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7:49:59

구지란왈라

파일:파키스탄 이란 구지란.jpg
1906년에 건립된 도심의 시계탑 (간타 가르)
파일:구지란이란.jpg
금융 지구의 야경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펀자브주의 도시
구지란왈라
UR : گوجرانوالہ
EN : Gujranwala
국가
[[파키스탄|]][[틀:국기|]][[틀:국기|]]
상위 행정구역 구지란왈라 지구
면적 240 km²
인구 2,027,001 명 (2017년)
공용어 펀자브어
종교 이슬람교 96.6% 기독교 3.2%
시간대 UTC +5 (PKT)
지역번호 055
우편번호 52250
웹사이트 구지란왈라 지구정부 홈페이지

1. 개요2. 역사3. 여담4. 갤러리

1. 개요

파키스탄 펀자브주의 도시. 라호르에서 북쪽으로 60km, 시알코트에서 서남쪽으로 40km, 파이살라바드에서 동북쪽으로 100km, 라왈핀디에서 동남쪽으로 150km 떨어진 체납 강과 라비 강 사이의 평원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205만명으로, 카라치-라호르-파이살라바드-라왈핀디에 이은 파키스탄 제5의 도시이다. 지명은 '구자르 족의 점토'란 뜻으로, 18세기 구자르 족이 도시를 건립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시크 왕국의 전신인 수케르차키아 미슬의 수도였고 마하라자 란지트 싱의 고향으로써 근대 남아시아사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현대 파키스탄에서 구지란왈라는 카라치와 파이살라바드에 이은 산업 거점으로, 전체 GDP의 8% 가량을 차지한다. 특히 인근 시알코트 및 구지라트와 함께 수출 주도 산업 지역인 황금 삼각 지대를 이룬다. 시크 시기부터 구획된 시가지는 지금도 장방형으로 정돈되어 있다. 유일하게 복잡하게 얽혀있는 구도심에는 세란왈라 바란다리 궁전과 란지트 싱 탄신지, 옛 성문 등이 남아있다. 도시를 두르는 순환도로 안밖에는 이슬라미아 대학교, 펀자브 대학교 및 사르고다 대학교 구지란왈라 캠퍼스 등의 대학이 있다. 도심부의 진나 경기장에서는 1987년과 1996년 크리켓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2. 역사

파일:이란 란지트.jpg
란지트 싱 탄생지

1707년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 제국은 분열되었고, 1739년 나디르샤와 1762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혼란기에 펀자브 지역은 시크교 계열 미슬 (공국)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중 1758년 구지란왈라를 장악한 차라트 싱이 건립한 수케르차키아 미슬은 다른 시크 공국들과 연합하여 두라니 군과 맞서 연승을 거두며 두각을 드러내었다. 1763년 구지란왈라를 수도로 정한 차라트 싱은 이어진 시크 내전에서 1774년 잠무의 지한다 싱과 싸우다 전사했지만, 후계자인 아들 마하 싱은 자트와 라지푸트 무슬림 세력을 모두 격파하고 펀자브 북부를 평정하였다. 1780년 수도 구지라왈라에서 태어난 마하 싱의 아들 란지트 싱은 1792년 집권한 후 선대의 정복전을 이어가 1799년 마침내 아프간 인들을 축출하고 라호르를 점령하였다. 비록 란지트 싱 하의 명장 하리 싱 날와가 구지란왈라에 높은 진흙 성벽을 세우고 바둑판형 시가지를 구획했지만, 1801년 수도는 라호르로 옮겨졌다.

라호르를 점령한 란지트 싱은 다른 시크 세력들을 통일하여 시크 왕국으로 개편하였다. 수도 지위를 잃은 구지란왈라는 상대적으로 쇠퇴했지만, 여전히 바자르에는 5백개의 점포가 있고 도시 변두리에는 많은 정원들이 있었다. 영국-시크 전쟁의 결과 1848년 구지란왈라는 영국령이 되었고, 빠르게 발전하였다. 1881년 철도역, 1889년 구루 나와르 칼사 대학교[1], 1892년 칸키 수문보가 세워졌다. 1919년 암리차르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 후 펀자브 각지에서는 반영 봉기가 일어났고, 구지란왈라에서도 철도역과 시계탑 및 관공서가 불탔다. 그 과정에서 역사 기록들도 다수 사라졌다. 영국 당국은 기관총을 탑재한 경비행기까지 동원, 시내를 '폭격'하여 봉기를 진압하였다. 1941년 기준 구지란왈라의 91만 인구 중 27만명은 비무슬림이었고, 그들은 전체 자산의 2/3을 소유하였다. 힌두, 시크, 무슬림은 각각 다른 구역에 주로 분포하였다.

1947년 분할 당시 펀잡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구지란왈라에서도 힌두 & 시크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로하르 (대장장이) 계층이 주도한 무슬림 군중은 9월 암리차르에서 벌어진 보복 학살에 동참했고, 구지란왈라에는 암리차르와 루디아나에서 온 무슬림 난민들이 기존 비무슬림 구역에 정착하였다. 다만 취직에 실패한 이들은 카라치로 재이주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 구지란왈라는 산업 발전과 함께 빠르게 성장하였고, 풍부한 노동력 덕에 영국 지배기부터 이어지던 철강업이 흥성하였다. 시가지는 점차 남쪽 라호르 방면으로 확장되고 있다.

3. 여담

현지에서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주요 멤버 정국의 생일에는 빌딩을 덮는 축하 현수막이 걸리기도 한다.

4. 갤러리

파일:구지란 이란 역.jpg
19세기에 세워진 기차역

파일:이란 파키스탄 바란다리.jpg

파일:셰란왈라 이란.jpg
셰란왈라 바란다리 궁전

[1] 다만 이는 후일 루디아나로 이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