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CA (Amateur Comics Association)
전국만화동아리연합회 ACA (Amateur Comics Association)는 1989년 6월 25일 창단되었다.[1] 최초의 아마추어 만화 동호회 연합체는 아니지만, 미르기닷컴에 의하면 1982년에 창설되어 1983년 해체된 KWAC(Korea Woman Amateur Comics)를 최초로 꼽고 있다.그동안 아마추어 만화계는 백화점등에서의 만화전시회와 PAC,아람,KGB, 제로 등의 여러 동인지들의 합동지 크레파스를 발간하는 소규모 연합이 있었으며, 만화잡지 르네상스가 출간되기 이전부터 크레파스 만화 전시회를 당시 반포의 뉴코아백화점 등에서 열었었다. 외부(상업)와의 창구를 위해서 많은 수의 동인들이 모여서 창립했다. 모임을 주최한 사람은 만화동호회 우리마을의 김정미씨이며, 초대임원은 권선이, 민규하(ACA이름의 제안자)등이 있었다.
아마추어 만화가분이 운영하시던 홍대 앞 만화 카페[2]에 '크레파스' 회지가 다수 비치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한 연합체이다.
ACA는 아마추어 만화작가들 간의 '친목회'로 시작되었다. ACA 이전에도 국민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운동회를 열기도 하는 등 매우 소박한 규모였던 듯. 회지도 인쇄소가 아니라 동네 문방구에서 10여부씩 복사해서 서로 돌려보는 곳도 있었으나 곧 을지로의 인쇄골목에서 마스터인쇄를 깔끔하게 인쇄하는 곳들을 찾아나서면서 인쇄의 질을 높였다. 그러다가 차차 정기적인 모임과 전시회를 갖게 되면서 연합체로서의 기능이 필요하다 느낀 당시 우리마을의 김정미씨가 개인적으로 사업자등록을 하며 정식으로 사업체로서 ACA를 출범시켰다. 동호회 간의 연락을 위해 광화문 우체국 사서함 1454호를 개설하여 관리하였으며 이후 소식지인 만화City 등을 발간하였다.
첫 회지 판매전은 1991년 6월 30일이었다. 초기의 행사는 회지 판매보다는 오히려 일러스트 전시회가 메인이었다. 주로 행사를 하던 대학로 디자인 포장센터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공간은 전시에 활용되고 그 옆방에서 조촐하게 몇 권의 동인지를 판매하거나 교환하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뒷풀이와 팀간의 친목을 행사 자체보다도 더 중시했다. 인터넷은 커녕 PC 통신도 시작될까 말까 하던 시절이라, ACA가 그야말로 아마추어 만화가들간의 유일한 교류 채널이었기 때문이다.[3] 대학로 호프집을 통째로 빌려서 밤늦게까지 만화 이야기를 하고, 홍대앞 백스테이지에 같이 음악을 들으러 가기도 하고, 카페를 빌려 여러
초기에는 철저히 1차 창작 위주였고, 데뷔를 목표로 함께 실력을 갈고닦거나 출판시장에서는 내놓기 힘든 실험적인 작품을 다루는 것이 아마추어 동인지의 존재 가치였다. 이러한 동인 정신은 이미 데뷔한 프로 작가(황미나, 김혜린, 신일숙, 황선나, 김진, 이정애, 서정희, 유승희, 이명신 등)들이 만든 동인 '나인'에서 80년대 출간한 '아홉번째 신화'라는 동인지와도 이어진다. 이외에도 문제작 만화가 최지룡이 93년경 '이상한'이라는 필명으로 1차 동인지를 자비출판했다는 전설도 있다. '나인'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때의 동인지라는 개념은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2차 창작이나 BL을 비롯한 성적 소비의 뉘앙스보다는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말 그대로 '문인들의 동인지'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인 정신은 이후 홍대 앞 만화그룹들의 실험적 동인지나 펜팬[4][5] 등의 예술만화 잡지로 이어졌다.
