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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30 23:35:53

경평대항축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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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평대항축구전
京平對抗蹴球戰
Gyeongseong-Pyongyang Derby
파일:경성부 휘장(1925-1945).svg 파일:평양부 마크(1922~?).png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
1929년 ~ 1946년

1. 개요2. 역사
2.1. 이후2.2. 미래의 가능성
3. 역대 전적4. 유니폼5. 양 구단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6. 여담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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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평대항축구전을 통해 두 도시의 시민뿐 아니라 전 조선 민족이 축구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자기 고장, 자기 팀에 대한 자부심도 느꼈다. 또한 조선 민족끼리 한 울타리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경평전의 인기는 더욱 높아만 갔다.(중략) 전국의 온 국민이 열광하는 민족의 잔치였고 우리나라 축구 수준 향상의 촉진제 구실을 했다.
김용식 선생 평전 '어떤 인생' 中
휘문고보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 찾아온 관중은 무려 7,000명에 이르렀다. 1930년 펼쳐진 제2회 대회에서는 당일 혼잡을 피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경성 시내 다섯 곳의 예매권 구입처까지 마련됐다.
조선일보 1929년 10월 10일, 1930년 11월 27일
경평대항축구전은 서울경성축구단[1]평양평양축구단[2]의 도시대항 축구경기다. '경평축구대항전', 짧게 경평전으로 불리며 유럽 축구문화의 영향으로 '경평더비'라는 말로도 불리고 있다.

수도와 제2의 도시로써 지역 의식이 남달랐던 기호 지방[3]관서지방[4]을 대표하는 양대 대도시 서울평양에 당시 조선의 최고 빅클럽들이 형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양강 구도가 이루어지면서 이들 최고의 클럽들 대결에 조선 전체가 열광하는 흡사 지금의 유럽 프로축구 리그처럼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클럽 축구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어찌보면 남북분단이 없었고 이들의 라이벌리가 이어졌다는 가정이 성립될 경우 탄생 배경 및 역사만 따지면 테헤란 더비 못지 않은 아시아 최고의 더비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고 현재 K리그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되는 지역 내 클럽의 지지 및 연계 부족이 해소될 가능성이 있었던 셈이다.

2. 역사

1929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여운형[5]경성(지금의 서울) 대 평양의 도시 대항전을 구상하고 같은 해 10월 8일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제1회 경평전을 개최한 것이 경평전의 시작이다. 조선중앙일보사의 적극적인 홍보와 서울-평양간의 라이벌 의식이 맞물리면서 대회가 거듭될수록 서울, 평양 각 시민은 물론 전국민의 관심거리가 되었다.[6]

당시에는 대신 (軍)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전경성군 대 전평양군 축구대항전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경성군은 당시 축구의 명문 경신중학[7] 중심으로, 평양군은 일본의 최강팀인 와세다대학을 7:0으로 물리쳐 이름을 날리던 숭실학교[8]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경평전은 1930년 제2회 경평전을 끝으로 주최측인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정으로 1931년1932년 두 해 동안 열리지 않아 사멸될 처지에 이르렀으나 1933년 4월에 평양축구단이 창단을 기념하여 경성대표를 초청함에 따라 부활했다. 그러나 경평전은 1935년 제4회 경성운동장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졌다.

경평전은 서울, 평양 이외에 다른 도시 축구팀의 성장에 힘입어 3도시대항축구전이나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와 같은 도시대항 축구대회로 이어졌지만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로 인해 모든 대회가 중단되었다.

1946년 해방 후 동대문운동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평전이 열렸다. 1942년 이후 열리는 대회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큰 관심과 열광적인 응원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그 열기가 지나쳐 관중 난동이 벌어져 경찰이 공포탄을 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삼팔선으로 남북통행이 금지되면서 평양 선수들은 경비망을 뚫고 어렵게 내려왔던 것이었으며 돌아갈 때는 육로가 위험해 뱃길을 택해야만 했다.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초청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지켜지지 못한 채 경평전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2.1. 이후

남북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이들간의 교류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평전도 그 명성만 남은 채 재개되지 못하였다.

경평전의 주축이었던 경성축구단평양축구단은 해방 이후 각기 남북 국가대표팀의 모태가 되었다.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 불과하던 대한민국북한이 각각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6개국 본선에 진출[9]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8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분단 이후 경평전은 사실상 대한민국북한 축구 국가대표 팀간의 경기가 승계하고 있다. 남자 축구의 경우 한국 축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북한 대표팀이 대한민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체로 평가되지만 북한 대표팀도 남한을 상대로 할 경우 버프가 걸려서 실제로는 두 팀간의 객관적인 전력차이보다 팽팽한 경기가 진행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한 조에 편성되어 경기한 적이 있고 한국이 1승 1무로 우세했다. 그러나 북한은 아시아 예선에서 사우디 이란 등의 강팀을 제치고 조 2위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32개국 본선에 직행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자주 마주치는 곳은 주로 동아시안컵 대회와 아시안 게임이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맞붙어 남한 대표팀이 1:0으로 승리한 바 있다. 동아시안컵에서도 맞붙어서 여러차례 경기한 바 있다. 북한 대표팀과의 경기를 뛰어본 대표팀 선수들의 인터뷰에 의하면 북한 선수들의 트래시 토킹이 대단한 모양이다. #

이렇듯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의 지역 예선에서 남북이 마주치기는 했으나 국가대표로서 만난 것이었으며 경평전과 같이 남북을 대표하는 도시 간의 정기적 경기는 부활하지 못했다.

