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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7-20 03:09:54

곽걸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회주(晦周) / 국전초부(菊田憔夫)
본관 현풍 곽씨[1][2]
출생 1868년 7월 17일
경상도 고령현 고곡면 월막동
(현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3]
사망 1927년 7월 4일[4] (59세)
묘소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국밭마을[5]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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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곽걸(郭杰)은 1868년 7월 17일 경상도 고령현 고곡면 월막동(현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에서 아버지 구담(龜潭) 곽후근(郭厚根, 1843 ~ 1911. 10. 26)과 어머니 김해 김씨(? ~ ?. 9. 2) 김정(許禎)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5촌 당숙 곽영근(郭塋根, 1854 ~ 1907. 9. 4)에 입양되었다.

세칭 파리 장서 사건이라고 하는 제1차 유림단 의거는 서울에서 김창숙·김정호·이중업·유준근·유진태·윤중수 등의 논의 끝에 시작되었고, 김창숙이 그의 스승 곽종석[6]을 만나면서 급진전되었다. 마침 충청남도 지역에서도 같은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그 지역 유림의 거두인 김복한과 그 계열의 인물들이 합류하면서 두 지역 대표를 비롯하여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다.

독립청원서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의 시해 의도, 그리고 한국 주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김창숙은 3월 말에 독립청원서를 지니고 중국 상하이로 가서 번역과 인쇄를 한 뒤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에게 보내고,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성주의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곽걸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 등이 유림 대표로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고향 마을에 은거하다가 1927년 7월 4일 별세하였다.

199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청백리공 안방(安邦)파-죽재공파(竹齋公派) 30세 火변 항렬.[2] #[3] 현풍 곽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곽수빈곽용환 제43~45대 고령군수가 이 마을 출신이다.[4] 1926년 6월 6일 별세했다고도 한다.[5] #[6] 곽걸에게는 25촌 지간의 족증조(族曾祖)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