북쪽 국경을 방어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저희는 그렇게 하여 녹서스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스웨인은 한숨을 쉬었다. “녹서스에 충성하는 모든 지역, 도시, 국가 중에서 오직 델베르홀드만이 녹서스 군에 병사를 한 명도 보내지 않고 있네. 델베르홀드는 녹서스를 위해 피를 흘린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일세. 그 정도면 충분히 사정을 봐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람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저희는 제국에 바치는 광물량을 재협상하자는 부친의 요청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재협상이 안 된다면, 델베르홀드로서는 녹서스 제국 내에서의 위상을 재검토하는 것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알현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다리우스조차도 지금까지 줄기차게 팔걸이를 또닥거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알리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오빠를 응시했다. 오람이 방금 한 말은 알리사가 사전에 귀띔을 받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 말이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생각하자 머릿속이 빙빙 돌며 어지러웠다. ‘얼굴 없는 자’는 아까부터 가면 너머로 알리사에게 줄곧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런가.” 이윽고 스웨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 부친이 자네들을 여기로 보낸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알 것 같군…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겠나?”

오람이 알리사에게 고갯짓을 하며 명령했다. “그걸 보여줘.” 오람의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알리사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지고 온 두루마리 통에서 낡아빠진 양피지를 꺼냈다. 양피지는 복잡하고 모난 우르-녹서스 글자로 온통 덮여 있었고, 델베르홀드의 인장과 피처럼 붉은 녹서스의 문장이 같이 찍혀 있었다. 알리사는 양피지를 탁자에 놓고 평평하게 편 다음 오빠 옆의 자리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강철가시 지역의 관습에 따라 오빠보다 반 발짝 뒤의 자리였지만.

다리우스는 흥미 없다는 태도였지만, 스웨인과 ‘얼굴 없는 자’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양피지를 들여다보았다. 알리사는 다시 한 번 저도 모르게 ‘얼굴 없는 자’를 유심히 바라보며 그 가면 뒤의 모습을 암시하는 단서를 찾으려 했다.

오람이 말했다. “87년 전, 델베르홀드가 녹서스의 통치를 따르기로 했을 때, 저희 조상들은 델베르홀드의 주권을 포기할 것을 녹서스의 옥좌에 대고 서약했습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바로 저 옥좌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어 있지요.”

다리우스가 오람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지금 그 문서에서 보고 계시겠지만, 우리가 누구에게 충성을 맹세했는지 그 서약 조건은 명확합니다. 저 옥좌에 마지막으로 앉았던 분은 약 7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오람은 한 손으로 옥좌를 가리켜 보였다. “그러니 저희 부친의 입장은, 이제 그 양피지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델베르홀드는 더 이상 무언가를 바칠 의무가 없지만, 그래도 선의를 표한다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조정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델베르홀드는 제국의 통치를 벗어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강철가시 지역은 더 이상 직접 보호 아래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알리사는 그대로 돌아서서 달아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뿌리라도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고 3인 평의회의 반응을 기다렸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하는 법. 녹서스와 함께한다면 영원히 기억되리라.” 다리우스가 협박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녹서스에 반기를 든다면 멸망하고 잊혀지리라.”

“지금껏 그 어떤 군대도 델베르홀드를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오람이 말했다. “상기시켜 드리지요. 우리 조상들은 자진해서 녹서스에 성문을 열었다는 사실을요.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아주 위험한 장난을 치고 있군, 꼬맹이.” 다리우스가 알리사와 오람 뒤편에 서 있던 트리파르 군단병들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저 둘만으로도 네 녀석의 그 소중한 델베르홀드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 수고스럽게 나까지 갈 필요도 없지.”

다리우스의 말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두 군단병이 미늘창으로 알현실 바닥을 쿵 하고 찍었다. 그 소리가 넓디넓은 알현실 전체에 천둥소리처럼 메아리쳤다.

오람은 코웃음을 쳤지만, 알리사는 다리우스가 내보인 자신감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다리우스는 말뿐인 허세를 부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얘기는 이쯤 하고.” 스웨인이 한 손을 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말한 조정이 어느 범위까지 포함하는지 어디 한 번 들어 보세."

5. 3막

은빛 달이 밤하늘의 절정을 지나고 나서야 알리사와 오람은 궁전을 나왔다. 쌍둥이는 녹서스 수도 안에 작전 기지 삼아 마련해 둔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리사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곱씹느라 말이 없었다. 뱃속에 딱딱한 바위가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반면 오람은 녹서스의 통치자들과 대면했다는 사실에 잔뜩 들떠 있었다.

