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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 제17대 황제 당의종 시기인 859년 절동인 구보(裘甫)가 일으킨 반란. 당나라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반란 중 하나이다.2. 배경
당나라는 건국 이래 앙쯔강 하류 일대(지금의 안후이성, 장쑤성, 저장성 일대)의 비옥한 곡창 지대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물자를 재정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래 남방의 여러 번진에서 반란이 빗발쳤고 또 장안ㆍ낙양과의 거리도 제법 있다보니, 당나라의 재정기반이었던 이 일대의 지배권도 위태로워졌다. 이에 당헌종은 정부에 반항하는 번진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중앙의 고관을 절도사로 파견하여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했다.그런데 이 절도사들은 임기가 짧았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승진을 위한 단계로 여기고 부임지에서의 통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로지 감군으로 파견된 환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막대한 재물을 '진봉'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에 바쳤다. 진봉(進奉)은 번진에서 경비로 쓰고 남은 잉여 재원을 중앙에 반환한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병사에 대한 급여를 유용하고, 현지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매겨 착취하는 등 온갖 수탈을 자행했다.
진봉은 강회(江淮. 현재 양쯔강 중하류의 완후이성의 화이허강 일대)에서 특히 두드러졌고, 이 때문에 이 지역의 백성과 병사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그러나 중앙은 이를 단속하기는 커녕 오히려 많이 보낸 절도사의 근무 평가를 잘 쳐주는 등 착취를 독려하는 행태를 보였다. 결국 강회 일대의 병사들은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855년 절동에서 반란이 처음 벌어졌고, 858년 선주 도장 강전태(康全泰)가 난을 일으켜 관찰사 정훈을 내쫓았다가 회남 절도사 최현에게 패해 400명과 함께 목이 베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남과 호남, 강서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절도사를 구금하거나 추방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이렇듯 강남 일대가 병사들의 거듭된 반란으로 혼란에 휩싸이자,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일반 백성도 들고 일어났다.
3. 구보의 등장
구보(裘甫)는 절동 사람이다. 그는 859년 12월경 무리 100명을 모아 상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뒤이어 섬현을 압박했다. 이에 절동 관찰사 정지덕은 토격부사 유경과 부장 범거식을 파견하여 군사 300명을 이끌고 태주군에서 구보 일당을 토벌하게 했다. 860년 정월 4일에 동백관 앞에서 양측이 격돌하였는데, 범거식은 전사하고 유경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후 구보는 14일에 천여 명을 이끌고 섬현을 함락시킨 뒤 부고를 열어 장사를 모집해 수 천 명에 달하는 무리를 확보했다.정지덕은 이에 맞서기 위해 다시 병졸을 모집하였으나, 군리들이 뇌물을 받고 힘센 사람의 군역을 면제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만 모였다. 장지덕은 소장 심군종, 부장 장공서, 망해 진장 이규를 파견해 새로 모집한 병졸 500명을 거느리고 구보를 치게 했다. 2월 10일에 섬서에서 양측이 맞붙었다. 이때 구보는 삼계의 남쪽에 복병을 두고 북쪽에 진을 친 뒤 냇물 상류를 막아 건널 수 있게 했다. 이후 관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척 하며 후퇴하자, 관군은 속아 넘어가 뒤를 쫓았다. 그러다 관군이 냇물 반을 건넜을 때, 구보가 막은 것을 터트리면서 물이 크게 닥쳤고, 관군은 크게 패했다. 심군종, 장공서, 이규 모두 전사하였고, 관군은 거의 다 없어졌다.
구보가 관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는 소식이 퍼지자, 산과 바다에 있던 여러 도적과 다른 도의 유랑민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결과 3만에 달하는 무리가 그에게 복종하였고, 구보는 이들을 32대로 나누었다. 또한 책사로 유왕을 맞이하였고, 유경과 유종간을 장수로 삼았다. 구보는 편지와 비단을 각지로 보내 귀순을 요구했다. 또한 스스로 천하도지평마사라 칭하고, 기원을 나평(羅平)으로 고쳤으며, 인장을 주조하여 천평(天平)이라 하였다. 물자와 양식을 크게 모으고 훌륭한 공인(工人)을 모집해 무기와 기계를 정비하니, 그의 명성이 중원을 흔들었다.
