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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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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월 봉기
powstanie styczniowe[1]/ 1863 metų sukilimas[2]/ Польское восстание[3]/ Паўстанне 1863–1864 гадоў[4]
기간
1863년 1월 22일 ~ 1864년 6월 18일
장소
러시아 제국
원인
러시아 제국 영내 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들의 독립 시도
교전 국가 및 세력

[[폴란드 국민정부|]][[틀:국기|]][[틀:국기|]] 폴란드 국민정부
가리발디 의용군[5]
헝가리인 의용군 부대[6]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프로이센 왕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알렉산드르 2세
병력
20만명[7] 10만명
결과
러시아 제국의 봉기 진압, 프리비슬린스키 설립
영향
폴란드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의 미국 대량 이민,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와 폴란드 민족주의의 분화
피해
10,000~22,000여 명 사망
7,000여 명 부상
4,500~10,000여 명 사상

1. 개요2. 배경3. 전개4. 영향5.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1863년 1월 22일부터 1864년 6월 18일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부활을 목표로 러시아 제국에 저항한 폴란드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의 봉기.

2. 배경

해당 봉기는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가 아닌 러시아 제국에서 터져나왔는데, 이는 봉기 이전 러시아 제국이 크림 전쟁에서 졸전 끝에 패배하고, 영국-러시아 제국 관계가 악화하였기 때문이다. 폴란드인 민족주의자들은 봉기를 일으키면, 마치 크림 전쟁 당시 오스만 제국이 영국과 프랑스 등의 도움으로 승리했던 것 비슷하게, 여타 서구 열강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 내 폴란드 영토가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3. 전개

1863년 폴란드 입헌왕국의 행정 수반 비엘로폴스키(Aleksander Wielopolski)는 1861년 이후 시위가 빈발하는 상황에서 무장 봉기 가능성을 우려하였고, 무장 봉기에 가담할 만한 확률이 높은 지식인, 노동자 1만여 명을 대상으로 1월 14일부 강제 징집 명령을 내렸다. 징집 대상에 오른 사람들이 징병을 피해 피신하고 폴란드 임시 민족 정부(Tymczascowy Rzad Narodowy)는 계획보다 서둘러서 1월 22일부로 봉기를 선포한다. 봉기 발발 이전에는 러시아 제국 정부의 협조적이었던 러시아 제국 각지의 폴란드 슐라흐타들이 봉기 발발 이후 서서히 봉기 가담측으로 돌아서면서 해당 1월 봉기는 폴란드 입헌왕국을 넘어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인플란트[8]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서부 지역으로도 번져나가게 되었다.

4. 영향

해당 봉기는 오늘날 폴란드와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삼국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남겼다.

벨라루스의 경우 폴란드-리투아니아 시대를 거치며 완전히 폴란드화했던 전통적인 지주 엘리트 계층이 몰락하였다. 봉기 가담 관련자로 처벌받은 사람들 중 95%가 로마 가톨릭 신도였고, 벨라루스 지역의 봉기 가담자 중 50%가 지주 계층이었다. 러시아 제국 당국은 이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였으며, 봉기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은 러시아화하였다. 한편 유럽의 여타 국가들의 경우 귀족 계급이 몰락하면, 차상위 계급이 빈 자리를 대신 물려받는 것이 상례이지만 당시 벨라루스는 몰락한 지주 계급의 빈자리를 채울 만한 마땅한 계급 집단이 부재했다. 벨라루스의 도회지 주민 대다수는 유대인 같은 사회 소수자나 독일계 같은 아웃사이더였고, 이들은 농촌의 벨라루스인[9]들과 굳이 민족적으로 연대하지는 않았다.

