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LP, CD : 1988년 10월 19일 발매.[1]
야마시타 타츠로의 통산 9번째 스튜디오 앨범.
2. 상세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레코딩 장비의 변화에 대한 대응은 전작 POCKET MUSIC 완성 후에도 해결되지 않는 과제였다. 디지털로 바뀌어감에 따라 녹음 해상도가 급격히 향상됐기 때문에, 아날로그 마스터테이프 녹음을 두고 구축해온 방법론이 전혀 통용되지 않았고, 앞으로는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한번은 디지털녹음을 내버려두고 아날로그 녹음으로 돌아가는 것까지도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아날로그 16트랙의 멀티트랙 레코더를 스튜디오에 들이고, 몇몇 곡에서는 레코딩에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컨템포러리한 음악을 제작했을 때, 그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최신 기술로 제작한다는 야마시타 자신의 신조와 상반되어서, 완전히 아날로그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 때, 마스터링 레코더로 사용하던 SONY의 PCM-1610이 PCM-1630으로 업그레이드되어서 음질이 향상되었다. 이로인해, 야마시타가 느끼던 디지털 레코딩에서의 위화감이 상당 부분 해소되어, 야마시타는 아날로그로 녹음하던 곡들을 디지털 장비를 이용하여 다시 레코딩하여 본작을 발매하기에 이르렀다.이렇게 개고생한 작품이 된 배경에는 음악 제작뿐만 아닌, 앨범의 제작 방침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타케우치 마리야의 REQUEST[2]는 이상하게 작가주의적 앨범이어서, 그런 스타일은 즐기면서 할 수 있으니, 오히려 만들기 쉽다. 그래도, POCKET MUSIC과 이 앨범은,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랄까 사상적인 부분을 퍼뜨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만큼 고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POCKET MUSIC에서 싱어송라이터스럽다고 할까, 내성적인 방향으로 간 거 같지만, 악곡 주체의 작가적인 앨범이 훨씬 만들기 쉽다. 그래서 앨범 편곡에는 헤드 어레인지[3]가 많아서 뮤지션의 연주에 의존한 부분도 상당히 많아. 하지만, 내 앨범의 경우에는 내 나름의 편곡 의도가 있었는데, 거기서 내가 가진 느낌을 내려고 했으니, 사운드메이킹에 미묘한 뉘앙스가 요구됐어. 근데, 그런 뉘앙스가 디지털 레코딩으로 바뀌니 어째 잘 안 나와버리더라고.' 라고 회상한다.
앨범 타이틀이었던 '僕の中の少年(내 안의 소년)'은 딱 첫째 딸이 태어날 즈음에 만들어진 곡이어서, '레코딩 전부터 타이틀로 정해진 건 이 앨범과 POCKET MUSIC 정도.'라고 앨범제작 구상단계에서 이미 이 테마와 타이틀로 가기로 정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있어서 아이의 탄생은 개인적인 요소로서 매우 컸고, 그런 의미에서도 '싱어송라이터에 의한 컨셉 앨범같은 작품.'이라며, '내가 이런 컨셉 앨범을 만들 때, 항상 기억하고 있던 건, 리차드 해리스의 A Tramp Shining과, 무디 블루스의 Days of Future Passed같은 거야. 나는 그런 앨범을 항상 달고 살았기 때문에 컨셉 앨범이란거에 대한 로망을 갖고있어. 일본에서는 안먹히지만서도.' 라고 이야기한다. 다만, 본인의 제작의도와는 반대로 당시 스태프들은 '여름이다, 바다다, 타츠로다~'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원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았다. 30대 중반을 맞이한 시기에, 스태프가 강하게 밀어붙인 선행 싱글 '踊ろよ、フィッシュ'의 부진, 그리고 스태프로부터 '슬슬 한물 가려고 하니, 리스크가 있다.'고 말한 'ゲット・バック・イン・ラブ'의 히트. 