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6:30

가천대학교/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가천대학교
파일:가천대학교 로고 화이트(한글+영문).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3a70,#8fc9f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캠퍼스
글로벌캠퍼스 메디컬캠퍼스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5><#004E96>
대학 정보
||
학부 대학원 역사 상징
학풍
학생 정보
학교 생활 총학생회 동아리 출신 인물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3><#004E96>
관련 기관
||
가천대학교 길병원
}}}}}}}}}}}} ||

1. 개요2. 경기도립 인천병원 부설 간호양성소
2.1. 인천간호고등기술학교
2.1.1. 교명 변화
2.2. 가천길대학
3. 가천의과대학4. 가천의과학대학교로 통합5. 경원대학교, 경원전문대학교6. 경원대학교로 통합7. 가천대학교 출범
7.1. 연혁

1. 개요

가천대학교의 역사
<colbgcolor=#F5F5F5,#2d2f34> 현재
~ 2012
가천대학교
메디컬캠퍼스 글로벌캠퍼스
2007 가천의과학대학 경원대학교
2006 경원전문대학 경원대학교
1998 가천길대학 가천의과대학
1997 경기전문대학
1994
1993 경기실업전문대학
1990 경기간호보건전문대학
1987 경원공업전문대학
1982 경기간호전문대학 경원대학
1979
1973 경기간호전문학교
1962 경기간호학교
1953 인천간호고등기술학교
1939 경기도립 인천병원 부설 간호양성소
1939년에 설립된 경기도립 인천병원 부설 간호원을 시초로 하고 있다. 그 후 경기간호전문학교, 경기간호보건전문대학, 경기전문대학을 거쳐 이길여박사의 인수 후 가천길대학이 되었으며, 가천의대와 통합 후 가천의과학대학교와 같은 재단이었던 경원전문대와 경원대의 통합으로 가천대학교가 출범하였다.

2. 경기도립 인천병원 부설 간호양성소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전쟁에 필요한 간호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1939년에 각도립의원의 간호학교를 인가해 지방의 공립 간호교육을 활성화시켰다. 이때 신흥동에 위치한 '경기도립 인천의원'에 부설 간호양성소가 설립된다. 1945년 해방 후 당시 의료교육을 하던 일본인이 한국의 독립과 함께 귀국하자 전국의 병원 및 학교에서는 가르칠 인력이 없게 된다. 그러다 남북이 각각 미소의 영향하에 놓이고 독자적인 정권수립에 따라 남한를 지배하고 있던 미군정은 새로운 의료체계수립을 위해 기존의 양성소를 폐지하게 된다.

2.1. 인천간호고등기술학교

미군정의 간호교육의 개편으로 인해 1953년 3월 인천간호고등기술학교가 설립되었다.

2.1.1. 교명 변화

2.2. 가천길대학

1994년 12월 신명여고와 경기전문대를 운영하는 신명학원의 경영권을 이길여 박사가 인수하면서 1998년에 6월 가천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3. 가천의과대학

1997년 12월 교육부가 의료 취약지역인 전남 목포에 500병상 이상의 종합병원을 설립하는 것을 전제로 조건부 설립인가를 하였다. 그러나 지역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어 결국 가천의대의 부대조건은 인천에 500병상 3차기관 설립으로 바뀌었다.#

현 가천창의팩토리 부지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1998년 3월 의대 중심 대학인 가천의과대학이 의예과 입학정원 40명으로 개교하였다. 의과대학 특성상 개교 첫해 신입생 정원 40명 모집에 1,586명이 지원해 39.6대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또한, 파격적인 장학제도와 신축 기숙사시설도 한몫했다. 의대 교육에 영어가 중요한 만큼 박사 학위를 소지한 외국인 교수가 교내와 기숙사에 상주하며 학생들의 외국어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채택해 집중 교육하고 있다.#

개교 5년차인 2003년부터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하고 의예과와 의학과가 폐지되는 대신 정원 60명의 생명과학부가 신설되었다. 생명과학부 제1회 신입생들이 10:1에 가까운 경쟁률을 기록하였다. 이어 제2회 신입생들도 6.3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였다. (수능 400점 만점 기준 커트라인 355점, 평균 362점) # 당시 의학전문대학원 지원 기조가 자대를 우대해주거나 본교는 생물학, 생명공학 등의 관련분야 경력 및 학업성취도를 평가하여 뽑기때문에 생명과학부가 높은 수능 성적을 기록했다. 자세한 사항은 의학전문대학원 참고.

