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탕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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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fff72a> 이름 | 토스탕 Tostão[1] |
본명 | 에두아르두 곤살베스 지안드라지 Eduardo Gonçalves de Andrade |
출생 | 1947년 1월 25일 ([age(1947-01-25)]세) 브라질 벨루오리존치 |
국적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키 172cm |
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2], 공격수[3] / 은퇴) 의사 |
소속팀 | 아메리카 미네이루 (1962~1963) 크루제이루 EC (1964~1971) CR 바스쿠 다 가마 (1972~1973) |
국가대표 | 54경기 32골[4] (브라질 / 1966~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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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펠레와 함께 셀레상의 3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천재 공격수. 하얀 펠레, 크루이프에 대한 남미의 대답으로 불렸으나 2번의 망막박리로 인한 시력 문제로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한 비운의 공격수이기도 하다.
2. 클럽
1962년 만 15세라는 나이에 지역 팀인 아메리카 MG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1963년까지 뛰었으며 이때의 기록은 26경기 16골. 1964년 만 17세의 나이에 자국의 명문 클럽인 크루제이루 EC로 이적한다.크루제이루에서 그는 17세부터 24세까지 총 7년을 뛰었다. 그리고 남긴 기록은 378경기 249골. 이 기록은 크루제이루 구단 통산 최다 득점이다. 보통의 선수들이라면 주전 선수로 성장할 시기에 이 양반은 세계 최고의 스타들[5]이 총 집결한 리그에서 골폭격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재적인 공격수였다. 또한 전국 리그 우승 1회와 주립 리그 우승 5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비극 역시 이 시기에 시작되고 있었다. 1969년 토스탕은 리그 경기 도중 안면에 공을 맞았고 자신을 은퇴까지 내몰 망막 박리에 시달리게 된다.
1971년에는 비록 팀은 무관이었지만 개인으로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며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를 수상한다. 1972년 바스쿠 다 가마로 이적하지만 망막 박리로 인한 시력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결국 토스탕은 1973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당시 토스탕의 나이는 26살이었다.
3. 국가대표
1966년 월드컵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고작 19살의 나이에 칠레를 상대로 데뷔했다. 1966년 월드컵 엔트리에도 포함되었으며 헝가리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펠레의 부상 아웃, 가린샤를 비롯한 전체적인 선수진의 노쇠화 등 안팎으로 많은 문제를 겪으며 조별리그 광탈.4년 뒤에 열린 1970 멕시코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며 11번 호베르투 히벨리누, 10번 펠레, 7번 자이르지뉴와 함께 공격진을 구성하여 9번 최전방 센터 포워드 위치에서 폴스 나인으로 뛰었고 '황제' 펠레를 보좌하는 '황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6경기 모두 선발 출장했으며 8강전 페루를 상대로 멀티골을 기록했다. 이후 4강에서 우루과이를 격파했고,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리하여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후 펠레의 뒤를 이을 차세대 브라질의 에이스로 각광받았으나, 앞서 언급한 망막박리라는 건강 문제로 26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되고 브라질은 이전과 같은 파괴력을 보이지 못하며 1974 월드컵에서 부진하게 된다.
4. 플레이 스타일
천부적인 골 결정력을 비롯해 뛰어난 패스 역시 보유한 최정상급의 골잡이이자 플레이메이커로 펠레의 뒤를 이어 1970년대의 브라질 대표팀을 이끌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펠레가 국가대표를 은퇴하고 그의 뒤를 이을 토스탕마저 앞서 언급한 망막박리로 은퇴하자 마땅한 공격수 및 플레이메이커가 없었던 브라질 대표팀은 자이르지뉴와 호베르투 히벨리누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