그리고, 내 자신 안의 어른과 아이, 그리고 여러가지가 섞여 이 앨범에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주위로부터 인기도 한물 갔다고 느꼈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이럴 때 이런 앨범을 만들어서, 어느 정도 체면치레나 하면 돼.'라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의 야마시타는 컨디션이나 인간관계, 뮤지션 초이스 등, 이 앨범을 발매한 후 라이브 투어인 PERFORMANCE 88-89때에는 연주에 항상 불만족스러웠고, 슈가 베이브 이후로 예민한 정신상태에서 투어 일정을 소화했는데, 아예 녹초가 되어버렸다고 회상한다. '앞으로는 조금 더 쉬지 않으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ARTISAN[4] 에서 컨셉을 바꿔, 좀 더 작가주의, 악곡주의로 가자'며, 당시의 장비 및 성능문제와 자신의 건강상의 문제에서 고생도 적잖았지만, 작품 자체의 불만은 없다며, '이제는 너무 성숙해졌고, 이런 앨범은 두 번 다시 못 만들거야.'라고 언급한다. '또 생각이 드는건, 히트만을 노려서 만든 음악은 결국엔 안되잖아. 히트 차트에 대한 마음 속 어딘가에서 물음표랄까, 단순히 소비되는 거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으면 결국에는 안된다는 사실을 10년 후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라고 새삼스레 깨달았다고 한다.
본 앨범은 FOR YOU에 비교하면 인지도는 낮지만, 팬클럽에서 좋아하는 앨범의 앙케이트 1위를 차지해, 특히 앨범 발매당시의 20대 초반이었던 팬들의 지지도가 높다고 한다.
3. 수록곡
3.1. SIDE A
- 1. 新(ネオ)・東京ラプソディー(네오 도쿄 랩소디)
본래는 POCKET MUSIC에서 나가리 된 곡. 프레디 허버드의 앨범을 듣고 플루겔 호른이 들어간 곡을 만들려고 했지만, 도중에 하모니카도 추가하기로 했다고 한다. '가사가 떠오르질 않아서, 더운 여름날, 수도고속도로 도심환상선을 두바퀴나 돌아서 떠올려내, 메구로선의 텐겐지로 빠져서 아리스가와공원에 차를 세워두고 아웃라인을 쓰고 집에 돌아가서 다듬었다.'고 한다. 또 곡의 제목을 정할 때, '도쿄 랩소디'라는 곡의 한 소절을 이 곡의 마지막에 넣으려고 했지만,[5] 저작권법 확립 전인 1936년[6]에 발매된 곡이라서, 후지야마 측에서 고액의 로열티를 요구하는 바람에, 한때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앨범이 제작될 즈음에는, 비디오와 상영회를 다니거나 전전 일본영화를 많이 보던 시기라서, 거기서부터 생겨난 쇼와 초기의 문화에 대한 동경과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과 빗대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후에 1991년 리마스터링 재판 버전에서는 다른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 2. ゲット・バック・イン・ラブ -Get Back In Love-
원래는 스즈키 마사유키[7]의 앨범 'Radio Days'를 작업할 당시에 쓴 곡. 하지만, 스즈키의 담당 디렉터로부터, '이건 직접 하시는게 낫겠네요.'라는 이야길 듣고 걍 야마시타 본인이 직접 썼다고 한다.[8] 야마시타 본인에 의하면, 당초 주위의 스태프는 발라드 넘버 싱글컷에 난색을 표했지만, '이제 34살이니까, 발라드밖에 히트 칠 게 없다.'며 밀어붙였는데, 때마침 타이밍 좋게 사무소 사장이었던 코스기 류조가 드라마 타이업 건수를 물고 왔다. 빡세게 기합 넣고 만든 만큼, 편곡, 오케스트라 모두 만족스럽게 만들어졌다. '내 노래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곡.'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앨범 내에서 가지는 위치에 대해서는 '상업적으로는 이 노래 때문이라고 해도 되겠지. 앨범 전체에서는 쏘쏘이지만, 이 베스트 텐 싱글이 들어있는 덕분에 어떻게든 성립되었다고나 할까.'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싱글과는 다르게 앨범에 수록할 당시에 다시 레코딩했다고 한다.