절동 관찰사 정지덕은 조정에 표문을 거듭 올려서 급박한 사정을 설명하고, 이웃한 도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절서에서는 아장 능무정에게 400명을 맡겨 구보 토벌을 맡겼고, 선흡에서는 아장 백종에게 300명을 이끌고 정지덕을 돕게 했다. 정지덕은 지원군과 합세한 뒤 외곽의 성문과 등소강에 주둔하였으나, 얼마 안 있다가 다시 부 안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지켰다. 그가 구원 온 장사들에게 급료를 평소의 13배나 올려 지급했으나, 장사들은 오히려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고 구보와 싸울 때 온갖 태업을 일삼았다. 어떤 이는 병을 핑계 댔고, 어떤 이는 일부러 말에서 떨어졌으며, 전투에 참가하는 대가로 먼저 군직과 훈급을 요구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으니 성과가 있을 리 없었다.
4. 왕식의 등장
구보의 유격 기병이 평수진의 동쪽에 있는 작은 강에 이르자, 성 안에 있는 사민들은 배 안에 양식을 저장하고 밤에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며 각기 달아나고 흩어질 것을 모의했다. 정지덕은 이같이 위급한 상황임에도 장사들이 좀처럼 전투를 진지하게 임하지 않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조정에서는 무장을 뽑아 그를 대신하기로 했다. 이때 하후자가 건의했다."절동은 산과 바다가 그윽하고 막혀서 계책을 가지고서 빼앗을 수 있으나 힘으로 공격하기 어렵습니다. 서반 가운데에는 말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전에 안남 도호였던 왕식(王式)은 비록 유생 집안의 아들이나 안남에서 위엄으로 화이를 복종시켜 명성이 멀고 가까운 곳에 알려졌으린 일을 맡길 만합니다."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왕식을 관찰사로 삼고, 정지덕을 징소하여 빈객으로 삼았다. 3월 초하루에 왕식이 들어와 당의종을 알현하자, 도적을 토벌할 책략을 물었다. 왕식은 "군사를 얻기만 하면 도적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어떤 환관이 곁에서 모시다가 말했다.
"군사를 발동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매우 큽니다."
왕식이 말했다.
"신이 국가를 위하여서는 비용을 아까워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군사가 많으면 도적은 속히 깨뜨려지니 그 비용도 줄어듭니다. 만약 군사가 적어 도적을 이길 수 없다면 세월을 늘리고 끌어서 도적의 형세는 더욱 커지니, 강, 회의 여러 도적들이 장차 벌떼처럼 일어나 그것에 호응할 것입니다. 국가의 용도는 다 강, 회를 바라보는데, 만약 막고 끊어서 통하지 않게 되면 위로는 구요로부터 아래로는 10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급할 것이 없으니, 그 비용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당의종이 환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응당 그에게 군사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왕식은 충무, 의성, 회남 등 여러 도의 병사를 징발하여 구보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구보는 군사를 나누어 구주와 무주를 약탈했다. 하지만 무주의 압아인 방질, 산장인 누회, 구주십장 방겸심이 군사를 거느리고 험준한 곳을 막았고, 명주에서도 백성들이 재물을 내어 용기 있는 병사를 모아 반격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구보는 군사를 파견해 태주를 약탈하고 당흥을 깨뜨렸으며, 3월 19일에 스스로 1만 명을 거느리고 상우를 약탈하고, 23일에 여요로 들어가 현승과 현위를 죽였고, 동쪽으로 가서 자계를 깨뜨리고 봉화로 들어가 영해에 이르러 현령을 죽였으며, 군사를 나누어 상산을 포위했다. 그는 지나가는 곳마다 젊고 건장한 사람을 포로로 하고 늙고 약한 사람을 짓밟아서 죽였다.
이때 왕식이 진압군을 이끌고 출동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당시 무리와 더불어 술을 마시던 구보는 이 소식을 듣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책사 유왕이 탄식하며 건의했다.
"이와 같은 무리를 가지고서 계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진실로 애석하게 여길 만합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왕중승(王中承: 중승인 왕식)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도록 하였는데, 듣건대 그 사람의 지혜와 용기는 대적할 사람이 없으며 40일이 되지 않아 반드시 도착할 것입니다. 평마사께서는 의당 급히 군사를 이끌고 월주를 빼앗고, 성곽을 의지하고, 부고를 점거하며 군사 5천을 파견하여 서릉을 지키고, 절강을 따라 보루를 쌓고서 막으며 함선을 크게 모아야 합니다.
