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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6:01:21

교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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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정부의 주요 파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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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계의 거두인 량스이

1. 개요2. 역사
2.1. 호국전쟁 이전2.2. 호국전쟁 이후
3. 주요 인물
3.1. 구교통계3.2. 신교통계
4. 참고문헌

1. 개요

북양정부의 주요 파벌 중 하나로 이름처럼 교통수단(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이다. 철도 노동자와 기술자, 자본가들을 주요 지지층으로 삼고 있었다. 대표적인 정치인으로는 량스이가 있다.

2. 역사

2.1. 호국전쟁 이전

이들은 청나라 시기 철도를 담당하던 체신부와 우편을 담당하던 교통은행의 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1] 대략적으로 1906년~1907년 청나라가 철도 및 대외차관 사업을 총괄하기 위해 각종 기관을 설립할 당시 량스이를 비롯한 다양한 실무인사들이 기용되면서 교통계의 원형이 잡혔는데, 특히 량스이가 철도행정의 성공과 위안스카이와의 친목을 배경으로 신해혁명 발발 직후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 위안스카이에 의해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수하들을 다양한 행정부 직책에 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공식적인 교통계의 창립자는 초대 국무총리 탕사오이였지만, 교통계의 수장으로 군림한 사람은 량스이였다. 량스이는 위안스카이의 재정권을 사실상 총괄해 재신(財神), 두 번째 총통 등의 별명으로 불렸고 탕사오이가 위안스카이와 갈등 끝에 경질된 이후 위안스카이와 직접 대항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여기고 그의 독재를 적극 옹호하기로 결정했으며, 그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황제가 되겠다는 희대의 개소리 무리수를 둘때도 량스이와 교통계는 위안스카이의 제제를 적극 지지하였다. 결국 이 무리수는 호국전쟁이라는 내전으로 이어진다.

2.2. 호국전쟁 이후

호국전쟁의 결과 홍헌제제가 취소되자 계임 총통으로 임명된 리위안훙은 홍헌제제의 주요 원흉으로 지목된 량스이를 비롯한 파벌 지도부에 대한 수배를 내렸으며, 주요 인사들이 해외나 조계로 도망치면서 교통계는 일시적으로 구심점을 잃었다. 하지만 국가 행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철도를 장악하고 있던 교통계를 완전히 내칠 수는 없었기에 리위안훙은 차오루린(曹汝霖)을 비롯한 잔존 교통계 인사들에 대한 회유를 시도했으며,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재기용된 인사들은 이윽고 부원지쟁을 틈타 세력을 확대해 구교통계와 대비되는 신교통계를 세운다.

신교통계의 설립 년도는 일반적으로 차오루린이 돤치루이에 의해 교통총장에 임명되는 1916년을 기준으로 잡으며, 차오루린이 교통총장에 임명되자마자 구교통계 성향의 교통부 임직원 130여명을 교체하고 자신의 측근 21명을 기용하는 정실인사를 단행하면서 당시 량스이를 필두로 수배령이 하나둘씩 해제되던 구교통계가 크게 반발, 양대 계파 간의 파벌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돤치루이 정권을 등에 업은 신교통계가 구교통계 인사를 배제 및 회유하면서 교통차장 예궁차오(葉恭綽)와 같이 얼마 안 되는 구교통계 주요 인사들마저 해임되었고 금성은행, 대륙은행, 중남은행 등등 구교통계가 장악했던 주요 은행들도 속속들이 장악되었으며, 특히 돤치루이가 자신의 독재를 위해 설립한 신국회(안복 국회)에서도 안복계의 뒤를 이어 제1야당에 오를 정도의 위상을 확보하면서[2] 세대교체가 완료되었다.

신교통계가 구교통계에 비해 가졌던 장점은 바로 정치력이었다. 청나라 시절 위안스카이의 최측근 세력으로 시작했기에 위안스카이가 몰락하면서 반역자의 낙인이 찍혀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구교통계와 달리, 구교통계가 성장할 당시 아직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 세대 밑의 신진 인사들로 구성된 신교통계는 이러한 낙인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고 지나치게 방대한 규모를 가진 구교통계와 달리 인적 구성에서 20~3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수정예였던데다 돤치루이, 쉬스창, 리위안훙 등 다양한 파벌의 인사들과 일시적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강력한 정치적 수단인 국회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다.

이렇듯 자신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으면서도 내칠 수 없는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군벌들은 노력했으며,[3] 장훈복벽안직전쟁을 틈타 량스이가 잠시 총리직에 오르면서 구교통계를 재건하려 시도하는 등 질긴 명줄을 이어가다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끝을 맞이한다. 그들을 반동자본가로 낙인찍은 국민당에 의해 교통계는 해산되었고 그 재산은 친국민당 은행가 쿵샹시쑹쯔원에게 전부 넘어가게 되어 4대가족의 힘을 키우는데 사용되었다.[4]

3. 주요 인물

3.1. 구교통계

3.2. 신교통계

4. 참고문헌



[1] 신해혁명 이후 체신부의 후신 조직인 교통부와 교통은행의 앞글자를 따 교통계라고 명명되었다.[2] 제3당은 량치차오의 연구계였다.[3] 대표적으로 직예군벌우페이푸는 코민테른과 접촉하여 철도노동자들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하려했다. 이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일어난 일이 그 유명한 2.7 사건이다.[4] 물론 쑹쯔원은 장제스와 사이가 그렇게까지 좋지 못했고 국부천대 이후엔 미국으로 망명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