유명한 동인으로는 PAC, 결, 나르시스, ART, 누리, 아람, 아크, KGB, 이즘, 이슈, 미클 미에즈마,XENOS 등이 있었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존잘러'급인 스타들도 존재했다. 90년대 순정만화작가 제 3세대는 거의 전부가 ACA에서 활동하다가 데뷔했다. 예를 들면 PAC(Pure Aspiration for Comics)는 강경옥이 초대회장이었고 멤버였던 김준범, 권선이, 나예리, 박희정, 유시진, 이강주, 이태행 전원이 나중에 메이저로 데뷔한 전설적인 동인이다. 이 외에도 강모림, 강현준, 김나경, 김미경, 김미영 김은주, 김은희, 권교정, 진서하,문계주, 문뚜, 이영유, 이명진, 이빈, 서현아, 심혜진, 유현, 윤미경, 이유정, 이진경 ,이향우 등, 그중에서도 몇몇은 이름만 들만하면 알만한 일부 참여진들 역시 ACA 출신이다. 90년대에 순정만화가로 데뷔하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문하생 생활을 하다가 대본소에 책을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메이저 잡지의 공모전에 단편이 당선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인 잡지 공모전은 대부분의 경우 ACA 출신들이 휩쓸었다.
처음에는 상호교류와 창조적 실험을 중시했던 ACA도 차차 행사가 정기적으로 개최되면서 부수가 늘고 돈은 돌고 경쟁은 생기고... 하면서 '판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 또한 차차 아이노쿠사비, 절애, 베니스에서 죽다 등의 영향으로 BL (당시에는 주로 'Y물'이라고 불렸다)이 유행하면서 성애에 초점을 맞춘 1차 창작이나 은하영웅전설 등의 2차 창작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와 함께 동인지에 삽화를 곁들인 소설을 포함하기 시작했고, 국내 최초의 순수 BL 소설 동인지인 삼인칭의 네버랜드가 ACA에서 최초로 선을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와 함께 진행된 상업화인데, 지나치게 BL 소설 쪽으로 판매부수가 쏠리게 된 것이다. [6] 이에 따라 소설 동인이 급격히 늘어나고 기존에 만화를 그리던 작가들도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만화 동인 연합'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이러한 갈등이 발생하자 각 동인에서 대표자 1명씩이 참석한 전체 투표를 거쳐 ACA에서 소설동인을 분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때 분리되어 나간 소설 동인들이 이후 최초의 BL소설 동인 온리전 블랙체리와 게토를 만들었고, 블랙체리와 게토는 BNB로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2000년 이전의 ACA에 대한 설명이다. 이후는 아래와 같이 코믹 "끼" 페스티벌과 합쳐지며 행사 중심으로 가다가, 코믹월드와의 경쟁 속에 쇠락한 듯 하다. 극도로 상업화된 코믹월드에 대항해 순수 창작을 지향하는 '동인 정신'은 이후 2008년 서드플레이스 (3rd Place)로 이어진다.
2. ACA 동인 행사
동인행사로서의 ACA만 해도 코믹월드보다 먼젓대의 동인 행사로 1년 2번씩 열었으며 지금의 서드플레이스처럼 동인들이 모여서 만든 행사로 원래 처음에는 코믹 "끼"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전국만화동아리연합회의 명칭이 아카(ACA)였기 때문에 아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며 결국엔 ACA 전국만화동아리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된다.소설 회지는 금지되어 있었으며 우리가 알고있는 형식의 만화 행사로는 우리 나라 최초의 애니 행사로 알려져 있었지만 코믹월드가 등장하면서 쇠퇴하게 되고[7] 부천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면서 부천의 만화 축제 등과 연계해서 열리는 등 후반에는 야외행사로 많이 열렸다.
충무로에 사무실이 있는 듯 하나, 홈페이지는 열리지도 않고 설상가상으로 도메인마저 만료되었기 때문에 26회 판매전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망했다.
[1] 출처는 미르기닷컴[2] 만화동인 우리마을에서 활동하던 이미란씨의 카페로 많은 아마만화인들의 소규모 전시회나 행사가 개최되었다.[3] 변변한 만화창작도서 하나 없던 시절이라, 펜촉의 종류나 스크린톤을 구매하는 경로, 톤을 깎는 방법 등 만화 그리는 법 전반을 ACA에서 선배들 어깨너머로 배웠다.[4] PenFan이라고 하면, 한때 나코오빠가 소속된 적이 있던 서클이었다.[5] ACA의 PenFan은 1994년 정식 출판되어 서점에서 유통되었던 실험적 만화잡지인데 동명이서(?)인 듯 싶다. 아무튼 정보 추가 감사.[6] 이 저변에는 (
지금도 별 차이는 없지만) 당시 동인층의 대부분이 여성층이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 모에물이나 본격적인 미소녀물이 국내에서 대두되기전,(남성향 모에물이 한국 동인계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시기는 이르게 잡아야 1997년 전후로 추정.) 만화를 그리는 청년층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았다. 그리고 여성층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Y물에 눈을 뜬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후배에게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이쪽 길에 투신했다(..)[7] 아예 코믹월드가 ACA의 쇠락을 부추겼다는 이야기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