틈을 얻으면 멀리까지 말을 몰아서 전진하여 절서를 빼앗고, 대강을 지나 양주의 재물을 빼앗아서 스스로 채우고 돌아와서 석두성을 정비하여 그곳을 지키면, 선흡과 강서에서는 반드시 호응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유종간을 파견하여 1만 명을 가지고서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가서 복주와 건주를 빼앗게 합니다. 이와 같이하면 국가에 공부를 내는 땅은 다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다만 자손이 지키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걱정이 없을 것을 보장합니다."
틈을 얻으면 멀리까지 말을 몰아서 전진하여 절서를 빼앗고, 대강을 지나 양주의 재물을 빼앗아서 스스로 채우고 돌아와서 석두성을 정비하여 그곳을 지키면, 선흡과 강서에서는 반드시 호응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유종간을 파견하여 1만 명을 가지고서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가서 복주와 건주를 빼앗게 합니다. 이와 같이하면 국가에 공부를 내는 땅은 다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다만 자손이 지키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걱정이 없을 것을 보장합니다."
구보가 답했다.
"지금은 취했으니 내일 이를 논의합시다!"
유왕은 구보가 자신의 계책을 얼른 받아들이지 않자 화가 나 겉으로 취한 척하며 나왔다. 이때 진사 왕로가 빈객으로 있었는데, 그가 구보에게 유세하였다.
"유부사(유왕)의 책략은 곧 손권이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천하의 큰 혼란을 틈탔으니, 그러므로 강동을 점거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중국은 무사하니 이 공로는 이루기에 쉽지않습니다. 무리를 끼고 험준한 곳을 점거하여 스스로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며, 육지에서 밭을 갈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급하면 달아나 바다에 있는 섬으로 들어가는 것이 만 가지로 안전한 계책입니다."
구보는 왕로의 진언이 일리 있다고 여겼고, 또 왕식을 두려워해 미적거리며 결정하지 않았다. 960년 4월 왕식이 시구에 도착하였는데, 의성군이 정돈되지 않자 그곳 장수의 목을 베려고 하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서 풀어줬다. 이로부터 그의 군대가 지나가는 곳은 사람이 없는 것과 같았다. 서릉에 이르렀을 때, 구보가 사자를 파견하여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했다. 이에 왕식이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항복할 마음이 없고, 다만 내가 하는 바를 엿보려고 하는 것이다. 또 나로 하여금 교만하고 게으르도록 만들려는 것뿐이다."
그는 곧바로 사자에게 말했다.
"구보가 면박하고 온다면 응당 너의 죽음을 면해줄 것이다."
이후 정지덕과 송별연을 베풀고 조정으로 돌아가게 한 뒤, 16일에 군령을 정비하여 태업을 일삼던 장사들을 처벌했다. 이로 인해 병을 핑계로 집에 누웠던 사람은 일어났으며, 관직을 승진시켜 달라고 요구하던 사람은 잠자코 있었다. 구보의 별수인 홍사간과 허회능이 부하를 인솔하고 항복하자, 왕식이 말했다.
"네가 항복한 것은 옳지만 응당 스스로 달라진 것을 모범으로 세워라."
그는 홍사간과 허회능의 무리를 선봉으로 세워서 공로를 세우게 한뒤,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게 관직을 주도록 했다. 또한 도적의 간첩이 월주에 들어왔을 때 군리가 그를 숨기고 음식을 준 사실이 발각되자, 왕식은 간첩을 숨겨준 이를 모두 체포하여 목을 베었으며, 장리 중에 도적의 눈치를 살피며 내통하던 자들을 벌했으며, 경계를 더욱 강화해 간첩이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해 구보의 무리는 관군의 작전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 이후 왕식이 여러 현에 명을 내려 관청의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간언했다.
"도적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군대는 먹을 것이 급하니 양식을 풀어줘서는 안 됩니다."
왕식이 말했다.
"네가 알 바가 아니다."
관군에 기병이 적자, 왕식은 토번과 회골 출신 100명을 뽑아 기병으로 삼았다. 이들은 오래도록 군대에 잡아매여 있었고 처지도 궁핍하기 짝이 없었는데, 양식이 이들의 부모 처자를 구제하고 급료를 높여주자 모두 울면서 절하고 목숨을 바치기를 원했다. 왕식은 기병장수 석종본으로 하여금 이들을 거느리게 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봉수를 만들어서 도적이 멀고 가까운지, 수가 많고 적은지를 살피자고 권했으나, 왕식은 웃으며 응답하지 않고 나약한 병사를 뽑아 건장한 말을 타도록 하고, 그에게 무기를 주어 염탐하는 기병으로 삼았다. 관군 장수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겼지만 감히 묻지 않았다.
