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 ||
조별 라운드 | 1조, 2조 | 3조, 4조 |
결승 토너먼트 | 8강 이후 |
1. 8강
1.1. 1경기 소련 0 vs 1 (연장) 우루과이
경기장 |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멕시코 시티 - 멕시코 | |
경기일[A] | 1970년 6월 14일 12:00 (1970년 6월 15일 02:00) | |
국가 | 소련 | 우루과이 |
점수 | 0 | 1 |
득점 | 에스파라고 (116') |
홈팀 멕시코의 텃세를 누르고 가볍게 1위를 차지한 소련과 죽음의 조에서 1승 1무 1패 2득점으로 골골대며 올라온 우루과이의 맞대결. 우승후보로 여겨졌던 우루과이에 세대교체에 실패하며 불혹에 가까운 야신의 고군분투로 올라온 소련이었지만 조별 예선에서의 결과가 뒤집히면서 한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경기였다. 역시나 수비로 알아주던 소련과 수비 조직력을 끌어올린 우루과이답게 지루한 경기가 이어지면서 득점이 나오질 않았다. 전후반 모두 0:0 무재배로 끝나고 연장전에 돌입, 여기서 우루과이의 결승골이 터졌다. 연장후반 11분 에스파라고의 짜릿한 골이 쐐기를 박으며 경기 종료 직전 우루과이가 4강행 티켓을 간신히 끊었고, 2연속 4강 진출을 노렸던 소련은 아쉽게 다음 대회를 기약해야 했다. 우루과이는 1962년의 소련전 패배를 복수하며 조2위 팀 중 유일하게 4강에 진출했고 반면 소련은 8강에서 탈락한 유일한 조1위 팀이 되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우루과이는 이후 40년 동안 유럽을 상대로 월드컵 경기에서 이겨 본 적이 없게 된다. 그 이전만 해도 유럽과의 경기에서 어렵지 않게 승리했던 우루과이지만 이 대회 이후 전력이 급다운하면서, 심지어 40년만에 4강 진출을 쏘아올렸던 2010 남아공 대회에서도 유럽을 상대로는 1무 2패의 성적을 냈으니(프랑스전 0:0, 네덜란드[2]-독일전 2:3)... 물론 붙었던 나라들 모두 유럽에서도 한끝발 날리는 강호였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74년 스웨덴과 불가리아, 86년 스코틀랜드와 덴마크[3], 2002년 덴마크 등등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와도 많이 붙었는데 1승도 못 얻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 이 징크스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가서야 잉글랜드를 2:1로 이기면서 깨지게 된다.
1.2. 2경기 이탈리아 4 vs 1 멕시코
경기장 | 에스타디오 루이스 도살 톨루카 - 멕시코 | |
경기일[A] | 1970년 6월 14일 12:00 (1970년 6월 15일 02:00) | |
국가 | 이탈리아 | 멕시코 |
점수 | 4 | 1 |
득점 | 구스만 (25') (자책골) 리바 (63'), (76') 리베라 (70') | 곤살레스 (13') |
- 굴욕의 역사를 끝내고 처음으로 포텐이 터진 아즈텍의 후예, 카테나치오라는 획기적인 전술을 통해 세 번째 우승에 도전하는 빗장의 수비가 맞붙은 대결이었다. 홈팀의 텃세와 열광적인 관중의 응원에 힘입어 8강에 오른 멕시코의 기세는 무서웠다. 더욱이 조별에선에서 단 한 골밖에 터지지 않을 정도로 부진했기에 이번에도 역시나...싶었다. 경기 시작부터 매섭게 몰아붙인 멕시코는 전반 13분 곤잘레스가 선제골을 터뜨린다. 응원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0:1로 끌려다니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카테나치오가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듣보잡 팀 따위에 질 수 없다는 듯 이탈리아의 철벽수비는 멕시코 선수들의 기를 꺾게 했고, 설상가상으로 전반 25분 구스만의 자책골이 터지며 주도권을 가져오게 된다. 멕시코의 대회 첫 실점. 멕시코 선수들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선수들은 무섭게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반전은 1:1로 끝났으나 후반전부터 회심의 역습이 빛을 발하며 후반 18분에 리바의 역전골, 30분에 리베라의 추가골, 36분에 다시 리바의 두 번째 쐐기골이 터지며 멕시코 관중들을 얼게 만들었다. 4:1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가 그대로 종료되며 이탈리아가 4강에 진출, 조별예선에서 1골 밖에 기록하지 못했떤 부진을 말끔히 씻으며 우승에 한 걸음 다가갔다. 홈 이점을 살려 처음으로 2라운드에 진출한 멕시코의 기적은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였다. 조별리그에서 무실점으로 올라왔지만 이 경기에서만 4실점하며 무너져버렸다.