“스웨인은 우리가 내건 조건에 동의할 거야! 확실해.” 오람은 흥분해서 말을 마구 쏟아냈다. “델베르홀드가 녹서스 제국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아버님께서 델베르홀드의 성문을 닫아버리면 제국에 타격이 크다는 걸 그 사람은 파악하고 있어.”

“이건 미친 짓이야.” 알리사가 말했다. “그 사람들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협박을 해? 처음부터 그걸 계획이라고 짠 거야?”

“아버지께서 세우신 계획이었지.”

“나한텐 왜 말 안 했어?”

“너한테 알려줬으면 넌 반대했을 거잖아.”

“당연하지. 이건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사절 임무야. 그냥 다음 번 검투사의 날에 제안을 했어도 충분…”

“스웨인이 확실히 동의한다면, 다른 두 명 중 한 명만 동의해도 우리 조건은 통과되는 거야.” 오람은 동생의 우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트리파릭스는 그렇게 돌아가니까. 의견을 통일할 필요가 없잖아? 셋 중에 두 명만 의견이 같으면 그만이야.”

“다리우스는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걸.”

“다리우스는 오만방자한 자식이야. 뭐? 병사 두 명만 보내도 델베르홀드를 점령할 수 있다고? 웃기네! 하지만 네 말도 맞아. 다리우스가 반대한다면 그 얼굴 없는 자가 남는데… 우리 델베르홀드의 미래와 번영이 그 정체 모를 가면의 의견에 달려 있는 거잖아.”

“그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될 때까지 멍하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알리사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오람의 눈에 위험한 빛이 번득였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오람이 설명을 시작하자, 알리사의 뱃속에 들어앉은 바위가 좀더 딱딱해졌다.

6. 4막

동이 트려면 아직 몇 시간 남았지만, 알리사는 벌써부터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짙은 빛깔 강철로 만든 투구를 쓰고 델베르홀드 경비대의 선두에 서서 녹서스 수도의 거리를 빠르고도 소리 없이 달리고 있었으니까. 투구는 머리에 너무 꽉 맞아서, 그 안에 갇힌 머리카락이 땀으로 흠뻑 젖은 것이 느껴졌다.

경비대는 열 명 남짓이었고 망토와 후드로 갑옷과 투구를 가린 차림이었다. 다들 묵직한 석궁을 하나씩 들고 허리에는 검을 찼다. 이 도시에서는 제국 전역에서 모인 무장한 부대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대원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누구 하나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알리사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알리사와 경비대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느낌도.

녹서스의 거리와 뒷골목은 좁은데다 이리저리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만의 하나 도시의 외곽 방어가 뚫리더라도 도시에 들어선 적이 제대로 진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건물 옥상은 하나같이 평평하고 활 쏘기용 구멍이 나 있어, 병사들이 아래쪽 거리의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알리사는 어둠에 싸인 건물 옥상을 신중하게 살폈다. 누군가가 그 위에서 알리사와 경비대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자칫하면 적이 매복하고 있는 골목으로 들어설 수도 있으니까…

갑자기 머리 위에서 까마귀가 시커먼 날개를 펄럭이는 바람에, 알리사는 황급히 멈춰서서 석궁을 하늘 쪽으로 겨누었다. 그녀는 부하들 앞에서 꼴사납게 놀란 모습을 보인 것을 자책하면서 계속 전진하자는 손짓을 했다.

“이건 좋은 생각이 아냐.” 알리사는 혼잣말을 했다. 거처에서 나온 후 이번까지 쳐서 딱 스무 번 되풀이한 말이었다.

그리고 거처에서 나오기 전에도 오빠에게 스무 번쯤 되풀이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람은 이미 결심을 굳힌 터라 알리사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거야. 오람은 최후 통첩을 내리는 투로 단언했다. 두 사람은 새로이 조정된 조건을 가지고 델베르홀드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돌아가지 않는다. 다른 길은 없다.

알리사는 이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은 처음부터 그녀의 아버지, 늙은 총독의 계획이었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만약 알리사와 오람이 트리파릭스의 노여움을 사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쌍둥이에게 애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오직 상속자이자 장남, 알리사의 큰오빠인 헤록에게만 쏠렸다. 만약 트리파릭스가 쌍둥이를 인질로 잡고 델베르홀드가 녹서스를 거역한다면 쌍둥이가 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한다면?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알리사와 오람은 소모품이었다.

