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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11:47:02

고영찬(1928)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고영찬
高永瓚[1]으로 등재되어 있다.]
파일:고영찬.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타카야마 나가타다시(高山永瓚)
출생 1928년 2월 1일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송평리 고슬마을
사망 미상 (향년 불명)
본관 개성 고씨[2]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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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28년 2월 1일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송평리 고슬마을에서 아버지 고언규(高彦奎)와 어머니 함안 조씨 조용탁(趙鏞琢)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4월 안동농림학교에 재학하던 중 동기인 이정선의 주도로 조직된 명성회에 참여하였다. 명성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의 공작원 이회술의 지령을 받아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안동에서 결성된 비밀단체였다. 이들은 총 19회에 걸쳐 임시정부 동정 및 연합군 전황을 수록한 기관지 <새벽>을 비밀리에 출판하여 경북 일대의 학생과 지식층에게 배포했으며, 때가 오면 일제의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고관들을 처단하기로 계획했다.

고영찬은 명성회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1944년 11월 윤동일, 권영동, 갈정호 등이 조직한 조선회복연구단과 제휴하여 1945년 2월 17일에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 전 인원을 배치하고, 야밤을 틈타 교통, 통신을 차단하며, 안동경찰서와 헌병대 파견대를 공격한 뒤, 의성에 주둔한 일본군 제24부대와 일전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계획이 새어나가면서 단원 일부가 체포되자 거사일을 1945년 3월 10일로 연기했으나, 일본 헌병대가 대거 잡아들이면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고영찬도 이때 체포되어 5개월간 미결수 신분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6일에 석방되었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개성고씨양경공파세보>에는 그가 1949년 4월 10일 외출한 이후로 귀가하지 않았다고 기재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이 해방정국인데다 여순사건이나 4.3사건같이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던 시기였기에 그 사건이나 6.25 같은 사건들에 휘말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고영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3. 참고 문헌


[1] 개성고씨양경공파세보에는 高[2] 고현파(古峴派) 28세 영(永)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