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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22:36:44

POCKET MUSIC

1. 개요2. 수록곡
2.1. SIDE A2.2. SIDE B
3. 기타

1. 개요

파일:Pocket music.jpg

LP : 1986년 4월 23일 발매[1]
CD : 1986년 5월 10일 발매[2]

야마시타 타츠로의 8번째 스튜디오 앨범. 야마시타의 앨범들 중에서 BIG WAVE 이후의 앨범들은 그 주목도가 다소 덜한 편인데, 계약 문제인지, 야마시타 본인의 의사인지 BIG WAVE 앨범 이후로는, 리마스터링이나 리이슈가 된 앨범들이 없다.[3] 그래서 본 앨범과 더불어 僕の中の少年 앨범의 LP버전은 레코드 시장에서도 비교적 BIG WAVE 이전 앨범들에 비하면 매물들이 대체로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앨범은 제작당시에는 아날로그 장비에서 디지털 장비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1980년대 중반의 레코딩 환경은 기존의 2인치 테이프를 사용하는 아날로그 24트랙 멀티트랙 레코더에서, 디지털 멀티채널 레코더를 사용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었다. 또, 시퀀서가 SMPTE타임코드에 의한 동기 아래, 미디컨트롤에 의해 폴리포닉한 자동연주가 가능하게끔 진화해, 실용음악 제작 현장에 두고 사용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야마시타 주변에 있어서도, DASH포맷의 24채널 디지털 멀티레코더인 SONY PCM-3324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레코딩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디지털 음원이 넓은 다이나믹레인지를 최대한 활용하는데 가장 중점을 뒀던 시절이어서, 그 결과 이른바 음압이 낮아, 힘빠진 사운드가 되버려서, 많은 뮤지션이, 기존의 아날로그 레코딩 사이의 위화감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또, 당시의 디지털 장비에 탑재된 아날로그<->디지털 컨버터의 성능이 구려서 링잉[4]이 발생함에 따라, 수록한 음이 저질 음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런 상황 속에서, 디지털 장비를 활용해서 크게 성공한 음악은, 딱딱한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힙합과, 디지털 신스와 샘플러의 사운드를 음상 내에 배치한 음악[5]이었지만, 어느 쪽도 거기까지 야마시타가 제작해온 음악과는 취향이 상당히 달라서, 야마시타 자신도 '힙합같이 아무리 디지털한 곡'을 만들면, 지금까지 해온 사람들에게 필적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야마시타 자신은 이때까지 음악제작 스타일이 전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끼고, 한때는 디지털 장비로의 이행을 포기하고, 잠시 동안은 시장에 나돌 법한 아날로그 장비를 가능한한 사들여서 보존하는 것을 검토했다. 하지만, 음악시장이 전면적으로 디지털 전제의 시스템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단 점을 고려해 야마시타 본인도 시류를 거스르지 않고, 디지털 장비로의 이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속에서, 본 앨범은, 야마시타의 디스코그래피에 있어서도 극히 실험적인 색체가 강한 물건으로서 제작되었다. 야마시타는 당시 '이건 시제품이다.' 라고 이야기했고, 디지털한 환경과 스스로의 음악 사이의 위화감에 대해, 야마시타는 후속작 僕の中の少年까지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된다.

또, 기용한 뮤지션이 커리어가 쌓여, 다른 뮤지션의 레코딩 라이브 투어 등에 캐스팅될 기회가 늘어서, 이제까지의 연습 스튜디오에 세션을 모아서 리듬패턴을 연습해, 레코딩 스튜디오에 가져가서 녹음하는 제작방법이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도 방해요소가 되었다. 이 앨범 이후, 야마시타는 스스로의 연주와 때려박는 다중녹음을 음악제작의 중심으로 삼게 되었다.