1990년 10월 11일에는 평양에서, 10월 23일에는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2002년 9월 5일9월 8일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02 남북통일축구경기라는 이름으로 경평축구의 맥을 잇는 축구대표팀 경기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2.2. 미래의 가능성

향후 남북 통합리그가 출범하면 평양을 연고로 하는 최상급축구련맹전의 4.25 체육단이나 평양시 체육단이 K리그의 서울을 연고로 하는 FC 서울이나 서울 이랜드 FC와 같은 리그에서 맞붙게 되어 1946년 이후 수 십 년만에 경평축구대항전의 명맥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 될 것이다.

국내 통합리그가 아닐 경우엔 국제대회에서 만나는 수 밖에 없는데 역시 현재는 요원하다. K리그 소속 서울 소재 프로 구단들은 아시아 정규 챔피언스 리그인 AFC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을 목표로 하지만 북한의 축구팀들의 경우 AFC컵진출하는데 이 두 대회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서 아예 연계조차 되지 않는지라 북한이 아챔으로 올라오지 않는다면 국제대회 경평전도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2021년 아챔의 진출권 배분 개편에 따라 북한 최상급축구련맹전에게 1장이 주어져서 2021년 부터 K리그 소속 서울 소재 프로 구단과 최상급축구련맹전 소속 평양 구단이 맞대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정작 북한이 라이센스 충족에 실패하면서 2021시즌 진출권을 박탈당했다.

3. 역대 전적

종합 전적
경성軍 평양軍
5 7 9

4. 유니폼

경성축구단의 유니폼 색상은 빨간색이고 평양축구단의 유니폼은 파란색에 로마자 P자가 새겨진 유니폼이었다. 경성축구단의 유니폼, 평양축구단의 유니폼 광복 및 남북분단 이후 각 도시가 수도인 남북한을 서로 병치시킬 때 남한을 파란색, 북한을 빨간색으로 묘사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5. 양 구단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

6. 여담

경성축구단은 1935년 천황배 JFA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일본의 FA컵)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

2007년 K3리그에 참가한 서울 유나이티드 FC가 자칭 경성축구단의 가치를 계승한다며 창단되었다.

경평전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정치적 수사로, 심지어 북한 정권에 반대하는 맥락에서도 쓰였다. 이 경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열기를 잊지 않았고 평양으로 경기를 보러간 기억이 있던 사람도 있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북한으로 끌려가거나 못 내려온 선수를 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두 팀 사이를 오가며 이적한 선수도 당시에 존재했고 90년대만 해도 평양팀 출신 선수가 남한에서 생존한 경우가 있었다. # 평양팀에서 뛴 적 있는 옥정빈은 대한축구협회 기술이사를 역임하기도 했기 때문에 남북대화 과정에서도 이 대회가 많이 언급되고는 했다. 그러나 분단 장기화로 애꿎은 북한 주민마저 김정은과 하나로 보는 오해가 생겨 평양은 한국 지역감정의 원조[10], 지역감정을 줄이는 축구 같은 속설이 왜곡되어 퍼졌다.

7. 둘러보기



[1] 1933년 5월 11일 창단된 서울 연고의 축구팀이며 1917년에 창단한 불교청년회 축구단이 잠시 해단하다가 1925년 조선축구단으로 재창단되었고 조선축구단에서 일부 선수와 운영진들이 나와서 같은 서울의 라이벌 경성축구단으로 합류했다.[2] 1918년 무오축구단으로 창단[3] 서울, 경기도, 충청도 지방[4] 평양, 평안도 지방[5] 1929년에 여운형이 사장을 지낸 신문은 조선중앙일보가 맞다. 1929년에 조선일보사의 사장은 신석우였다.[6] 경평대항축구전의 인기를 확인한 여운형은 이듬해인 1930년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여운형을 빼면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게 별로 없다.[7] 축구부 1904년 창단[8] 축구부 1911년 창단[9] 대한민국이 일본을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였다.[10] 일제강점기 평양은 다른 지방 도시처럼 기생과 같은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사투리 등을 잘 안 쓰려고 하던 도시였으며 주요한 같은 한국 정치인으로 활동한 평양 출신은 자신의 사투리를 낮게 보기도 했다. 남한에 속한 지역을 포함하여 다른 지방에도 차별받는다는 인식은 반역향 등으로 존재했는데 실향민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으니 인터넷에 이곳만 특별히 차별받는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