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Normandie[1]
1. 개요
SS 노르망디는 프랑스의 Companynie Générale Transatlantique (CGT)를 위해 프랑스의 생나제르(Saint-Nazaire)에서 건조된 프랑스의 대서양 정기 여객선이였다. 1935년에 최대 4.14일 동안 대서양을 건너 가장 크고 가장 빠른 여객선으로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건조된 가장 강력한 증기 전기 추진 여객선으로 남아있다.참신한 디자인과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통해 유명세를 얻었고 특히 내부의 넓은 공간은 식당으로 사용하다 테이블과 의자를 치우면 무도회를 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상업적인 성공을 하지는 못했고, 정부의 보조금 운영에 부분적으로 의존했다.
CGT의 '플래그십'으로서 운항하는 동안, 고향 르아브르에서 뉴욕까지 139개의 대서양 횡단항로를 만들었다. 또한 SS 노르망디는 운항기간 동안 여러 시점에서 가장 빠른 대서양 횡단으로 블루리본을 여러번 쟁취하였다. 이 기간동안 RMS 퀸 메리가 주요 라이벌이었다.
2. 제원
선적: 프랑스모항: 노르망디
소유주: Compagnie Générale Transatlantique[2]
- 제원:
전장 313.6m(전체), 293.2m(흘수선)
전폭: 35.9m
흘수선: 11.2m(만재)
전고: 56.1m - 배수량:
79,280톤(GRT, 1935~1936)
83,423톤(GRT, 1936년~이후) - 최고 속도: 29.5노트(계획), 32.2노트(실제)
- 층수: 12개
- 선실 수
- 1st-class(1등실) 416
- 2nd-class(2등실) 162
- 3rd-class(3등실) 269
- cabin area(전용실, 갑판실 등) 40
3. 건조
노르망디는 1932년에 진수, 1935년에 건조되어 항해를 시작하였다. 선박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초기 형태의 레이더가 장착되었으며, 최대 32.2노트의 속도를 낼수 있었다. 1,972명의 승객과 1,345명의 승조원을 태울수 있었다.4. 특징
노르망디의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그 외에, 모두 다른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 1등실 객실. 이때문에 관광업이 정기 여객선의 주 비즈니스로 자리잡던 1930년대 중반에 저런 초호화 객실들 때문에 선내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고 무겁다며, 관광객들한테는 인기가 없었다. 그 인기는 1년 후에 완공되는 RMS 퀸 메리가 가져간다. 그 외에, 선체 중앙의 아주 커다란 직사각형의 공간이 있었다. 식당 겸 파티홀로 쓰였고, 이 넓은 공간은 뒤쪽의 극장까지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 공간은 처음에는 식당으로 쓰다가, 식사시간이 끝나면 테이블을 치우고 파티 홀로 쓰이던 그런 공간이였다. 이덕에 병력수송선으로 개조될때 이 공간을 유용하게 써먹으려고 했다고.5. 전성기와 몰락
우선적으로, 영국의 RMS 퀸 메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해도 거의 세계급으로 큰 크기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노르망디가 속도를 중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당시엔 가장 빠른 여객선이었다. 그 기록들은 RMS 퀸 메리가 완공되며 다 깨져버렸지만...이 때, 영국은 프랑스한테 화려함은 비교적 떨어지나[3], 속도로 우위를 점하는[4] 방식으로 RMS 퀸 메리를 건조하게 된다.
퀸 메리가 등장하고 난 뒤, 노르망디의 기록은 깨져버리고 말았는데 당연히 노르망디 또한 프로펠러를 새것으로 바꾸고, 진동도 최대한 억제한 뒤, 구조적으로 선미부분도 개량해서 겨우겨우 1937년 7월쯤에 블루 리본을 다시 차지하였지만... 개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노르망디만이 아니었고, 이듬해 다시 퀸 메리가 차지해버렸다. 후에 노르망디의 선장은 "다음까지는 퀸 메리한테 브라보를 보내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 둘의 경쟁은 1940년대까지 지속될 예정이었지만... 이때 2차 세계대전이 터져버리고 만다. 결국에는 노르망디는 라이벌이었던 퀸 메리와 함께 뉴욕항에 영구정박을 하게 되어버린다.
