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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4 15:20:39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라틴어: Gaius Calpurnius Piso
생몰년도 미상 ~ 65년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제국
가족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증조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조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버지)
리키니아(어머니)
리비아 오레스틸라(첫번째 아내)
아트리아 갈라(두번째 아내)
칼푸르니우스 피소 갈레리아누스(양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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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인물. 네로 황제를 타도하려는 피소 음모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자살을 강요당했다.

2. 생애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노빌레스) 집안인 칼푸르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증조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카이사르의 내전옵티마테스의 편에 서서 카이사르와 맞섰고 해방자 내전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을 단행한 암살자들 편에 섰다가 귀순 후 로마에서 조용히 지내다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집정관을 공동으로 역임했다.

조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티베리우스와 함께 기원전 7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로마 정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게르마니쿠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그를 죽음으로 내몬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자살했다. 아버지 루키우스[1]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27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동료 집정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피소 프루기의 딸인 리키니아와 결혼해 그를 낳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당대 최고의 귀족 가문에 속했다는 명예를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 막대한 부를 물려받았다.

피소는 잘생겼고 키가 컸으며, 성격이 무척 원만해 원로원 계급 뿐만 아니라 하층민들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막대한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또한 웅변술이 뛰어났고 비극 작품을 몇 편 집필할 정도로 예술 감각도 있었다. 자연히 그는 로마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말투가 관대하고 우아하지만 간곡함이 부족했고, 자니치게 과시적이었으며, 관능적인 사람들을 갈망했다고 한다.

37년 리비아 오레스틸라와 결혼했지만, 결혼식이 거행되던 날 칼리굴라 황제가 피소에게 강력한 압력을 행사해 그녀와 이혼하게 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고대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가 사비니족 유부녀를 납치해서 아내로 삼은 일과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아내였던 리비아 드루실라를 자기 아내로 삼은 일을 들먹이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강제 결혼 며칠 만에 오레스틸라와 이혼했는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피소와 재결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달(디오 카시우스) 또는 몇 년 후(수에토니우스), 두 사람은 비밀리에 관계를 맺었다는 트집을 잡혀 간통 혐의로 먼 섬으로 추방되었다.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 암살 사건이 벌어진 뒤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사면받아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았지만, 네로와 음악 및 문학적 관심사를 공유해 우호적인 관게를 맺었다. 그는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다. 네로 황제 시대엔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았지만 여전히 로마에서 촉망받는 인물로 손꼽혔다. 그런 그가 절친했던 네로를 암살하는 음모에 가담한 동기는 불명확하다. 일각에서는 그가 강요를 받고 음모에 가담해 주동자로 내세워졌거나 아예 음모에 가담한 사실이 없는데 네로와 근위대장 티겔리누스가 주동자로 몰아세웠다고 주장하지만, 타키투스 등 고대 역사가들은 그가 음모에 분명히 가담했다고 밝혔다.

타키투스는 그가 네로를 살해한 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결혼하려 했다는 설을 제시하면서도, 피소는 딴 여자에 정신팔려 있었고 그런 결정을 내릴 정도로 치밀하고 냉정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했다. 한편, 음모를 처음 기획했다고 전해지는 프라이토리아니 대대장 수브리우스 플라부스는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를 살해한 뒤 피소 역시 죽일 생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피소 역시 비극 작품의 등장인물들의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곤 했기 때문에 네로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피소마저 처단한 뒤에는 세네카에게 제국의 지배권을 넘겨주려 했다고 한다.

65년 피소 음모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후, 피소는 봉기를 일으키자는 주변의 권유를 듣지 않고 집에서 다가올 운명을 기다렸다. 얼마 후 장병들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자살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했고, 그는 순순히 목숨을 끊었다. 이후 그의 막대한 재산은 몰수되었고, 피소의 일가족은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

피소는 생전에 리비아 오레스틸라와 결혼했지만 칼리굴라 황제의 강압 때문에 이혼한 뒤 아트리아 갈라와 재혼했다. 하지만 두 결혼 모두 자식을 보지는 못 했고, 칼푸르니우스 피소 갈레리아누스를 양자로 두었다. 갈레리아누스는 양아버지가 처형되고 3년 후 네로 황제가 몰락한 뒤 네 황제의 해가 전개될 때 조용히 지냈지만, 그의 친척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가 갈바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장인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비텔리우스의 핵심 지지자라는 이유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측근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에게 위험인물로 간주되었고, 결국 로마에서 체포된 뒤 아피아 가도를 통해 40마일 떨어진 어느 요새로 끌려간 후 독극물을 강제로 먹고 목숨을 잃었다. 장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역시 체포된 뒤 무키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1] 본래 그나이우스였지만 티베리우스 황제가 반역자로 낙인찍힌 그나이우스를 칼푸르니우스 가문이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