왕식은 여러 병영의 병졸과 토단(土團: 토착민들을 모집하여 만든 별단)의 자제를 살펴서 4천 명을 얻고, 부하(府下)에 지키는 병사가 없자 다시 토단에 속한 1천 명을 관적에 올려 보충하였다. 이후 선흡의 장수 백종과 절서의 장수 능무정에게 명령하여 본군을 인솔하도록 하고, 북쪽에서 온 장수인 한종정 등은 토단을 인솔하여 1천 명을 합치도록 했으며, 석종본으로 하여금 기병을 인솔하고 선봉으로 하여 상우로부터 봉화로 나아가서 상산의 포위망을 풀도록 하고 동로군이라 칭하게 했다. 또 의성의 장수인 백종건, 충무의 장수 유군초, 회남의 장수 만린은 본군을 인솔하여 태주의 당흥군과 합쳐서 남로군이라 부르게 했다. 왕식은 제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어렵고 쉬운 것을 가지고 다투지 말고, 사는 집에 불사르지 말며, 평민을 죽여서 수급을 늘리지 말라! 평민 중에서 위협을 받고 좇은 사람은 모아서 항복시키도록 하라. 도적의 황금과 비단을 얻으면 관에서 묻지 않겠다. 포로로 얻은 사람은 모두 월인이니 풀어주도록 하라."
5. 반란 토벌
서기 860년 4월 23일, 남로군은 반란군이 점거했던 옥주재를 공략했다. 뒤이어 24일에 신창재를 공략하고 반란군 장수 모응천을 깨뜨린 뒤 당흥을 탈환했다. 5월 2일에 동로군이 반란군 장소 손마기를 영해에서 깨뜨렸으며, 9일에 남로군이 반란군 장수 유왕과 모응천을 당흥의 남곡에서 크게 격파하고 모응천의 목을 베었다. 이보다 앞서 왕식이 군사가 적어서 주문을 올려 충무와 의성군을 징발하고, 소의군을 요청하자, 당의종은 이를 따랐다.이에 삼도의 군사가 월주에 도착하자, 왕식은 충무의 장수 장인에게 300명을 거느리고 당흥에 주둔하여 반란군이 남쪽으로 나가는 걸 차단하게 했으며, 의성의 장수 고라예게는 300명을 거느리고 태주의 토군과 합세한 뒤 지름길을 통해 영해로 가서 반란군의 소굴을 공격하게 했다. 또 소의의 장수 혈절규로 하여금 400명을 거느리고 동로군과 합세해 반란군오 명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게 했다.
11일에 남로군이 해유진에서 반란군을 대파하자, 반란군은 용계동으로 철수했다. 19일에 관군이 동굴 입구에 주둔하자, 반란군이 동굴을 나와 싸웠으나 크게 패했다. 20일에 고라예가 반란군의 별수 유평천의 영채를 기습하여 크게 이겼다. 이리하여 관군은 반란군과 19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상황이 이와 같자, 유왕이 구보에게 항의했다.
"지난번에 나의 계책을 좆아 월주에 들어갔으면 어찌 이런 고통이 있겠습니까!"
유왕은 녹색 옷을 입고 있던 왕로 등 진사 몇 명의 목을 모조리 베며 말했다.
"나의 계책을 어지럽힌 자는 이 푸른 벌레들이다!"
이 무렵, 고라예는 영해에서 승리한 뒤 도망하고 흩어진 백성을 거두어 7천여 명을 얻었다. 왕식은반란군이 바다로 도망치면 세월이 지나도 사로잡을 수 없다면서, 고라예에게 해구에 진을 쳐서 적이 바다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였다. 또 망해의 진장 운사익과 절서 장수 왕극용에게 명령해 수군을 거느리고 해변을 돌도록 하였다. 운사익 등은 반란군 장수 유간을 영해의 동쪽에서 만났는데, 반란군은 적관군이 오자 모두 배를 버리고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관군은 적의 배 17척을 확보한 뒤 모조리 불살랐다.
구보는 영해를 잃자 무리를 인솔하여 남진관 아래에 주둔하느 그 수가 1만여 명이었다. 관군은 이들을 압박해 들어갔고, 5월 22일 동로군이 반란군 장수 손마기를 상류촌에서 깨뜨렸다. 이에 반란군 장수 왕고가 귀순했다. 5월 29일 동로군이 구보를 남진관에서 크게 격파하고 수천 급을 참수했다. 이에 반란군은 비단을 길에 가득 버려서 관군이 이를 줍느라 자기들을 쫒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혈절규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감히 돌아보는 사람은 머리를 베겠다!"