- 3. The Girl In White -ザ・ガール・イン・ホワイト-
산토리 화이트의 CM송으로 오퍼를 받아서 쓰게 된 곡. 당시 산토리 화이트의 CM에는 1970년대의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를 필두로 한 흑인 뮤지션이 출연하고 있었지만, 산토리의 스태프로부터 '흑인 아카펠라를 섭외하고 싶은데, 현역 그룹들 중에 괜찮은 그룹이 없냐'는 주문에 '현역 그룹이라면 펄스에이션[9] 14캐럿 소울 정도밖에 없지 않나?' 라고 대답했고, 나중에 14캐럿 소울로부터 OK가 떨어져서 그런 김에 곡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만들어졌다. 영어 가사는 역시나 앨런 오데이. Girl In White라는 카피는 원래부터 산토리 광고부 측에서 만들어졌고, 14캐럿 소울의 싱글도 발매되어, 앨범에도 수록되었다.
- 4. 寒い夏(추운 여름)
'지미 웹같은 곡(극단적으로 올라가는 전조를 전면에 내세운 곡)을 쓰려고 했는데, 막상 곡을 만들기 시작하니 삘이 안왔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리듬은 전부 야마시타에 의한 연주이지만, 템포가 처지기 때문에, 믹스 당시에는 테이프 스피드를 약간 올렸다. 스트링 어레인지는 핫토리 카츠히사(服部克久). 가사 쓰는데 고생하다 결국, 타케우치 마리야에게 의뢰하게 되었고, 곡 자체도 맘에 들어한다고 한다.
- 5. 踊ろよ、フィッシュ(춤춰라, 물고기야)
ANA의 오키나와 캠페인의 이미지 송으로 만들어진 곡. 일련의 여름노선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곡. '야마시타 타츠로의 여름 히트송을 되살린다.'는, 스태프 14~5명의 프로젝트 팀의 계획에서 먼저 '踊ろよ、フィッシュ'라는 타이틀이 결정되었고, 대리점에서 OK를 받았다고 한다. 전조와 세세한 멜로디 부분의 코드 프로그레션의 센스는 상당히 떫떠름하게 짜여 있어서, '곡 자체는 싫지 않지만 어쨌든 그 당시의 나는 이런 느낌의 곡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라고 이야기한다. 그 결과, CM 자체로서나 마케팅 부분도 이상하고 온에어 횟수도 늘지 않아서, 싱글도 히트쳤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결과로 이어졌다. 야마시타는 당시의 심경을 '스태프들은 어떻게든 이 곡을 히트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나 혼자서만 묘하게 시큰둥했다.'고 이야기한다. 오리지널 싱글 버전은 너무 에코가 껴 있어서, 좋아하진 않았지만, 앨범 버전에서는 에코를 좀 줄여서 음압을 올렸지만, 후에 TREASURES 앨범 제작과정에서 에코 문제는 이때의 마스터링이 원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앨범 수록 당시 가사가 일부 변경되어 있다.
