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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어로 의미하는 동명의 단어에 대한 내용은 흑연 문서 참고하십시오. 그라피테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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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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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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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FIFA 푸스카스상 | ||
수상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2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 3위 그라피테 |
SporTV | ||
SporTelevisor | ||
<colbgcolor=#0D122E> 이름 | 그라피테[1] Grafite[2] | |
K리그 등록명 | 바티스타 | |
본명 | 에지나우두 바치스타 리바니우 Edinaldo Batista Libânio | |
출생 | 1979년 4월 2일([age(1979-04-02)]세) | |
상파울루주 준지아이 | ||
국적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9cm, 체중 81kg | |
직업 |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미드필더[3] / 은퇴) 축구 해설자 | |
주발 | 오른발 | |
소속 | <colbgcolor=#0D122E> 선수 | 페호비아리아 (2001) 산타크루스 FC (2001) 그레미우 (2002) 안양 LG 치타스 (2003) 고이아스 EC (2003) 상파울루 FC (2004~2005) 르망 FC (2006~2007) VfL 볼프스부르크 (2007~2011) 샤바브 알 아흘리 클럽 (2011~2015) 알 사드 SC (2015) 산타크루스 FC (2015~2016)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2017) 산타크루스 FC (2017~2018) |
해설 | SporTV (2021~ ) | |
국가대표 | 4경기 1골 (브라질 / 2005~2010) | |
SN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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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현재 SporTV의 해설자이다.데뷔 이후 십여년 간 재능이 100% 발휘되지 못하고 외면받으며 그대로 묻히는 듯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특유의 성실함과 열정,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통해 기어코 재능을 꽃피우며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고 마침내 유럽 제일의 리그 중 하나인 분데스리가에서 득점왕과 우승을 차지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남겼다.
국내 언론은 한때 그가 K리그에서 뛰었던 것을 들어 "K리그가 그를 키웠다"는 주장을 했지만 정작 그가 K리그에서 활동했을 때 브라질에서 방출된 그를 알아보고 데려온 당시 안양 LG의 스카우터정도라면 모를까, 그를 알아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의 성공은 어디까지나 그의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지 K리그가 키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포텐이 터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인 이전까지의 수많은 선수 경력에서의 쓴맛 중 K리그에서의 생활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아예 연관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한국에서 포텐이 터진 이후 이를 발판으로 유럽에서 맹활약을 이어간 미슬라프 오르시치와 달리 그라피테의 성공에 K리그가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2.1.1. 브라질의 무명 선수
상파울루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는 어릴 때부터 동네를 돌아다니며 쓰레기 봉지를 팔면서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1999년, 그는 20세의 나이에 축구에 관심을 돌려 동네의 아마추어 축구클럽인 마토넨시(Matonense)에 소속되었다. 20세의 나이면 축구인으로선 대단히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것이지만, 그는 놀랍게도 팀동료들 중에서 실력이 제일 좋았고, 그 덕분에 스카우터의 눈에 띄어 2001년에 상파울루 주의 지역 리그에 소속된 축구 클럽인 페로비아리아에 입단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단 한경기도 출장하지 않았고 시즌 중반에 산타크루즈로 이적했다그라피테는 산타크루즈에서 22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지만, 팀은 2부리그로 강등되고 말았다. 하지만 1부리그 클럽인 그레미우는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2002년에 70만 헤알(브라질의 화폐단위)을 주고 영입했다. 그러나 그는 시즌 개막전에서 심각한 무릎부상을 입고 말았고, 결국 그는 단지 6경기에만 출장하여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팀에서 방출되고 말았다. 이제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 할 지도 모르던 상황에서, 안양 LG 치타스 스카우터가 그에게 접근했다. 이에 그라피테는 잘 알지도 못하는 동아시아의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2.1.2. 안양 LG 치타스
2003년, 그라피치는 안양 LG 치타스와 계약했다. 등록명은 '바티스타'였다. 그는 안양에서 9경기를 뛰었으나 별로 활약하지 못했다. 게다가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지 못해 팀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결국 브라질로 쓸쓸히 돌아갔다.
그런데 조광래 당시 안양 LG 치타스 감독은 2016년 1월 포포투코리아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뛰던 게 그래도 도움이 된 거라고 인터뷰했다고 한다. 특히 그라피테가 볼프스부르크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고 있을 당시 조광래 감독의 언플이 극에 달했는데, 자신이 그라피테를 키웠다고 하는 말을 많이 했다.
한때 그라피테가 한국에서 윙백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도 돌았으나, 조광래가 윙백 덕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라피치까지 윙백으로 썼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연맹의 공식 기록에도 FW로 표기되어있고 당시 기록상 6선발 3교체에 슈팅이 15개, 오프사이드가 6개다. 윙백의 스탯으로 보기 어렵다. 애초에 윙백으로 쓸 거였으면 왜 10번을 주고 FW로 등록했겠는가. 덧붙여 따로 윙백 훈련을 시킨게 아니라 볼 컨트롤, 공간 침투, 드리블 후 슈팅 같은 공격수 훈련을 시켰다.