1.3. 3경기 브라질 4 vs 2 페루
경기장 | 에스타디오 할리스코 과달라하라 - 멕시코 | |
경기일[A] | 1970년 6월 14일 12:00 (1970년 6월 15일 02:00) | |
국가 | 브라질 | 페루 |
점수 | 4 | 2 |
득점 | 히벨리누 (11') 토스탕 (15'), (52') 자이르지뉴 (75') | 가야르도 (28') 쿠비야스 (70') |
- 페루의 선전으로 남미팀간의 매치가 성사되었다. 당시로서도 세계 최고의 선수가 모두 모였던 브라질이었기에 아무리 승승장구하는 페루였어도 무리일 수 밖에 없는 경기였다. 시작하자마자 브라질이 맹공을 퍼부었고 전반 11분만에 히벨리누의 첫 골이 터지고 4분 뒤 토스탕의 추가골이 또 터진다. 엄청난 공격을 겨우겨우 막다 역습 한 방에 전반 28분 페루의 가야르도 선수가 만회골을 넣은 채 2:1 전반전 종료. 후반전 들어 또다시 브라질의 맹공이 이어지면서 후반 7분 토스탕의 추가골이 터지고, 다시 재역습을 가해 페루의 전설 쿠비야스가 후반 25분 만회골을 넣으며 3:2 펠레스코어를 만들지만 곧이어 자일지뉴의 쐐기골이 박히며 4:2 그대로 경기가 종료된다. 올스타가 총출동했지만 브라질 입장에선 크게 힘을 빼지 않고 쉬어갈 수 있는 경기였고, 나름대로 선전했던 페루의 월드컵 도전사는 아쉽게 막을 내린다. 그래도 사실상 첫 지역예선 통과에 8강까지 진출하고 쿠비야스라는 걸출한 선수를 발굴했기에 큰 족적을 남긴 대회이기도 했다.
1.4. 4경기 서독 3 vs 2 (연장) 잉글랜드
경기장 | 에스타디오 할리스코 과달라하라 - 멕시코 | |
경기일[A] | 1970년 6월 14일 12:00 (1970년 6월 15일 02:00) | |
국가 | 서독 | 잉글랜드 |
점수 | 3 | 2 |
득점 | 베켄바워 (68') 젤러 (76') 뮐러 (108') | 멀러리 (31') 피터스 (49') |
- 전 대회 우승국 잉글랜드가 브라질에 밀려 2위로 떨어지며 4년전 결승전의 리턴 매치가 시작되었다. 너무 안타깝게 우승을 놓친 서독이었던지라 이들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있었고, 잉글랜드도 잉글랜드 나름대로 전 대회의 논란을 잠재우고 종주국의 위상을 이어가기 위한 자존심 싸움이 치열했다. 경기 시작과 함께 엄청난 혈투가 시작되면서 경기의 흐름이 정신없이 왔다갔다했는데, 첫 골은 잉글랜드가 가져갔다. 전반 31분 멀러리의 환상적인 슛이 그대로 서독의 골망을 가르며 1:0 리드, 그대로 전반전이 끝났다. 라커룸에 들어간 서독 선수들은 4년 전의 설움을 또다시 받을 순 없다며 울분의 복수를 다짐했지만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잉글랜드에 한 골 더 먹힌다. 2:0으로 벌어지기 시작하자 독기를 품은 서독 선수들은 게르트 뮐러와 프란츠 베켄바워라는 기량이 한창 만개한 선수들을 앞세우며 주도권을 끌어오기 시작했고[7] 결국 후반 23분 베켄바워의 천금같은 만회골이 터지며 한점차로 따라붙는다.