알리사와 경비대는 그늘에 몸을 감춘 채, 불멸의 요새의 오래된 남쪽 방어벽 위로 불쑥 솟아 있는 늑대의 성소로 접근했다. 오람은 알리사보다 많은 경비대원을 거느린 채 여기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거리를 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델베르홀드 경비대가 불멸의 요새에 도착하기 몇 주 전, 델베르홀드가 고용한 첩자들이 궁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 중 한 명이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고, 바로 그 첩보에 따라 지금 알리사와 오람이 작전을 벌이고 있는 참이었다.

목표까지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알리사가 한 손을 들어올리자 델베르홀드 경비대가 그녀 주변에 정렬해 섰다. 늑대의 성소로 바로 향하는 좁은 길에 드리워진 그늘 속이었다. 늑대의 성소는 사방이 뚫린 층층으로 이루어진 높직한 탑으로, 각 층은 짙은 빛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다. 탑 한가운데에는 앉아 있는 늑대 조각상이 있었다. 높이가 무려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흑요석 조각이었다.

그들은 족히 1분 정도를 기다렸다. 마침내 저 멀리서 불꽃이 두 번 보였다. 부싯돌을 칼날에 부딪혀 만든 불꽃이었다. 오람이 준비를 끝냈다는 신호였다. 이제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가자.” 알리사의 속삭임과 동시에, 그녀와 부하들은 일사불란하게 그늘 속에서 뛰쳐나와 성소 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성소 경비대가 있는지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오람과 부하들이 먼저 손을 쓴 듯했다.

알리사는 성소로 향하는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며 손을 휙 하고 털었다. 그 신호에 맞춰 델베르홀드 경비대는 각자 거리를 벌리고 성소로 들어갔다가, 늑대 조각상 주변을 둘러싸며 다시 모였다. 그러고는 다시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어둠과 한 몸이 되어 말없이 기다렸다.

알리사는 문득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발로란의 고대 전설에서는 죽음은 대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평화로운 죽음은 양의 형상을 지니며, 폭력에 의한 죽음은 늑대의 형상이다. 녹서스에서는 후자의 죽음을 명예로 여기고 열렬히 원했다. 침대에 누워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힘을 숭상하는 제국에서는 명예로움과 거리가 멀었다.

알리사는 숨을 고르면서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양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다. 그녀는 망토에 땀을 닦았다.

무슨 일을 하든 기다려야 할 때가 제일 싫다니까.

알리사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하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잘 하고 있군. 눈에 너무 쉽게 띄면 이 모든 일이 다 허사로 돌아가니까 말이야. 알리사는 미세한 사슬을 엮어 만든 사슬천을 투구에 매달아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렸다.

저 멀리 감시탑에서 네 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준비는 다 끝났다. 첩자들이 알아낸 정보가 정확하다면, 표적은 이제 곧 이리로 올 것이다…

바로 그때 알리사의 생각이 신호가 되기라도 한 듯, 묵직한 로브를 걸친 형상이 나타났다.

정확히 불멸의 요새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었고, 궁전 경비대 네 명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맨 앞에 선 형상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여명 전의 새벽 어둠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트리파릭스의 세 번째 인물, 얼굴 없는 자였다.

얼굴 없는 자는 주변 그늘을 살피기라도 하듯 머리를 계속 좌우로 돌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성소로 다가왔다. 양손은 몸 앞쪽에서 맞잡고 있었지만 풍성한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궁전 경비대는 성소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얼굴 없는 자가 그들과 잠깐 말을 주고받는 듯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알리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가면을 쓴 얼굴 없는 자는 이제 혼자서 성소로 다가왔다. 늑대에게 경배를 드리러 오는 듯했다.

녹서스 수도 여기저기에는 싸움이나 투쟁과 관련된 다양한 성소가 있었다. 이런 성소를 주로 찾는 사람들은 부대에 소속된 전사나 투기장의 청산업자들이지만, 귀족이나 장사꾼들도 자주 들러 공물을 바쳤다. 첩자들이 관찰한 바로는, 얼굴 없는 자는 5일 주기로 새벽 네 시마다 이 성소를 찾았다. 항상 경비대를 거느리고, 어둠을 틈타.

트리파르 군단병의 충성심이야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지만, 궁전 경비대원은 고맙게도 뇌물에 넘어가 주었다.