관련 인터뷰
2.1.3. 고이아스 EC
한국에서 실패하고 브라질로 귀환한 그는 얼마 후 고이아스와 자유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여기서마저 실패하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걸 절감하고 엄청난 훈련량을 감수하며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 결과, 그는 고이아스에서 축구선수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팀동료 딤바와 함께 투톱을 형성하여 리그를 평정했다. 딤바가 31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선정될 때 20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같은 활약에 2003 볼라 지 프레타에 선정되었다.2.1.4. 상파울루 FC
그 후 브라질 축구 리그의 명문구단인 상파울루로 이적했다. 그곳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보여줬고 38경기에 출전하여 17골을 기록하여 상파울루의 리그 우승에 견인했다. 또한 상파울루는 이해에 FIFA 클럽 월드컵을 우승했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도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상파울루에서의 첫 시즌에서 3관왕에 올랐다.2.1.5. 르망 FC
이러한 그의 활약에 주목한 프랑스의 르망 FC가 접근했고 2006년 1월 그라피치의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2월에 데뷔전을 치른 그라피테는 2005-06 시즌에 11경기 3골을 기록했다.그리고 이듬해인 2006-07 시즌, 그라피테는 리그에서 34경기 12골을 기록해 당당히 주전으로 발돋움했고, 그의 활약을 눈여겨보던 독일의 VfL 볼프스부르크가 2007년 여름에 접근했다.
그는 2007-08 시즌에 르망에서 시즌을 시작하였고, 6경기에 출장하여 2골을 기록한 뒤 560만 유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볼프스부르크로 이적했다.
2.1.6. VfL 볼프스부르크
환상의 듀오, 에딘 제코와 그라피테. |
첫 시즌이었던 2007-08 시즌, 그라피테는 독일에서의 첫 시즌을써무난하게 소화했다. 그는 리그 24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기록했고 포칼에서도 4경기 1골을 기록하여 종합 28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2008-09 시즌 그는 리그의 제왕으로 등극한다.
2008-09 시즌, 펠릭스 마가트가 볼프스부르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그라피테와 제코를 투톱으로 삼아 공격을 이끌어가게 했다.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그라피테는 제코와 환상적인 팀워크를 선보이며 볼프스부르크의 핵심 스트라이커가 됐다. 그는 리그 25경기에 출전하여 28골이라는 미친 골결정력을 선보이며 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같은 시기 제코는 리그에서 23골을 기록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리그에서만 51골을 몰아쳤다. 볼프스부르크는 이 두 사람의 활약을 앞세워 창단 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써| 특히 바이에른 뮌헨과의 리그 경기에서, 그는 여러 명의 수비수들을 제치고 뒷꿈치로 공을 톡 차서 골을 넣는 묘기를 선보였다. 이 골은 분데스리가 올 시즌의 골로 선정되었고, 수상은 못했지만 2009 FIFA 푸스카스상 후보에도 올랐다.[4] 이러한 활약으로 그라피테는 독일 축구 연맹이 주관하는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해설가가 제이제이 오코차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라피테는 다음 시즌에서도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2009년 9월 15일에 PFC CSKA 모스크바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써 그는 챔피언스리그 데뷔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역대 6번째 선수가 되었다. 그후 그라피테는 2009-10 시즌에서 30경기 11골을 기록했고 독일컵에서 2경기 1골을 기록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 8경기 6골을 기록, 총합 40경기 18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2010-11 시즌, 볼프스부르크는 성적이 급하락하여 강등권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그라피테는 리그 28경기에 출장하여 9골을 기록했지만 노쇠화가 역력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리그를 15위로 마무리한 볼프스부르크는 그를 방출명단에 올렸다. 2.1.7. 샤바브 알 아흘리 클럽 | <tablealign=center> |
2011년 6월 19일, 그라피테는 UAE의 축구 클럽인 샤바브 알 아흘리 클럽으로 이적했다. 그는 아랍에미리트 리그 첫 시즌, 리그 21경기 16골, 컵 대회 12경기 13골을 기록하며 총합 33경기에 출장 29골을 기록했다. 그는 이 활약으로 UAE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 후 2012-13 시즌엔 리그 20경기 24골을 기록했고 2013-14 시즌엔 25경기 19골을 기록했다. 이렇듯 그라피테는 3년간 알아흘리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며 79경기에 출장하여 63골을 기록했다.