2005년부터 의학전문대학원의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제1회 입학성적 1위를 기록하며 순탄하게 의학전문대학원이 시작되었다.#

4. 가천의과학대학교로 통합

2005년 10월 24일 교육부는 가천길대학과 가천의과대학의 통합을 승인하여 2006년 3월부터 가천의과학대학교로 통합된다. 이는 2005년 대학구조조정의 차원으로 국내 첫 사립대 통폐합이 되는 것이다. 가천길대학의 입학정원 1천201명(61%)을 줄여 가천의과대학교와 통합하였다. 이후 의학-생명과학-보건과학 분야의 특성화를 추진하여 가천생명과학연구소 등을 설립하였다. 초대 총장은 이성낙총장이 맡았다.

5. 경원대학교, 경원전문대학교

파일:경원대학교 로고.svg
파일:4B16D3D0-20AF-4395-B33B-070A79D83914.jpg
경원대학교 휘장 경원대학교 캠퍼스
(現 글로벌캠퍼스)
경원대의 설립자는 김동석 박사. 김동석 박사는 연탄사업을 통해 얻은 부로 현재의 글로벌 캠퍼스 부지인 성남 땅 약 2만 평을 매입하였다. 1978년 학교법인 경원학원이 창설되고 1979년 경원공업전문대학이 개교하였다. 전문대학 학사로 운영하다가 별도로 1981.12월 본 부지에 4년제 대학 설립인가를 받고 1982.3월에 1개 단과대학, 8개 학과 400명으로 4년제대학 경원대가 개교하였다. 학교 상징은 독수리[2], 교화는 진달래, 교훈은 진리, 창조, 웅지. 슬로건은 '세상을 여는 새로운 생각'이었다.

80년대 이후 수도권 인구집중억제정책에 따라 서울소재 대학 정원이 동결된 것과 달리 경원대는 경기도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매년 큰 폭으로 신입생 정원이 증가했고, 이에 따라 지속적인 학과를 증설한 탓에 설립 6년만에 1987년 광운대 세종대와 같이 종합대학으로까지 승격하였다. 1989년, 경희대학교를 제외하고 수도권에 유일한 한의과대학을 교육부부터 인가받아 종합대학으로써의 입지를 다졌다. 같은 이유로 성장한 경원공업전문대학도 1990년에 경원전문대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경원대가 설립 10여년만에 의대설립을 추진하던 김 박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어 성장흐름이 끊기게 된다. 이후 아내 김 이사장이 약 1년 동안 잠시 경원학원을 운영하였지만 지병으로 인해 재단을 내놓게 되었다.

당시 기업들의 대학인수가 유행했는데 경원대는 1991년 예원학교서울예술고등학교를 운영하던 예음그룹[3][4]재단 산하로 들어가게 된다.

예음그룹은 예체능 분야에 신경을 쓰고 있는 기업이었고,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동생이자 서울대 음대 출신의 최원영 이사장은 경원대 음대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같은 재단 서울예고 졸업생들이 다수 경원대 음대/미대로 진학을 하였다.[5] 경원대 예대가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6][7][8][9] 또, 당시 동아건설에서 경원대 건축계열 학과 학생들을 많이 채용했고, 그로 인해 건축, 도시계획, 조경, 미대가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대기업 동아그룹 계열사인 예음그룹이 들어와 큰 성장을 주도하는가 싶었지만 1993년 당시 학교 내에서 설립자 추종 세력과 예음그룹 추종 세력끼리 갈등이 빚어져 입시부정에 대한 제보와 투서가 관계기관에 접수되기 시작했다.# 결국 부정입학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관계자들은 구속되었다.#

1997년 IMF사태로 인해 계열사가 재정적 부담을 겪자 예음재단 최 이사장이 1997년 10월부터 1998년 3월까지 경원대와 경원전문대의 등록금 218억을 횡령하였다.[10] 1998년 7월 3일 경원대 교수들이 재단 비리를 폭로하기 시작하면서 횡령은 드러나게 되고 검찰 수사가 진행되었다. 수사를 하던 검찰측은 최 이사장 등 관련자들의 혐의사실을 대부분 확인했지만 학교 정상화가 우선이라 말하며 즉각적인 사법처리를 유보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학생들이 최 이사장의 구속과 학교정상화를 위해 총장실을 점거하는 등 시위가 이어졌고 그 사이 최 이사장은 경원대의 도립대학화를 추진하다 별 성과가 없자, 218억 원의 학교 공금을 채워주는 대신 모든 학교 운영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1998년 9월 이사회를 개최하였다.#

1998년에 의과대학 단과대를 인가받아 가천의과대학교를 설립한 이길여 총장은 가천의과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만들기 위한 목표를 세웠고, 예대, 음대, 체대, 한의대까지 갖춘 종합대학이었던 경원대학교가 이길여의 눈에 들어 가천길재단 산하의 대학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 해 12월 최 이사장은 기소되었고 수사를 받던 중 최 이사장은 해외로 도피하여[11] 예음재단이 1998년 12월에 퇴출되고 가천길재단의 인수과정에서 설립자 일가와의 분쟁에 휩싸이기도 하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법정다툼끝에 가천길재단에 잘 안착한다.