3.2. SIDE B
- 1. ルミネッセンス -Luminescence-
곡의 개요에 대해서는 "이 앨범은 아날로그 음반으로 치면, '밝은 A사이드, 블록버스터 B사이드'라는 느낌으로, 이 곡은 B면의 첫 곡이지만, 나 스스로가 좋아하는 한 곡이야. 다만, 만약 지금 이 곡을 만든다면, 더 사운드 소스를 줄이겠지만,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스타일이랄까, 이런 원코드로 동기화된 훵크를 해보고 싶어서."라고 말하고 있다. 가사에 대해서는 "이 곡도 가사가 어려웠어. 이건 별의 노래지만, 밤늦게 레코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개를 산책시켰어. 새벽 3,4시쯤에 개를 산책시키고 있자니, 여름인데도 오리온자리가 보여서 놀랬어. 겨울 별자리가 여름에 보이다니...싶었지만서도 잘 생각해보면 여름이니 겨울이니 하는 건, 밤 7시나 8시에 보이는 별자리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는것 뿐이잖아. 좋아, 오리온자리가 나오는 노래를 만들자, 라고 생각했어. 가사는 매우 추상적이다."이라고 이야기한다. 곡에 관해서는, 음을 너무 집어넣어서 자책하고 있다. 또한, 이 곡을 믹스다운할 때에는, 통신판매로 구입한 플라네타리움 장난감을 스튜디오에 가져와 천장에 별을 비추며 작업했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 2. マーマレイド・グッドバイ -Marmalade Goodbye-
1988년 혼다 인테그라의 TVCM을 위해서 만든 곡으로, 동 모델의 CM송으로서는, '風の回廊(コリドー)', '僕の中の少年', 'FIRST LUCK'에 이은 4번째라고 한다. 곡의 개요에 대해서는 "이 때는 이런 느낌의 16비트 곡에 심취해 있었어. 가사는 흔치않게 데모테이프 단계에서 완성되어서, 싱글 발매이야기도 나왔었지만, 'ゲット・バック・イン・ラブ'가 잘 나가서, 이만하면 됐어 식으로 얘기가 끝났어. 가사는 잭 니콜슨 주연의 Five Easy Pieces[10]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 일종의 철새 노동자 노래[11] 랄까.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땅도 좁고, 서구권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기엔 너무 진부한 소재야. 있지도 않은 하이웨이와 로드를 부를 수도 없고, 그것도 아닌 마음 속에서의 철새 노동자 노래랄까. 즉 한 곳에서 안주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동서양을 불문한 다 같은 심정을 그린 곡을 만들고 싶었어. 일본에서는 정신적인 면에서의 호보는 미국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해. 예를 들면 마츠오 바쇼와 타네야마 산토카 같은 이들이 그래서, 그런 심적 방랑을 원하는 인간의 노래를 쓰자고 생각했어." 라고 이야기한다. 가사 완성에 대해서는 만족하며, 특히 2절의 가사는 야마시타 자신의 캐릭터가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다만, 이 곡은 라이브에서는 그런 그루브가 안나와서, 투어 용으로 몇 번 편곡을 도전해봤지만, 결국 접었다고 한다. 본 앨범 수록곡 중 몇 곡은 당초에 아날로그 레코딩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곡이 그 중 하나. 수록된 테이크는 디지털 레코딩으로 다시 수록했지만, 후치노 시게오의 색소폰 솔로는 아날로그 레코딩 버전이 맘에 들어서 이 솔로연주만 그대로 디지털로 옮겨졌다고 한다.