[5]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3월쯤, RMS 퀸 메리의 자매선인 RMS 퀸 엘리자베스가 뉴욕에 입항하면서 합류한다. 당시 세계에서 거대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기 여객선 세척이 한자리에 모여 발이 묶여있자, 연합군 지휘부는 자연스럽게 "이거 어차피 운항도 못하는데 병력 수송선으로 써볼까?"라는 계획을 새우게 되었고 이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세 여객선은 병력 수송선으로 개조되었다. 우선 개조를 위해서는 호화로운 장식품이나 기타 불필요한 것들, 특히 불에 타기 쉬운 소재들은 최대한 제거하고, 침대 증설 등, 최대한 많은 병력을 수용할수 있도록 개조를 하는 것이였다. 그렇게 3척 모두 개조를 시작하게 되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 때 노르망디는 라파예트라는 이름으로 개명당하고, AP-53이라는 함번도 부여받은 뒤, 병력수송선으로 개장받고 있던 중이였다. 하지만 어느 날, 병력수송선으로 개장받던 라파예트 호에서 무리한 개조공사를 진행해서인지 갑작스런 화재가 일어났다[6][7]. 화재진화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노르망디(라파예트)의 창문들로 물을 잔뜩 들이부었고, 그 결과, 배 안에는 대략 6,000톤 정도의 물이 들어가게 된다. 이 무식한 진화방법 덕에, 불길 자체는 잡았으나, 노르망디는 결국 복원력을 잃었고, 좌측 현측으로 기울어지며 화재진화선 하나를 거의 깔아뭉갤 뻔하며, 80도로 기울어지게 된다.
6. 화재 이후
SS 노르망디는 한동안 뉴욕항 88번 부두에서 전복된 상태로 있었는데, 기름도 유출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미국은 노르망디를 전쟁이 끝난 지 1년후인 1946년에 인양했다. 이때 애를 좀 먹었는데, 4년동안이나 전복된 상태로 계속 있다보니, 뻘에 어느정도 잠겨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상부구조물 윗부분(연돌도 포함)을 전부 절단한 뒤, 인양작업을 끝마쳤다고. 그렇게 인양이 끝난 후, 미국은 노르망디를 다시 여객선으로 복원하려 하였으나... 복원비용이 많이드는건 둘째치고, 선체에 피로도가 상당히 누적되어서[8], 결국 스크랩 처리되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아서, 일시적이지만 다시 정기 여객선 노선에 뛰어들고 현재는 해상호텔이 되어 살아남은 라이벌인 퀸 메리랑은 다르게, 노르망디는 그러지도 못했고 살아남지는 못했다.[9]
이후 미국은 SS 노르망디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2차대전 전리품으로 획득하였던 독일의 정기 여객선인 SS 유로파[10]를 CGT사에 양도하였다.
[1] 흑백사진을 사람이 직접 채색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연통 채색이 영 좋지 않다.[2] French Line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졌다.[3] 노르망디의 선체는 S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다음가라 할 수준의 유선형이였고, 무엇보다 외관을 망치는 배기구같은 것도 다 패널로 가렸다. 그래서 엔진출력이 퀸 메리 대비 비교적 약함에도, 비슷한 속도를 뽑아낼 수 있었다.[4] 퀸메리의 설계자들이 대략 한 파도의 최고 수위점이 다른 파도의 최저 수위점이 만나면 두 파도는 상쇄 되는 방식을 이용해서 엔진출력을 높이고 선체의 길이를 조정하는 등으로 해서 선미에 가해지는 저항을 없애는 방식으로 퀸메리의 속력을 올렸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은 사실상 순전히 엔진파워만으로 노르망디를 압도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5] 왼쪽부터 SS 노르망디, RMS 퀸 메리, RMS 퀸 엘리자베스 순이다.[6] 내부의 목재 가구가 한 인부의 용접 토치에서 나온 스파크 때문에 불에 붙었고, 화재 진압 시스템이 꺼져있어서 초기에 불길을 잡지를 못하였다.[7] 그리고 1941년 12월에 개조명령이 떨어졌는데, 노르망디에 승선해본적도 없었던 인부들이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다 뜯어내고, 가구 다 들춰내고 하는데 미 해군이 준 시간이 고작 2개월이였다. 그러니까 화재가 났던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였다.[8] 4년동안 한쪽으로만 기울어져있었기에, 당연한 일이다.[9] 아이러니 하게도 또 다른 라이벌이라 할수 있는 퀸 엘리자베스도 화재로 1972년에 침몰했다.[10] 1928년 진수된 49,746톤급 여객선. SS 브레멘의 자매선이며, 프랑스로 넘어가서 SS 리베르테(SS Liberté)로 개명당한 후, 순조롭게 항해하다 1963년 스크랩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