병사들은 감히 비단을 줍지 않고 반란군을 계속 추격했다. 구보의 반란군은 관군에게 쫓기다가 6월 5일에 섬현으로 들어가 산골짜기에 숨었다. 관군은 구보가 숨은 곳을 알지 못해 헤맸다. 이에 의성의 장수 장인이 당흥에서 반란군 포로를 잡아 고문하자, 포로가 "구보는 섬현으로 숨었습니다. 저를 놓아주면 군대를 위해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에 장인은 그를 앞세워 섬현에 도착한 뒤 동남쪽을 막았다.
왕식은 구보가 섬현에 숨었다는 보고를 듣자 명령을 내려 동, 남 양로군에게 가서 섬현에서 합류하게 하고, 12일에 섬현을 포위했다. 구보가 성을 매우 굳게 지켜서 쉽게 함락되지 않자, 제장은 냇물의 물길을 끊어서 물을 마르게 할 것을 논의했다. 구보는 이를 막기 위해 출격했고, 사흘간 83회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구보는 패하여 성으로 도망쳤지만, 관군 역시 피해가 크고 지쳤다. 구보가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하자, 제장은 이를 왕식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왕식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적은 조금 쉬려고 할 뿐이다. 더욱 삼가 대비하면 공로가 바로 이루어진다."
구보는 과연 다시 출격하여 3차례 교전했지만, 관군이 사전에 대비해둬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월 21일 밤에 구보, 유왕, 유경은 100여 명을 이끌고 나와 성과 수십 보 떨어진 거리에서 관군에게 항복 의사를 청했다. 이에 관군이 빨리 달려가 성과 그들의 사이를 차단하고, 구보 일당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이리하여 7개월간 이어진 구보의 반란은 종식되었다.
6. 수습
구보 일당이 월주로 이송되자, 왕식은 유왕과 유경 등 20여 명을 요참하고 구보를 형틀에 채워 경사로 송치했다. 구보의 수하 유종간은 건장한 병사 500명을 인솔하여 경계가 해이해진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으나, 관군이 이를 추격하여 7월 9일에 대란산에서 섬멸했다. 태주 자사 이사망이 도적 가운데 서로 잡아서 목을 베어서 속죄하려는 사람을 모집하자, 항복한 사람 수백 명이 유종간의 머리를 베어서 바쳤다. 제장이 월주로 돌아가자, 왕식이 술자리를 크게 베풀었다. 이때 제장이 물었다."저희는 군대 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오래도록 진 치는 일을 수행하다가 이 해에 공을 쫓아 도적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로이 알아듣게 해주시지 않은 것이 있어서 감히 묻습니다. 공께서 처음 도착하여 군대에는 먹을 것이 긴급하였으나, 황급히 그것을 풀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였으니, 어떤 연유입니까?"
왕식이 답했다.
"이것은 알기 쉽다. 도적이 곡식을 모아서 굶주린 사람을 유혹하니, 내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저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또 여러 현에는 지키는 병사가 없으니 도적이 도착하면 창고의 곡식은 그들에게 밑천이 되기에 충분할 따름이다."
제장이 다시 물었다.
"봉수를 설치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왕식이 답했다.
"봉수란 속히 군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군사가 다 가면 성 안에는 뒤를 이을 군사가 없으니 다만 사민을 놀라게 하고 스스로 무너지고 어지럽게 만들 뿐이다."
제장이 다시 물었다.
"나약한 병사로 하여금 척후기병을 삼고 무기를 적게 준 까닭은 무엇입니까?"
왕식이 답했다.
"용맹한 병사는 날카로운 무기를 잡고서 적을 만나면 힘을 헤아리지 않고 싸운다. 싸우다 죽는다면 도적이 도착해도 알지 못한다."
제장은 왕식의 지혜에 감탄하여 "대인의 지혜는 따라잡을 바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8월에 경사에 도착한 구보는 시장에 끌려가 참수형에 처해졌다.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왕식은 검교우산기상사에 봉해졌고, 제장들 역시 각기 공로에 따라 벼슬과 상을 받았다.
구보의 난은 왕조 말기에 흔히 벌어지는 민란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처음에 100명으로 시작된 반란이 수만 명으로 늘어나 강남 일대를 요동치게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민심은 수탈을 일삼는 당나라 조정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조정은 반란 진압을 기뻐할 뿐 별다른 후속 대책을 취하지 않았고, 그 결과 8년 만에 방훈의 난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