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이원선(李元善), 지모사(池模士), 찌모시(Тимоши) |
본관 | 제주 고씨 |
출생 | 1903년 12월 28일 |
강원도 횡성군 군내면 읍상리 (現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읍상리 326번지[1]) | |
사망 | 1930년 2월 5일 (향년 26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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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903년 12월 28일 강원도 횡성군 군내면(現 횡성군 횡성읍) 읍상리 326번지의 농가에서 아버지 고석인(高錫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3년 4월 횡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17년 3월 졸업했고, 이후 1919년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횡성군 군내면 읍내를 중심으로 전개된 3.1 운동에 참여했다.1920년 횡성군 출신 자산가이자 조부 뻘인 고창한(高昌漢)의 후원으로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208번지 대동학원(大東學院)에 있던 고창한의 저택에 거처하면서 그해 5월 경성부 중동학교 중등과에 입학했다.[2] 그러다 2학년 재학 중이던 1921년 3월 1일 3.1 운동 기념 선전문을 인쇄하여 배포했다가 이 사실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동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자 1921년 6월 북간도로 망명했다. 1921년 9월 북간도 소재 '상해당 만주뷰로'에 입당했고, 곧 연해주로 이동해 러시아 내전에 참가하여 고려혁명운동 의용병대에 소속되어 러시아 백군과 맞서 싸웠다. 1922년 3월 대한의용군에 입대하여 8월까지 하바로프스크에 머물다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1925년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청년회 및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25년 10월 국내로 돌아왔고, 1926년 2월부터 7월 20일까지 조선노동당에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당국이 조선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조사하자, 고광수는 해외로 피신했다가 8월에 재입국했다. 이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청년동맹과의 통합에 노력하여 '통합 고려공청'을 탄생시키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는 국내외를 오가며 공산주의 청년단체의 통일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노력했다.
1929년 2월 11일 지린성 지린현(吉林縣) 하남가(河南街)[3]에서 최덕준(崔德俊)·염진(廉進)·박문병(朴文秉)·강철(姜澈)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조직을 위해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으며, 임시중앙간부에 선임되었다. 1929년 6월부터는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철도부설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지하운동을 펼치다가 그해 9월 24일 북청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10월 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예심을 받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에 걸려 신음하다 1930년 1월 30일 오후 5시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결국 그해 2월 5일 오후 9시에 병사했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경성부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 제1390호에는 336번지로, 경기도경찰부 고등계 비밀 제426호에는 335번지로 각각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2]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춘천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상경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독립운동인명사전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록을 따른다.[3]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촨잉구(船營區) 허난제(河南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