베켄바워는 감독의 명에 따라 4년 전처럼 1:1로 찰튼을 마크했지만,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던 찰튼은 공격가담과 패스전개로 유명한 베켄바워가 오로지 수비에 전념하게 만들면서 중원싸움을 압도했고 그로 인해 잉글랜드가 2대 0으로 경기를 리드하고 있었다.
이때,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꼽히던 알프 램지는 노장 찰튼의 체력 안배를 위해 후반에 찰튼을 콜린 벨과 교체 시킨다. 이게 결국 오판이 됐는데 베켄바워에게 더욱 자유로운 움직임을 부여하며 독일의 경기력을 더욱 끌어올렸고, 후반 31분 젤러의 동점골을 유발했다.
동점골을 먹힌 후 체력이 후달린 잉글랜드는 점점 기력을 잃어갔고 제대로 반코트 경기를 했지만 더이상의 골 없이 연장전 돌입, 결국 108분 뮐러의 결승골이 터지며 4년전의 복수를 완벽히 해낸다. 우승후보 두 팀의 매치에 4년 전의 결승 상대들 답게 흥미진진한 경기였고, 결국은 세대 교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젊은 팀' 서독의 승리로 끝났다. 잉글랜드로서는 다 이긴 경기를 역전당해 아쉬웠겠지만 4년 전의 선수, 전술을 끌고 온게 패착이었다. 홈 버프도 사라진 상태에서 전력마저 하락하니 체력 문제를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체력 문제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으니 바로 음식 문제. 잉글랜드 감독은 멕시코 현지 음식을 믿지 못하겠다며 자국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멕시코로 향했는데, 오히려 잉글랜드 선수들이 영국 음식을 버티지 못하고 줄설사를 해댔다는 썰이 있다.
2. 4강
2.1. 1경기 브라질 3 vs 1 우루과이
경기장 | 에스타디오 할리스코 과달라하라 - 멕시코 | |
경기일[A] | 1970년 6월 17일 16:00 (1970년 6월 18일 06:00) | |
국가 | 브라질 | 우루과이 |
점수 | 3 | 1 |
득점 | 클로두아우두 (44') 자이르지뉴 (76') 히벨리누 (89') | 쿠비야 (19') |
현재에는 후술한 이탈리아와 서독 간의 2번째 준결승전이 훨씬 더 회자되지만,[10] 브라질에 가면 이 4강전이 아직도 더 많이 입에 오른다. 당시에도 자국에선 1970년 최대 매치는 4강전 우루과이전으로 평가받았다.
20년전 마라카낭의 비극을 안겨준 나라가 바로 우루과이였고, 정확히 20년 만에 결승 문턱에서 리턴매치로 붙었기 때문이다. 전력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모든 브라질 선수와 국민들은 이 때의 복수를 다짐하며 칼을 갈고 있었고, 심지어 감독과 펠레까지 모두 한 목소리로 마라카낭의 비극을 기억해야 한다며 우승 못해도 좋으니까 우루과이만큼은 꼭 이겨야 한다고 피를 쏟도록 열변했다고 한다. 그만큼 브라질 사람들에게 마라카낭의 비극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며, 우루과이에 가진 적대감과 라이벌 의식이 어마어마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50년과 1970년의 공통점이 있다면 브라질이 우루과이보다 더 우세했다는 점이지만 1950년 당시에는 브라질의 미친 홈 버프가 있었고, 실제 전력차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될 수준이었다. 하지만 1970년은 달랐다. 브라질은 당대 최강이자 지금까지도 최고로 평가받는 올스타 팀이었고, 브라질 입장에서도 원정이었으며 이들에 대적할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우루과이도 충분히 강력한 우승후보였지만 브라질의 아성을 꺾기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당대 최강의 선수들이 우승보다 우루과이전 승리에 칼을 갈고 있었으니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 마라카낭과 정확히 반대로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전반 19분 우루과이의 선제골이 터졌지만 브라질이 전반 종료 직전 동점골, 후반전 두 골을 쏟아부으며 3:1 역전승을 거두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펠레의 개인기가 이어진다. 수비수 세명을 떡바르고 골키퍼까지 농락했는데도 빈 골대 두고 삽질하기 쇼.