얼굴 없는 자가 거대한 늑대상으로 다가오자 알리사는 몸을 숨겼던 그늘에서 뛰쳐나왔다. 그것을 신호 삼아, 뇌물을 받은 궁전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몸을 돌려 불멸의 요새 쪽으로 가버렸다. 알리사는 늑대상 주변에서 깜빡거리는 촛불 빛 속으로 걸어들어가며 석궁을 들어 얼굴 없는 자를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 소리도 내지 말고.” 알리사는 나직이 말했다. “경비대원들은 가 버렸어. 그리고 지금 당신 주변은 열두 개의 석궁이 둘러싸고 있고.”

얼굴 없는 자는 가면 뒤에서 무슨 말인가를 웅얼거렸다. 아마 놀라서 그러는 듯했다. 그러고는 알리사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 목소리, 어색한 몸짓… 이상하게도 분명 어디에선가 듣고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알리사의 말에 얼굴 없는 자는 제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녹서스의 그 누구도 트리파릭스의 세 번째 인물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적어도 알리사와 오람이 조사한 바로는 그랬다. 그것이 3인 평의회에서 ‘책략’이라는 원칙, 기만과 술책의 힘이겠지.

하지만 이제 알리사는 그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

“말하자면 영향력을 얻는 거지.” 오람 오빠의 말이었다. “우리가 그자의 정체를 밝혀내서, 그 정보를 우리에게 유용하게 써먹자는 거야.”

“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냐.” 알리사는 한껏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가면을 벗어. 그럼 피를 볼 일은 없을 거야.”

가면에다 후드까지 뒤집어쓴 얼굴 없는 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 버린 경비대원을 찾는 것인지, 아니면 알리사가 말한 석궁을 든 사람들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알리사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제 무기를 휘두르면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양손은 여전히 소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알리사는 그자의 가슴팍에 석궁을 겨누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얼굴 없는 자는 또다시 뭐라고 웅얼거리며 가면을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알리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깨달음의 감각이 알리사의 전신을 적셨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그녀는 손가락을 당겼다. 석궁 화살이 얼굴 없는 자의 로브 입은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부하 하나가 곧장 다가와 종용했다. “빨리 탈출합시다. 해가 뜨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알아차리기 전에 이 도시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이미 늦었어.” 알리사가 대꾸했다.

알리사는 땅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 얼굴 없는 자 옆에 무릎을 꿇었다. 로브 아래쪽으로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알리사는 부상 당한 자들을 숱하게 보았기에, 그자가 치명상을 입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알리사는 손을 뻗어 그자의 가면을 얼굴에서 벗겨냈다.

오람의 눈이 알리사를 응시했다.

오빠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휘둥그래졌으며,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오람은 온몸을 비틀며 엄습하는 죽음을 뿌리치려 했다.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로브 소매가 올라가며 노끈으로 단단히 묶인 양손이 드러났다.

오람은 마지막 순간에 알리사를 보던 시선을 돌려 두 사람 머리 위로 솟은 거대한 늑대상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어둠을 뚫고 트리파르 군단병들이 들이닥치더니 성소 주변을 둘러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해가 높이 솟았다. 알현실의 좁다란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마치 빛나는 창처럼 허공을 갈랐다.

7. 5막

알리사는 다시 한 번 트리파릭스 앞에 섰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양손은 등 뒤로 족쇄를 찬 채였다. 녹서스의 지도자 세 사람이 알리사를 신중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은 얼굴 없는 자의 무표정한 가면이 셋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침묵을 깬 것은 스웨인이었다.

“숨김 없이 말해라. 델베르홀드는 녹서스에 지극히 가치 있는 지역이다. 하지만 총독의 무리한 요구와 협박을 받아줄 정도의 가치는 아니다. 그랬다가는 녹서스가 무력하다는 신호가 될 테니. 그랬다가는 일 주일도 못 가 다른 지역들도 자기들 요구를 들어달라고 알현실에 줄을 설 테니 말이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지. 그런데 넌 그걸 이미 알고 있었구나.”

“네.” 알리사가 대답했다. “제 오빠는 몰랐지만요.”

“그렇다면… 우둔한 질문인지 모르겠으나, 어째서 너처럼 영리한 젊은 여성이 그렇게 실패할 게 뻔하고 어설픈 계획에 동참한 것이냐?”

“의무감 때문입니다.” 알리사가 말했다.

“제국에 대한 의무감은 가문이나 가족에 대한 의무감보다 항상 우선시되어야 한다.” 스웨인이 말했다.