- 3. 蒼氓(そうぼう, 창맹)[12]
야마시타 본인에 의하면, "80년대 전후에 LA에 자주 갔었는데 KJLH라는 FM 방송국이 있어서, LA에 갔을 때 매일 라디오 카세트로 그 방송을 녹음했어. 그리고 일본에 돌아와서 그 테이프를 들으니 좋은 곡이 있었어. 근데 그 곡의 소개가 녹음되질 않아서 누가 불렀는지 무슨 제목인지 전혀 몰랐어. 결국 테이프는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곡의 분위기가 계속 머리에 남아서 그런 느낌으로 만들어보려고 했어. 완성된 버전은 전혀 달랐지만서도."라고 말한다. 곡 제작동기는 "내 안에는 옛날부터 가스펠에 대한 동경이 꽤 있었지만, 가스펠이라는 게 종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 철새 노동자 노래와는 또 다른 정신적인 요소가 강해. 나는 10대 시절부터 미국의 음악을 들으며 자라왔지만, 미국 음악은 기독교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으니까, 라스칼즈[13]나, 커티스 메이필드[14]같은 음악에 빠져들다보니 기독교에 대해 막연한 공감같은 게 생겨서, 막말로 기독교인이 되라면 언제든 될 수 있었어." 또, 어릴 때 다니던 유치원도 카톨릭계 유치원이어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일상이었고, 부모가 맞벌이인 상황에서 주말이 되면 '성의'나 '십계'같은 기독교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여주러 데려가는 등 정말 친밀한 체험들을 기초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어른이 돼서, 가스펠을 많이 듣게 됐을 때, 당연히 그 배경에는 기독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음악이 종교적인 것을 배경으로 몇 배의 힘을 발휘해 그 힘을 생각하게 되었어. 일본에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블랙 뮤직이래도 언제나 형식을 모방하는 선에서만 끝나. 그 탓인지는 어떤지는 몰라도, 내가 아는 한 일본에서는 '가스펠을 좋아합니다.'하는 사람의 음악인데, 어딘가 배타적이랄지, 내버려두려는 냉정함을 가진 것들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 그래도 나는, 예전부터 가스펠의 본질은 포용력이라고 줄곧 생각해왔어. 그래서, 어떻게든 가스펠이 가진 기독교스러움을 모르는 누군가와 희노애락을 공유할 수 있게끔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해왔어. 이게 '蒼氓'을 만든 그럭저럭의 동기야."라고 하는 한편, 자세히 따져보면 이 곡을 만들게 된 직접적 동기로는 YMO의 등장이었다고 한다. "YMO를 둘러싼 문화인스러운 것이 일본의 대중음악을 망치지 않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했어. YMO의 음악적 측면이 아닌 문화적 측면이 주가 되어 일본 음악이 바뀌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 그래서 내가 내세운 테마가 반문화인 음악.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걸 혼자 짊어졌어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즉, 그때 나는 젊었었지. 하지만, 그때부터 점점 내 자신의 인간에 대한 견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 난 일본 영화감독은 오즈 야스지로나 야마나카 사다오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인간에 대한 시선의 차이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따뜻함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YMO 현상은 내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어."라고 회상한다. 이러한 야마시타 자신의 사상 신조의 음악적 표현 '무명성, 익명성에 의한 뜨거운 찬가.'로서, 이 곡은 하나의 도달점이었다고도 이야기한다. 곡의 엔딩에 대해서 "레코딩이 시작되고, 엔딩은 유니즌[15] 으로 부르는 라라라 합창으로 끝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럼 쿠와타 부부[16]에게 부탁해봤고, 결국 야마시타 타츠로, 타케우치 마리야와 쿠와타 케이스케, 하라 유코 부부동반으로 4명이서 부르게 된 것."이라며, "쿠와타의 순진무구하고 감정적인 노랫소리가 이 곡을 한층 더 장엄하게 만들어 줬다."고 이야기한다. 이 앨범의 발매 이후 공연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 관객들을 향해 "원래 여러분들한테 이런 부탁 안하는데, 소중한 곡이라서요."라며 떼창을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17] 그 모습은 후에 JOY 앨범에 수록되었다.