2.2. 2경기 이탈리아 4 vs 3 (연장) 서독
경기장 |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멕시코 시티 - 멕시코 | |
경기일[A] | 1970년 6월 17일 16:00 (1970년 6월 18일 06:00) | |
국가 | 이탈리아 | 서독 |
점수 | 4 | 3 |
득점 | 보닌세냐 (8') 부르그니치 (98') 리바 (104') 리베라 (111') | 슈넬링어 (90') 뮐러 (94'), (110') |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 '빗장 수비'의 이탈리아와 '람바참바' 서독이 아주 치열하게 붙으며 창과 방패가 어디까지 단단할 수 있나를 시험했고, 골 하나하나가 예술적으로 터지며 역전에 재역전끝에 연장전까지 돌입해 이탈리아가 힘겹게 이기고 올라간 경기였다. 전반 시작 8분만에 이탈리아의 선취점이 터지고 그대로 이어졌지만 후반 종료를 5분 앞두고 카를하인츠 슈넬링어의 동점골이 터지며[12] 연장전에 돌입, 여기서부터 엄청난 기록이 이어지게 된다. 연장전 5분 뮐러의 역전골. 3분 뒤 이탈리아의 재동점골. 6분 뒤 이탈리아의 재역전골, 연장전반 종료. 연장후반 5분 서독의 재동점골, 곧바로 1분 뒤 이탈리아의 쐐기골. 9분 뒤 경기종료. 보다시피 연장전 30분동안 무려 다섯골이, 그것도 역전-재동점-재역전-재재동점-추가골로 이어지는 명승부였다. 굉장히 치열했던 경기답게 서독의 레전드 프란츠 베켄바워는 팔에 중상을 입었지만 붕대를 감은채 그대로 경기를 끝까지 마치는 투혼을 발휘했다. 서독이 이탈리아에게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처음 진 경기이기도 했는데(이전엔 62년 칠레 대회 조별예선에서 무승부), 이 대회 이후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대회에서 이탈리아에게 죽을 쑤고 있다. 그리고 이 경기장을 치른 에스타지오 아스테카에서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서독은 이 날 이탈리아에게 패배한 이후 월드컵이나 유로 본선에서 이탈리아만 만나면 이기지를 못하고 있다.[13][14] 그리고 이탈리아는 이 경기를 끝으로 월드컵에서 4점 이상의 대승을 거둔 적이 없다.
여담으로,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사토, 잔니 리베라와 독일의 카를하인츠 슈넬링어는 AC밀란의 소속팀 선수들끼리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월드컵 최초로 다른 국적의 소속팀 선수들이 출전하여 맞대결을 펼친 경기이다.
3. 3, 4위전 서독 1 vs 0 우루과이
경기장 |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멕시코 시티 - 멕시코 | |
경기일[A] | 1970년 6월 20일 12:00 (1970년 6월 21일 02:00) | |
국가 | 서독 | 우루과이 |
점수 | 1 | 0 |
득점 | 오베라트 (26') |
두 팀 모두 우승후보였고 4강에서 분패했지만 역시 의미있는 경기였다. 잉글랜드 vs 서독, 브라질 vs 우루과이처럼 4년만의 리턴매치에 당시 우루과이가 4:0으로 떡발리며 8강에서 주저앉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루과이로서는 4년 전의 복수심에 불타있었고 서독도 유종의 미를 장식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으며 상당히 긴장감 넘치는 경기가 이뤄졌다. 3,4위전 답지 않게 화려한 명승부를 펼치며 재미있는 주도권 싸움이 이어졌지만 이번에도 우루과이는 서독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전반 26분 우루과이의 그물망을 가른 오베라트의 골이 그대로 결승골로 이어지며 1:0 서독의 승리로 끝났다. 두 대회 연속 우승의 문턱을 넘지 못한 서독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우루과이도 16년만에 4강에 오르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다만 다음 대회에서 우승하고 스타 플레이어가 계속 발굴되며 월드컵의 깡패로 자리잡은 서독과 달리, 우루과이는 다음 대회에서 1무 2패로 광탈한 이래 20년 주기로 승리를 쌓는 극강의 부진 속에 2010 남아공 이전까지 처절히 늪에 빠지게 된다.
