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8년 7월 1일 |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서문내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서문안)[1] | |
사망 | 1965년 8월 31일 |
경상남도 밀양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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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설만진은 그의 처남이다.
2. 생애
권잠술은 1898년 7월 1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서문내리(현 밀양시 내일동 서문안)에서 아버지 권종호(權宗鎬)와 어머니 황옥이(黃玉伊)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밀양군 밀양면 내이동(현 밀양시 내이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그는 7세 때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쳤고, 12세인 1910년에 전홍표가 옛 밀양군관청 자리에서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던 동화학교(同和學校)에 입학하여 김소지·노재석·최수봉·김상윤·김희백 등과 함께 2년여 간 신학문을 익혔다. 동화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친을 도와 농업에 종사했고, 1914년 16세의 나이로 설경도(薛敬道, 1873. 2. 10 ~ 1922. 2. 18)[2]의 장녀 설만수(薛萬守)를 아내로 맞이했다.
1919년 3월 13일 밀양군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만세운동에 가담하려 했지만 처자를 둔 몸이라 가담하지 못했고,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 끝에 1920년 11월 경기도 경성부에서 밀양군 출신의 홍재문, 김덕곤(金德坤)과 의기투합하여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그는 동지들과 함께 그해 12월에 귀향하여 밀양군 부북면 사포리에 살던 부호 안홍원(安弘遠)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하던 유순근(柳順根)을 일제 관헌에게 밀고한 사실을 이유로 사형집행을 실시하기 위해 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견원이라고 밝히고, 사형집행을 면하려면 군자금 50,000원을 출금(出金)할 것을 요구하여 결국 금 3,000원을 모집하였다.
이후에도 밀양군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지만 얼마 후 일제 경찰에 소위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검거 직후 취조 중에 일본 경찰의 구타와 가혹한 매질, 그리고 거꾸로 매달려 물고문을 많이 받은 후유증으로 왼쪽 코에 알러지가 생겨 고름을 짜내고 심지를 넣는 등 고초를 겪었고, 이것이 나중에는 결국 골수암까지 발전하고 말아 일생 동안 방사선치료를 받으며 연명해야 했다.#
그 뒤 1921년 6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1921년 8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징역 7년형으로 일부 감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대구형무소에서는 형형성적이 우수했다고 하여 투옥된지 4년 7개월 13일 만인 1926년 2월 15일 가출옥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초야에 묻혀 농사에 전념했다. 1941년 아내 설만수가 사망한 뒤 1943년 김덕순(金德順)과 재혼했다.
8.15 광복 이후, 권잠술은 1946년부터 무안면 중산리에서 숯가마를 경영했다. 그러나 데리고 있던 서기로부터 사기를 당해 그만두었고, 6.25 전쟁 때는 차남 권이수(權貳守)가 참전하였다가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기도 했다. 1955년부터는 밀양읍 내이동에서 밀양여인숙을 경영하다가, 1965년 8월 31일 밀양군에서 골수암으로 인해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권잠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여담
- 평소 식구들이 집안에서 일본어를 절대로 말하지 못하게 했고, 혹시, 실수로라도 일본어 단어만 중얼거려도 크게 화를 냈다고 하니 일제에 대한 울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