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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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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식
郭仁植 | Quac Insik
파일:Quac Insik.png
출생 1919년 1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 상동
(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상리)
사망 1988년 3월 3일 (향년 69세)
일본 도쿄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현풍 곽씨
직업 화가, 수원중학교 미술교사
학력 현풍공립보통학교 (졸업)
일본미술학교 (회화과 / 수료)
배우자 오마타 사토코 (小俣智子)

1. 개요2. 생애3. 작품
3.1. 작품 19553.2. 들불3.3. 작품 623.4. 작품 633.5. 사물과 말3.6. 작품 83-8
4. 여담

[clearfix]

1. 개요

우주 속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물이 존재한다. 이토록 많은 사물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게끔 하고
그 무수한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면, 현재의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사물이 꺼내는 말은 틀림없이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 낼 것이다. (...)
나는 일체의 어떤 표현행위를 멈추고 사물이 꺼내놓는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주변 사물의 '물성'을 탐구해 이를 미술로 적용시킨 '물성 탐구'의 선구자.

돌맹이나 깨진 유리, 찢어진 종이나 긁힌 동판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사물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는 한일 양대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비슷한 사조인 유럽의 '아르테 포베라'나 일본의 '모노하' 보다 5~10년 빠른 작업이었다. 미니멀리즘의 선구자인 도널드 저드가 자신의 논고 「특정한 오브제들」에서 회화와 조각이 틀에 박힌 형식이 되어버렸다고 비판하면서 그런 관례를 깨기 위해선 어떠한 형태나 재료도 모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때가 1965년인데, 곽인식은 그보다 3년 빠른 시기에 이미 '깨진 유리'나 '자연의 돌'을 그대로 작품으로 사용하는 작업(물성에 관한 탐구)을 시작하고 있었다.

2. 생애

곽인식은 1919년 경북 달성군 현풍면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1] 현풍 곽씨 집성촌이 그의 고향이다. 부친이 현재의 현풍고를 세울 정도로 가세가 컸다. 현풍공립보통학교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고 서울에 올라가 YMCA 중등부를 수료한 후 1937년 형과 삼촌이 있던 일본으로 미술공부를 하러 건너갔다. 거기서 도쿄에 있던 일본미술학교 회화과에 입학했다. 1938년 방학 중에 귀국해 첫 결혼을 했고 아들도 두었으나 이내 아들을 잃고 부인과도 헤어졌다. 유학에서 돌아온 1942년에는 대구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수원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아 고향 현풍으로 내려왔다. 1946년에 두 번 째 결혼을 하고 유일한 자식인 아들 곽경직을 얻었지만, 집안의 좌우익 갈등 때문에[2]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9년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1982년 돌아오기 전까지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았다. 일찍 헤어져 ‘아버지’ 한 번 못 불러본 아들 곽경직은 서른을 넘기고서야 처음 일본에서 부자상봉을 했다고 한다.

일본으로 간 곽인식은 2년간의 고베 생활을 거쳐 도쿄에 정착했다. 1950년대 그의 화풍은 “피카소와 미로를 혼합시킨 듯”한 “초현실주의적인 심상의 풍경화”[3]라 평가받는다. 〈작품 1955〉에서 보듯, 신체가 왜곡되어 눈알이 강조되거나 손발 같은 특정 부위가 지나치게 과장된 초현실주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종전 후의 도쿄는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우에노 아메요코 암시장에서 미군 보급품을 사다가 웃돈을 얹어 되파는 방식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림은 꾸준하게 이어나갔다. 곽인식은 도쿄에 머물던 음악평론가 박용구와 친했는데, 1957년 박용구를 따라간 공연장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발레리나 오마타 사토코(小俣智子)를 만나게 된다. 곽인식은 몇 년 후 오기쿠보(荻窪)에 있는 그녀의 거처로 몸을 옮겼다.

이 시기에 독보적인 작품으로 ‘유리깨기’가 있다. 도쿄올림픽이 가까워지자, 이제까지 황량하기만 했던 신주쿠에 우후죽순 신축 고층빌딩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초현대식 건물에 어울릴 만한 새로운 건축자재로 대형유리판이 등장했다. 거리를 걷다가 1960년대 당시로는 보기 드문 큰 빌딩의 유리창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너무 커서 눈에 다 들어오지 않기에 크면 클수록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희한한 존재”인 ‘유리의 투명성’에 매료됐다. 그리하여 깨뜨린 유리조각을 덕지덕지 캔버스에 붙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유리작업으로 단색조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유리 크기 만큼 땅을 파서 그 위에 유리를 놓고 쇠구슬을 떨어뜨려 깬 다음, 판넬 위에 천을 깔고 그 위에 깨진 조각을 조심스럽게 다시 붙인 작품들이다. 당시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은 곽인식 뿐이었다.

일본 미술에서 물질의 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1962년부터 유리, 황동, 종이 등 다양한 소재의 물성을 실험하는 작품들을 제작하며 시대를 앞서갔다. 물질성과 관련해서, 서구에서는 1960년대 후반 아르테 포베라 움직임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1970년대 전후 모노하가 주목받았는데 곽인식의 작품은 이를 훨씬 앞선 것이었다. 곽인식은 앞선 작품들을 통해서 일본의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줬기 때문에, 곽인식을 일본 모노하의 선구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이우환, 하야시 요시후미(林芳史), 곽덕준, 김구림 등 일본의 한국계 작가들과는 물론 국내의 미술계와도 연대를 계속 맺고 있었다. 한국 작가들이 일본으로 와서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거나 편지 등을 통해서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국내 미술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4]

1970년대 후반부터는 회화에 집중한다. 붓으로 종이에 무수히 많은 타원형 색점을 찍는 작업을 한다. 이는 점 위에 점을 겹쳐 찍음으로써, 앞의 점과 뒤의 점의 차이로 인한 공간감을 형성하는 시도였다.

일본 내에서만 10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평단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한계 때문에 일본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1988년 3월 3일 도쿄도 이타바시구 성지회(誠志会)병원[5]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만 68세 11개월) 3년 후 일본인 부인 오마타 사토코 역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자식없이 혼자였기에 사후에 발견되었다. 곽인식의 유일한 혈육 곽경직[6]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곽인식을 위해 설계한 방배동의 옛 아틀리에서 생활했었으나 현재는 망실된 상태다. 곽인식이 1983년 도쿄 긴자에 개관한 '갤러리Q'는 14년간 곽인식의 조수로 일한 바 있는 제자 우에다 유조(上田雄三·1951~ )가 물려받았다.

3. 작품

3.1. 작품 1955

3.2. 들불

3.3. 작품 62

3.4. 작품 63

3.5. 사물과 말

3.6. 작품 83-8

4. 여담


[1] 아버지 곽수덕(郭洙徳), 어머니 정악이(鄭岳伊)의 차남 (남3, 여1)[2] 친형이 공산주의자들한테 살해당하고 숙부는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아 처형당했다. 집안에서 공산-사회주의자를 극도로 싫어했지만, 곽인식 본인은 조총련계 잡지에 삽화를 그리는 등 공산주의 계열에 우호적이었다. 이로인해 집을 나온 뒤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3] 일본의 미술평론가 도노 요시아키(東野芳明)의 해석이다.[4] 직접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과거의 조총련계 활동으로 인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주저했었으나, 1982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을 계기로 33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게 된다. 현대화랑 대표 박명자와 일본미술학교 후배인 서양화가 임직순이 그의 신분을 보증하고 편의를 제공했다. 이후로 곽인식의 한국행이 잦아졌다.[5] 병원 홈페이지[6] 두번째 결혼 때 얻은 유일한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