4. 결승전 브라질 4 vs 1 이탈리아
경기장 |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멕시코 시티 - 멕시코 | |
경기일[A] | 1970년 6월 21일 12:00 (1970년 6월 22일 02:00) | |
국가 | 브라질 | 이탈리아 |
점수 | 4 | 1 |
득점 | 펠레 (18') 제르송 (66') 자이르지뉴 (71')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86') | 보닌세냐 (37') |
세계 최고의 창, 세계 최고의 방패의 대결. 공격과 수비의 대표주자가 맞붙은 것도 흥미로운데 둘 다 지금까지 누적 2회 우승을 경험한 나라들이다. 즉, 여기서 우승하는 나라가 3번째 우승을 장식하여 줄리메컵을 영원히 가지게 되는 나라가 되는 의미있는 결승전이었다. 지역예선부터 깡으로 전승을 기록한 극강의 브라질도 브라질이지만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로 유로 1968로 화려하게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으며, 조별예선에서 부진했지만 극강의 수비라인만큼은 조직력이 매우 우수했으며 결국 8강전부터 포텐이 터짐으로써 기세가 매섭게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각자 서로가 월드컵 우승은 내꺼라는 식의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졌고, 전세계인의 결승전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불타올랐다. 마침내 경기의 막이 올랐는데, 세계 최고를 가리는 최고의 팀간의 경기라는 평가가 무색하게 일방적인 반코트 경기로 이어졌다. 펠레의 선제골이 일찌감치 터지며 브라질이 거의 일방적인 반코트 경기를 펼쳤고, 이탈리아에서는 화려한 공격수들의 멀티플레이를 골대 앞에서 막기에 급급했다. 그래도 세계 최고의 팀 답게 허를 찌르는 역습으로 동점골은 뽑아내고 전반전을 1:1로 마쳤는데, 역시나 후반전 가서는 브라질의 독무대가 이어지며 제르송, 자이르지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의 골이[17] 연이어 터지며 4:1로 싱겁게 결승전이 마감되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결승전 역대 최고 골 차 타이기록[18]으로 남아있다.[19] 펠레-토스탕-자이르지뉴-제르송-카를루스 아우베르토-히벨리누로 이어지는 공격라인은 지금까지도 전설의 레전드라 불리며 칭송받고 있으며 아직까지 뛰어넘는 팀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팀이었다. 공격이 극강이었던 것은 맞았지만 미드필더, 수비라인에서도 어느 팀에 가던 에이스 취급받을 선수들 투성이었고 다른 나라에선 무조건 1군 먹고도 남을 선수들이 1970 브라질에선 2군 후보에도 끼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까 말이다.[20] 기존 브라질의 전술에 유럽식 전술을 도입하면서 남미의 강점과 유럽의 강점이 고루 섞인 팀이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무엇보다 화려한 선수층을 가지면서도 불화 없이 끈끈한 조직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애초에 브라질을 넘는다는 것은 무리수였다. 너무도 쉽게 줄리메컵을 소유하게 된 브라질 선수들에 대한 환호성은 중남미 전역을 울릴 정도로 뜨거웠으며 시상식 직후 브라질 선수들에게 남은 것은 팬티뿐이기도 했다 (몰려든 팬들이 우승팀 기념품을 가져가려고 막 손댄 바람에). 아무튼 여러가지로 기록을 남긴 1970년의 브라질은, 자국 내에서도 이 당시 팀을 넘지 못할 정도로 그냥 어마어마한 팀이었다. 3회 우승을 최초로 달성하며 줄리메컵을 완전히 가져오기도 했던, 브라질에게는 잊지 못할 매치이자 기념비같은 대회였다.