가천길재단이 들어오고 난 후 기존 학생들과 마찰은 있었지만, 학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는 등 가파르게 성장하였다.

6. 경원대학교로 통합

2007년 같은 재단에 있던 경원대학교와 경원전문대가 구조조정을 거친 뒤 통합하여 경원대학교로 출범하였다.

7. 가천대학교 출범

학교법인은 지속적으로 경원대학교와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며, 결국 2011년 7월 11일자로 교육과학기술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2012년 3월부터 통합 가천대학교가 출범하게 되었다. 2012년 같은 재단에 있던 경원대학교와 가천의과학대학교가 통합되어 경원대학교 부지는 가천대학교 글로벌캠퍼스, 가천의과학대학교 부지는 가천대학교 메디컬캠퍼스가 되었다. 여담으로 통합 직후에는 성심여자대학교가 통합 후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으로 불린 것과 같이 통합 전 학교 예우차원에서 '가천대학교 경원캠퍼스'로 불렸으나, 어느 순간 갑자기 글로벌캠퍼스로 바뀌었다, 이에 대해 "경원대의 색채를 완전히 지우려는 것"이라는 의견도 몇몇 존재한다.
파일:external/www.campuslife.co.kr/img_18690_2.jpg
통합 대학의 명칭에 대해 학생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가천대라는 이름으로 통합하는 것에 경원대학교 재학생은 강하게 반발했었다.# 또한, 각종 동문회에서도 '학교 통합에 나의 모든 것을 걸 것'이라는 이길여 총장에 인터뷰에 대해 '경원대학교는 이길여의 사유물이 아니다'라고 밝히며 반대 의견을 내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잊혀져가는 상황이 되었다.

완전히 가천대가 되기 전인 2011년 당시, 단대별로 과잠바에 경원대와 가천대가 혼재했다고 한다. 12년도 교명을 바꾸었기 때문에 보통 12학번 이상은 가천대 과잠을 입고있는 편이고 경원대 과잠을 입은 학생은 화석 11학번 이상일 확률이 높다.

7.1. 연혁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181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181 (이전 역사)
문서의 r30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1] 7대~10대 최정환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설립[2] 경원학원 설립자 김동석 박사의 모교가 연세대라서 연세대 상징인 독수리를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독수리상은 국제어학원이 설립되기 전 공터에 있었으나 국제어학원이 건립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3] 범 동아그룹 계열[4] 예대의 예음홀의 '예음'이 예음그룹에서 따온 것이다.[5] 극히 일부의 전문대나 일부 대학의 특수과를 제외하고는 졸업생이 바로 같은 재단의 대학으로 가는 경우는 드물다.[6] 당시 음대 입시에서 연세대 다음으로 쓰는 학교였다고..[7] 음대 입시에서 연세대 다음이었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는 지금과는 다른 당시 학력고사 시대의 입시전형 제도 때문인데, 수시/정시를 합쳐 여러군데 전형에 응시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학력고사 시대에는 전기입시 1회, 후기입시 1회, 전문대 입시 1회씩 총 3회 밖에 전형기회가 없었다. 가뜩이나 몇 안되는 대부분의 음대는 전기입시에 몰려 있었고, 서울 및 수도권 학생의 경우 전기 음대입시에서 떨어지면 후기대학 입시에서는 서울과 제일 가까운 곳이 경원대였다. 그 다음 갈만한 곳이 명지대 용인캠퍼스... 저 두 곳에 응시할 성적이 안되면 더 남쪽으로 멀리 가던지 소규모 신학대학의 교회음악과 등에 가야했다.[8] 연세대 음대 다음이라 할만한 한양대, 경희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은 당시 전기에만 음대 모집을 했다. 한대, 경희대는 후기 분할모집을 하는 대학이었음에도 음대는 전기에만 모집했다. 그외 지금은 음대가 있는 상당수 수도권 대학도 당시에는 음대가 설립되지 않아 예체능 학생의 경우 전기에 떨어지면 후기에는 선택의 폭이 크게 줄어들었다.[9] 수능이 시작되기 전 80년대 부터 학력고사 시대의 전기대학, 후기대학은 이른바 분할모집으로 인해서 어느정도 희석되어 가던 시기였다. 70년대까지 후기대학으로 유명했던 한양대, 성균관대 등이 일부 (상당수) 인원을 전기에도 분할모집하면서 사실상 전기대학화 되었고, 일부 전기대학의 경우 후기에 소규모 인원을 분할모집으로 뽑아서 (재수를 기피하는) 전기 고득점 탈락자들을 노리기도 하였다.[10] 자세한 내용은 대기업/대한민국의 동아그룹내용을 참조.[11] 그 이후 14년간 도피생활을 하다 2013년에 교비횡령의 죄로 실형 6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