알리사의 눈에는 그 말에 다리우스의 표정이 아주 살짝 어두워진 것 같았다.[1] 하지만 ‘녹서스의 실력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알리사가 말했다. “바로 그 때문에 저는 가면 뒤의 인물이 제 오빠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석궁을 당긴 겁니다.”

스웨인은 가면을 쓴 얼굴 없는 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자에게 재갈을 물리고 변장을 시키다니, 위험한 수였소. 그것 말고도 저 여성을 시험할 방법이 있었을 텐데.”

스웨인은 다시 알리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럼 나와, 우리 평의회 구성원들이 즐거울 만한 답변을 기대하며 묻겠다. 너는 어째서 네 친오빠라는 걸 알면서도 석궁을 쏜 것이지?”

“제 아버지는 오빠와 저를 죽으라고 여기 보낸 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죽음을 당하면, 그걸 핑계로 녹서스에서 델베르홀드를 독립시키려는 속셈이었죠.”

“계속해 보게.”

“제 아버지와 오빠들은 얼간이들입니다. 다시 한 번 제 가문이 강철가시 산맥을 다스리는 왕가가 되고 그 왕위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에 눈이 멀었죠. 그렇게 허황되고 덧없는 허영심 때문에 그곳 주민들이 몰살당할 거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스웨인의 한쪽 입꼬리가 아주 약간 들어올려지며 얼음장 같은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렇다면, 알리사 로쉬카 글로리아나 발-로칸이여. 그대는 무엇을 제안하려 하는가?”

8. 에필로그

알리사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나타나자, 나이 든 발-로칸 총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대체 뭐냐?” 총독은 고함을 쳤다. “미리 알리지도 않고 제멋대로 돌아오다니? 오람은 어디 있느냐?”

알리사의 뒤를 이어 성큼성큼 들어온 것은 두 명의 트리파르 군단병이었다. 짙은 빛깔의 강철가시 방어구가 특히 눈에 띄었고, 손에 틀어쥔 미늘창이 몹시도 불길해 보였다.

총독 옆에는 알리사의 큰오빠이자 델베르홀드 가문의 적장자, 헤록이 있었다. 휘둥그렇게 뜬 눈에 두려움이 어렸다.

“경비!” 총독이 소리쳤다. “이것들을 물리쳐라!”

하지만 총독의 경비병들은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트리파르 군단의 명성은 발로란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트리파르 군단과 아군으로서나 적으로서 싸운 적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그 위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트리파르 군단은 ‘녹서스의 실력자’가 의미하는 권위를 지니며, 따라서 군단에 저항하는 것은 트리파릭스 자체에 저항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도.

알리사는 다리우스가 했던 말들, 쌍둥이 오빠가 경멸을 내비쳤던 그 말들을 여러 번 떠올렸었다.

저 둘만으로도 네 녀석의 그 소중한 델베르홀드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

결국 그것이 말뿐인 허세가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알리사의 아버지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물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을 했어요.”

알리사는 돌돌 말린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글씨가 새로 씌어지고 녹서스의 문장, 아니 트리파릭스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알리사는 아버지 앞 탁자에 양피지를 때려붙이듯 내려놓았다. 총독은 그 서슬에 펄쩍 뛰듯 놀랐다.

“대장군의 명에 따라, 나는 당신을 총독직에서 해임합니다.” 알리사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이곳을 통치합니다. 제국을 위해서요.”

“네가? 허튼 소리!” 알리사의 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델베르홀드는 여자의 통치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럼 이제부터 그걸 바꿔 보죠. 이제는 이곳 주민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이곳을 통치해야 합니다. 과거에 다 시들어버린 영광과 왕좌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요.”

알리사가 고개를 까딱 하자, 그녀의 아버지를 모시던 경비대원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아버지를 붙잡았다.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총독이 소리를 질렀다. “난 네 아버지다! 너의 군주란 말이다!”

“당신은 군주가 아니에요.” 알리사가 대꾸했다. “특히 나의 군주는 더더욱 아니죠.”


[1] 과거 다리우스와 그의 애인 퀄레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전쟁 때문에 죽었고, 이후 퀼레타마저 부하에게 나약하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더욱 슬픈 건 이 부하는 다리우스와 퀼레타의 딸이었다. 즉 딸이 아버지의 눈앞에서 어머니를 죽인 것. 스웨인의 의무감 운운하는 말은 누구보다도 다리우스에게 잘 어울리지만, 제국을 위해 가족을 희생한 다리우스의 입장에서는 아픈 기억이기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