[A] 괄호 안은 한국시간[2] 다만 이 경기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8강 가나전에서 주력 공격수 수아레즈가 가나전 연장 막판에 손으로 결정적인 골을 막는 사건을 일으켜 퇴장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 신의 손이 없었다면 우루과이는 8강에서 탈락했다.[3] 덴마크는 첫 진출이였음에도 무려 1:6으로 대패를 당했다. 신기하게도 2무 1패의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3위 팀들중 4번째로 높은 성적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A] 괄호 안은 한국시간[A] 괄호 안은 한국시간[A] 괄호 안은 한국시간[7] 거기다가 잉글랜드에서는 복통으로 인해 주전 골키퍼인 고든 뱅크스가 결장했는데 후보 골키퍼가 잘 못하는 선수였다. 첼시에서 뛰던 피터 보네티 골키퍼. 피터 쉴튼이 이때 나왔더라면...[8] 막 해기스나 정어리 파이, 장어 젤리 이런걸 들고 간 건 아니다. 평범하게 빵, 소시지, 생선(어떤 생선인진 밝혀지지 않았고 어떤 요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튀김이나 훈제 같은 거겠지), 토마토 케첩만 가져갔다고 한다.[A] 괄호 안은 한국시간[10] 세기의 경기(스페인어: Partido del Siglio / 이탈리아어: Partita del Secolo / 독일어: Jahrhundertspiel)로 수식되는 경기이다.[A] 괄호 안은 한국시간[12] 이 골은 슈넬링어가 국가대표팀에서 기록한 유일한 골이다. 그래서 서독 해설자는 슈넬링어가 골을 넣은 것에 "슈넬링어! 많은 이들 중 슈넬링어(가 넣었습니다)!"(Schnellinger! Ausgerechnet Schnellinger!)하고 소리치며 놀랬다.[13] 다만 친선경기에서는 독일이 몇 차례 이긴 적 있다.[14] 유로 2016 8강에서 독일이 승부차기로 이탈리아를 이기고 4강에 올랐지만 승부차기는 무승부로 기록된다.[A] 괄호 안은 한국시간[A] 괄호 안은 한국시간[17] 이 골은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최고의 골로 평가받는데, 전문가들은 마라도나의 오관돌파 골이 개인기량의 극한이라면 아우베르투의 골은 팀 플레이의 극한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영상을 보면 브라질 진영에서 시작한 빌드업이 골이 되기까지 매우 부드럽고 유기적이다.[18] 1958년 스웨덴 월드컵 브라질 5:2 스웨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프랑스 3:0 브라질. 공교롭게도 세 경기 모두 브라질이 관여되어 있다.[19] 단 이런 압도적인 결과가 나온 것은 순수한 실력차 외에도 4강전에서 서독과 연장혈투까지 간 것의 영향력이 크다는 이야기가 당대부터 나왔다. 물론 브라질이 역사에 남을만큼 강하긴 했지만, 이탈리아 역시도 최고의 선수들로 이야기되는 이들이 스쿼드를 채우고 있었고 게르트 뮐러랑 베켄바우어가 버티던 서독을 격파하고 결승전에 올라갔다. 디노 조프를 서브로 밀어낸 알베르토니나 산드로 마촐라, 자친토 파케티, 잔니 리베라, 루이지 리바 등등. 다른 한편으로 역시 이런 네임드들이 즐비하고 유로 1968을 우승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를 펼친 것이 1970년의 브라질이 역대 최고의 팀으로 이야기되는 주요 요소기도 하다.[20] 당시 중앙 미드필더에서 주전으로 뛴 제르송은 폭스와 한 인터뷰에서 보면 네이마르가 1970년에 있었다면 후보에도 못 들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벨리누, 펠레, 토스탕, 자일지뉴를 제끼고 주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당시 벤치에는 파울로 세자르 카주가 있었는데 그는 굉장히 뛰어난 10번이었고, 어디에서나 뛸수 있는 선수였기에 그를 제치고 벤치에 앉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