2.1.8. 이후
2014년 여름, 그라피테는 알 사드 SC로 이적했고 시즌 중반까지 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이후 2015년 6월 1일, 그는 브라질로 돌아가 산타크루즈에 입단했다. 산타크루즈 측은 그의 등번호를 23번으로 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2017-18 시즌 종료 후 현역은퇴를 선언했다.2.2. 국가대표 경력
2005년에 그라피테는 브라질 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엔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아드리아누 등 기라성같은 공격수들이 즐비한 지라 그는 언제나 벤치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는 2010년 3월 2일에야 아일랜드와의 경기에 교체 출전함으로서 5년만에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다.2.2.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포르투갈과의 경기중 티아구 멘데스와의 경합 |
3. 기록
3.1. 대회 기록
- 상파울루 FC (2004~2005)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005
- FIFA 클럽 월드컵: 2005
- VfL 볼프스부르크 (2007~2011)
- 분데스리가: 2008-09
- 알 아흘리 클럽 (2011~2015)
- UAE 프레지던트컵: 2012-13
- 아라비안 걸프 리그: 2013-14
- UAE 슈퍼컵: 2012-13
- UAE 리그컵: 2011-12, 2013-14
3.2. 개인 수상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2009
- 분데스리가 득점왕: 2008-09
- 분데스리가 이달의 선수: 2009년 3월
- VDV 올해의 선수: 2008-09
- VDV 11: 2008-09
- 키커 올해의 공격수: 2009
- 키커 올해의 팀: 2008-09
- 볼라 지 프라타: 2003
- 독일 올해의 골: 2009
- 독일 이달의 골: 2009년 4월
- ESM 올해의 팀: 2008-09
4. 여담
- 본명은 이지나우두 바치스타 리바누(Edinaldo Batista Libânio)며 흔히 불리는 별명인 그라피치(Grafite)는 '흑연'이라는 뜻이다. 이 별명은 이스테방 소아리스 감독이 붙여줬다고 한다.
- 한국에서는 지금의 그라피테 말고도 k리그 시절 사용하던 바티스타, 앞서 설명한 그라피테의 어원인 흑연을 이용한 흑연맨이라고 불린다.
- k리그와 유럽에서 활동명이 다르다보니 k리그에서 바티스타를 봤다가 이후 챔스같은 유럽리그에서 그라피테를 접한 사람들은 저 선수가 바티스타였어?하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 현재의 제시 린가드가 오기 전까지 k리그에서 뛴 선수중 커리어 전체로 보면 가장 이름값이 높은 선수였다. 거기다 k리그에서 뛰었다가 이후 5대리그 진출로 성공이라는 특이한 기록이 있기에 이 시기 한국 언론사에서 그라피테를 수식하는 말은 'k리그 출신'이였다. 현재는 언론에 잘 나오지 않는데다 나와도 분데스리가 득점왕으로 수식되는편. 안양 치타스 시절부터 FC 서울을 응원했던 팬들에게는 종종 추억의 선수로 언급된다.
- 조광래 감독이 본인이 그라피테를 키웠다는 식의 인터뷰를 많이해서 그라피테가 k리그에서 포텐터지고 분데스에서 성공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은사로 따지면 조광래보다는 위의 소아리스 감독이 더 은사에 가깝다. K리그 관련 언급도 웬만하면 하지 않으며 직접적으로 질문받는 경우에만 짧게 언급하는 편이다.
- 08-09 시즌 에딘 제코와 합산 54골을 만들었는데 이는 08-09 시즌 투톱 합산 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2위는 바르샤의 사무엘 에토와 리오넬 메시의 53골, 3위는 알레띠의 디에고 포를란과 세르히오 아구에로의 49골이다.
- VfL 볼프스부르크에서는 클럽 역대급 레전드중 한명으로 여겨진다. 그도 그럴것이 우승과는 연이 없었던 볼프부르크에 우승컵을 안겨준데다가 볼프스 소속으로 최초의 독일 올해의 축구선수를 수상했으니 말 다했다.
- 은퇴전에는 미남은 아니라도 나름 동안인 편이였는데 은퇴 후에는 수염도 기르고 하다보니까 나이에 비해 늙어보이는 편이다.[6]
5. 같이 보기
1 줄리우 세자르 · 2 마이콘 · 3 루시우 ⓒ · 4 주앙 · 5 펠리피 멜루 · 6 M. 바스토스 · 7 일라누 · 8 G. 시우바 · 9 L. 파비아누 10 카카 · 11 호비뉴 · 12 고메스 · 13 다니 알베스 · 14 루이장 · 15 T. 실바 · 16 지우베르투 · 17 조수에 18 하미레스 · 19 J. 밥티스타 · 20 클레베르송 · 21 니우마르 · 22 도니 · 23 그라피테 |
둥가 |
[1] 외래어 표기법대로면 '그라피치'이나 국내에서는 '그라피테'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본 문서의 이름도 이를 따랐다.[2] /ɡɾaˈfit͡ɕ/[3] 공격형 미드필더[4] 수상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그라피치는 3위에 올랐다.[5] 32개국 본선[6] 그라피테는 디에고 포를란, 줄리우 세자르등과 동갑이다. 그 둘과 비교하면 그라피테가 약간 늙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