- 4. 僕の中の少年(내 안의 소년)
1986년 혼다 인테그라 CM송으로 제작되었다. 이 곡에 대해 야마시타는 "이 곡의 테마는 '내 안의 소년감성과의 결별.' 자신 안의 소년감성이 자신의 아이에게로 이어진다는 윤회의 노래야. 코드진행으로서는 흔한 스타일이지만, 편곡에 여러가지 잔재미가 있어서, 내 입으로 얘기하는거지만, 편곡으로는 매우 잘 뽑혔어. 이 곡은 작사 작곡 편곡이 다 되는 올라운드 싱어송라이터의 강점이 발휘된 곡으로, 데모 단계에서 거의 다 나왔어. 어떤 의미에서는 이게 가장 스펙터클 지향으로 더욱이 가사는 상징적이게 되었어. 난해한 가사라고들 하지만서도, 요즘 들어서는 가사에 확실한 의미만을 추구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트렌드야. 가사는 회화 정도까지 알 필요는 없다니까. 그 밖에는 기발한 어휘만이 전부야."라고 이야기한다. 엔딩에서는 "라스칼즈의 'Once Upon A Dream', 비치 보이스의 Pet Sounds 같이 엔딩이 이상한 앨범같은 느낌으로 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드럼은 "컴퓨터 연주에서 리얼함을 재연해보고 싶었다."며 당시 샘플러의 성능에서 한계를 느끼던 와중에 자신의 드럼을 좌우 강약 5단계로 샘플링하고, 3일에 걸쳐서 드럼 패턴을 찍어냈다. "어처구니없는 시퀀싱 방법."이라며 회상하면서도 "그 때 아니면 다신 못할 이상한 음색감이 생겨서, 곡에 잘 들어맞는다."고 한다.
[1] 이후 CD는 91년에 다시한번 리마스터링되어 발매되었으며, 2020년 11월 25일 POCKET MUSIC 앨범과 함께 리마스터링되어 LP는 2LP 180g 중량반 사양으로, CD와 같이 재발매되었다.[2] 그녀의 7번째 정규앨범이다.[3] 뮤지션들 사이의 간단한 구두타협으로만 이루어진 편곡.[4] 이 앨범의 후속작이다. POCKET MUSIC 앨범부터, 이 앨범과 ARTISAN까지 해서 컨셉 앨범 3부작으로 구분된다.[5] '도쿄 랩소디'라는 제목의 곡 자체가 원래는, 후지야마 이치로 (藤山一郎)라는 가수가 1936년에 발매한 싱글이다.[6] 참고로 일본의 저작권법은 1970년 (쇼와 45년)에 제정되었다.[7] 일본 알엔비의 대부로 불리며, '마티니'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시종일관 선글래스를 쓰고 다니는 것이 특징이다.[8] 걍 뺀찌먹었단 이야기.[9] Persuasions. 60년대 중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아카펠라 그룹.[10] 국내에서는 '잃어버린 전주곡'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11] 원문에서는 'Hobo Song'이라고 적혀 있는데, 호보란, 미국의 19세기~20세기 초 불경기 시절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일하던 철새 노동자들을 일컫는 말이다.[12] 2016년 용과 같이 6의 메인 테마곡으로 쓰였는데, 용과 같이 시리즈의 메인 프로듀서인 나고시 토시히로 프로듀서의 인터뷰에 의하면, 과거에도 야마시타의 곡을 쓰려고 부탁해봤으나 거절당했다가 용과 같이 6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적극적으로 어필해서 OK를 받아냈다고 한다. 애초에 노래의 제작배경을 생각해보면, 야쿠자 게임과 쉽게 어울릴 수가 없다.[13] The Rascals. 미국의 블루아이드소울 그룹. 65년부터 72년까지 활동했다.[14] Curtis Mayfield. 1942~1999. 미국의 레전드 소울 뮤지션, 그의 히트곡 중 Move On Up의 경우는 저스트 블레이즈에 의해 칸예 웨스트의 Touch The Sky로 샘플링되었다. 이 외에도 Superfly같은 커티스의 히트곡들이 후대 힙합 뮤지션들에 의해 샘플링으로 자주 쓰였다.[15] 사전적 의미로는 제주, 제창으로서 같은 높이의 음을 옥타브에 상관없이 다중으로 연주하거나 부르는 것.[16] 당연하겠지만, 사잔 올 스타즈의 쿠와타 케이스케와 하라 유코 부부를 이야기하는 것.[17] 뮤지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야마시타 타츠로는 떼창문화에 상당히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