빌뉴스의 경우 1861년부터 지속적으로 시위가 일어나곤 했는데, 이는 빌뉴스가 리투아니아 내에서 가장 폴란드화가 집중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폴란드 입헌왕국에서 발발한 봉기는 2월 1일부로 리투아니아로도 확산되었고, 결국 진압당하면서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 상당수가 봉기에 휩쓸려 처벌을 받거나 혹은 재산을 처분하고 망명했다. 리투아니아 내 폴란드 민족주의 성향 엘리트 및 지식인 계층 상당수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리투아니아의 경우 역시 벨라루스와 마찬가지로 봉기 가담자 중 절반 가까이가 지주 계층이었고, 이들이 쓸려나가면서 리투아니아 농촌 사회는 러시아 제국 여타 지역에 비해 훨씬 더 빠른 변화를 맞게 되었다.[10]

1월 봉기 이전 러시아 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강경 탄압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폴란드인들에게는 비교적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정책을 취하곤 했었다. 그러나 1월 봉기의 진압과 폴란드 입헌왕국의 완전한 자치권 몰수[11] 이후 프리비슬린스키가 들어서면서 폴란드어의 사용이 제한되고,[12] 적극적인 러시아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탄압 및 경제적 저개발 상황에서 러시아 제국 내 폴란드인들은 미국으로 대량이민하기 시작했다. 이미 폴란드 분할이나 11월 봉기 당시에도 상당수의 폴란드인들이 해외로 망명했던 바 있었으나, 당시 망명이 주로 사회 엘리트와 지식인층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1월 봉기 이후 폴란드인들의 이민은 지식인 엘리트층 이외에도 말단 노동자와 빈농까지 사회 각계각층에 걸쳐 일어났다.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이미 두 차례나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킨 폴란드인들을 자국 내 제5열 즈음으로 여기기 시작했는데, 폴란드인들이 해외로 떠나 인구가 감소하고 그 자리를 정교회 신도들이 채워서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에 폴란드인들의 해외 이민 관련해서는 여권을 잘 발급해주는 편이었다.

5. 같이 보기


[1] 폴란드어[2] 리투아니아어[3] 러시아어[4] 벨라루스어[5] 약 20여 명 규모[6] 1848년 혁명 당시 일부 폴란드인 용사들이 헝가리 독립운동을 도와줬던 보답으로 일부 헝가리인 용사들이 1월 봉기에 자원하였다.[7] 봉기에 참가한 적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집계한 것이다. 실제로는 3만 명을 넘은 적이 없다.[8] 라트비아 일대[9] 당시 벨라루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교회 신도였다.[10] 표트르 스톨리핀은 총리가 되기 이전 코브노 현에서 근무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코브노 일대 농민들이 대부분 자영농으로서, 러시아 여타 지역의 농민들에 비해 더 농업 생산성이 월등히 더 높은 것을 눈여겨 보았다. 한 편 당시 러시아인 농민들은 농노 해방으로부터 수십여 년이 지난 이후에도 미르 제도를 바탕으로 공동경작 시스템을 포기하기 못한 상황이었는데, 스톨리핀은 이를 개혁하기 위해 코브노 현에서 목격했던 바에서 착안, 자영농을 육성하여 러시아 제국의 농업 생산성을 크게 신장시켰다.[11] 1월 봉기로 폴란드 입헌왕국이 해체되었다는 것은 널리 퍼진 오해로,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가 입헌왕국을 대체했다는 것은 러시아 정부가 폴란드라는 이름 자체에 경기를 일으켜 폴란드가 이름에 들어가지 않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하고 의욕적으로 사용한 것이 오해를 일으킨 것이다. 법적으로 폴란드 입헌왕국은 러시아 제국과 동군연합으로 계속 남았으며 한번도 폐지된 적이 없다. 입헌왕국이 폐지된 해는 1차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폴란드 입헌왕국을 점령한 1915년이다. 물론 법적 폐지 여부와는 별개로 1월 봉기 실패로 입헌왕국이 진짜 껍데기만 남은 것은 사실이다.[12] 다만 우크라이나어 출판물 인쇄가 완전히 막혔던 것과 반대로 폴란드어 출판물 인쇄는 법으로 막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