또, 본 앨범은 당초 1985년 발매예정이었지만, 야마시타 자신의 제작환경으로서도, Roland의 MC-4[6]부터, NEC PC-8801+Roland MPU-401+Roland MIF-PC8+Roland MCP-PC8 / MRC-PC8의 시스템을 거쳐, PC 9801+커먼뮤직 RCP-PC98에 이르는 과도기를 거쳐, 막대한 시행착오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 앨범의 제작 이전에 사용된 PC-8801을 베이스로 한 시스템에서는 소리가 나는 타이밍에 관한 충분한 디테일을 얻을 수 없었고, 소리가 나는 타이밍의 미묘한 움직임으로 인해 생기는 인간적인 느낌을 재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매를 연기하게 된다. 그 결과 앨범 릴리즈에 맞춰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 투어 'PERFORMANCE '85-'86'도 연기되어, 이듬해 투어 타이틀을 'PERFORMANCE '86'으로 개칭하여 86년 5월에 개최하였다.

2. 수록곡

2.1. SIDE A

2.2. SIDE B

3. 기타

초판 발매 당시에는 첫 디지털 레코딩 작업이어서 트랙다운 등이 야마시타 본인에게 있어서는 심하게 불만이었던 탓에, 본인 감수하에 요시다 타모츠에 의한 리믹스가[12] 진행되어 보너스 트랙으로 'MY BABY QUEEN'을 추가한 뉴 리믹스반이 91년에 재발매되었다.


[1] 이후 2020년 11월 25일에 僕の中の少年앨범과 함께 리마스터링 하여 180g 중량반 2LP 사양으로 재발매되었다.[2] 이후 1999년에 재발매되었으며, 2020년 11월 25일에 僕の中の少年앨범과 함께 리마스터링 하여 재발매되었다.[3] 일설에 따르면, 야마시타 본인이 아무리 해도 그 때 그 시절의 사운드가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다는 이유로 여러 번 재판 제의가 들어왔지만, 번번이 거절했다고 한다.[4] 원래 파형에는 없는 고주파[5] 당시의 야마시타는 그 예로서 스크리티 폴리티의 이름을 자주 거론했다.[6] '風の回廊'의 시퀀스는 당초 이걸로 진행하고 있었다.[7] 85년과 86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그 이전에도 야마시타의 곡인 パレ?ド도 83년에 사용된 바 있다.[8] 7인치 도넛판으로 발매되는 싱글의 B면에 수록된 곡.[9] 워싱턴 포스트의 외교기자 도널드 오버도퍼에 의하면 83년 1월에 워싱턴 포스트 회장 캐서린 그레이엄 회장 자택에서 진행된 아침 식사자리에서, 오버도퍼의 질문에 대해 나카소네 수상이, '일본 방위의 컨셉들 중에는 해협과 해상교통 문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열도의 상공을 커버해 소련의 백파이어 폭격기의 침입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백파이어의 성능은 강력하고, 만약 이것이 유사시에 일본열도와 태평양 상공에서 세력을 발휘한다면 일본과 미국의 방위협력체제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일 유사시에는 일본 열도를 적 항공기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게끔 주변에 높은 벽을 친 선박처럼 만든다.'고 대답을 한 것을 통역사가 'Unsinkable Aircraft Carrier' 즉, '불침공모'라고 의역했다. 훗날 오버도퍼가 나카소네의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녹음테이프를 다시 확인했지만, '불침공모'라는 단어는 없었다. 사용한 말은 '커다란 배'였다고 한다. 하지만, 2017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본의 외무성이 공개한 외교문서에는 1983년의 인터뷰에서 나카소네가 확실히 일본 열도에 대해서 '불침공모처럼 강력히 방위한다.'고 말한 사실이 밝혀졌다.[10] 재일교포 2세 작사가. 참고로 이 곡이 데뷔작이며, 주로 작곡가 하야시 테츠지와 작사작곡 콤비로 다수의 히트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森田 記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는듯.[11] 吉田 保. 야마시타 타츠로의 앨범에 상당히 오랫동안 참여한 사운드 엔지니어이며, 야마시타 타츠로의 커리어 초반에 작사 겸 코러스로 상당부분 참여한 요시다 미나코의 오빠이기도 하다.[12] 사실 말이 리믹스지, 곡의 템포를 조금 조절한다거나 곡의 길이조절이나, 세션이 한두개 추가되거나 빠지는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