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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3 14:06:54

그로데고보 학살약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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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여담4. 관련 문서

1. 개요

1920년 2월 그로데고보에서 활동하던 최영호[1] 산하의 대한독립단 군인들이 그로데고보에서 학살 및 약탈등의 행각을 벌이다가 국민의회파 계열 단체에 의해 최영호가 암살되고 부대가 해산된 사건.

최영호가 지휘하던 부대들은 1919년에는 백계 한인부대여서 공산당에게 암살된 것으로 혼동되긴 하지만 최영호가 암살된 시점에 독립단은 백계 부대가 아닌 이동휘계 부대였고 오히려 최영호 부대를 해산한 단체가 스탈린 정권 하에 단체 처형되었다.

2. 상세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독립단은 원래 러시아 백위파 한인군대인 조선인국민대대하에 활동할 예정이었다.[2] 그러나 백위파 한인군대 계획이 실패하자 대한독립에선 이동휘홍범도와 협의한 후 부단장인 최영호 등을 급파하여 국민대대에 속한 단원들을 그로데고보 지방으로 이끌어 유격대 조직에 착수했다.[3]

1920년 2월 그로데고보에서 활동하던 최영호 등이 암살되었다. 1920년에는 이 사건이 일본 제국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라고 오보됐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최호림(2010년에 건국포장을 받은 독립유공자)과 일본측 첩보자료에 의하면 실체가 다르다.
독립단 지도자 최영호 등의 피살사건에 대하여는 일본측 첩보자료가 남아 있다. 일본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국지의랑이 제출한 첩보보고서자료에는 “급진파인 자는 그로데고보 부근 한인부락에 거를 가진 최영극(최영호)나는 자가 주주이다. 일.러관헌의 감시가 행해지지 않는 지방 한인부락을 횡행하며 양민을 협박하여 군자금이라 하며 기부금을 강징하고 있는 것 같다.”(중략) “강원도 출신의 폭도 주괴 최영호(39세)라는 자는 현금 그로데고보 부근의 한인부락를 횡행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부하는 400명이라고 한다. 그들은 두만강 결빙을 기다려 월강침입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고 한다.” (「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1920년 1월 8일자)」, 『불령단체잡건 조선인ノ부 재서비리아』 9 참조). 이어 국지의랑은 최영호의 사망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로데고보(한인은 고로지케라고 부름) 남방을 배회하며 양민을 고하여 낭자를 극하고 있던 폭도 수령 최영호는 1월 하순 노국관헌에게 총살되었다. 그 원인에 대하여 밀정의 말한 바에 의하면 최영호는 종래 양민으로부터 군자금이라고 하며 갹집한 금원을 그 부하 수십 명(수백 명이라고도 한다)과 함께 도식할 뿐만 아니라 행상인 또는 여객을 포하여 탐한다고 칭하고 부하로 하여금 이들을 살해하여 소지금을 약탈한 것도 심하지만 최근 추풍으로부터 동지방에 들어온 상인을 일탐이라고 하고 참살하여 그 시체를 최영호 자신이 숙박하는 집의 주인 김영수에게 명하여 몰래 매장하게 한 후 김영수의 말에 의해서 사건이 발각될 것울 두려워 하여 부하에게 명하여 김(영수)을 살해하였다. 그럼에 김의 자모는 이 일을 알고 곧바로 노국관에게 김영준의 집을 총화하였던 바 최영호 및 그 부하 2명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그외 2명은 잡혀 총살하였다고 한다. 신한촌에서는 우보에 접하고 최영호를 위한 추도회를 연다는 설 있지만, 또 반대하는 자도 있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한다(「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1920년 2월 14일자)」, 『불령단체잡건 조선인ノ부 재서비리아』 9 참조). [4]
최호림은 그로데고보에 주둔하던 “무장없는 군인 한 백여명으로 ‘독립단군대’라 일홈하고 사령관 최롱호이하 김종현, 전응호 등으로 농촌을 토색하며 량민을 학살하며 무례불측한 행동을 하다가 그 지방 일반주민의 배척을 받어 필경은 주민측으로 반란을 일으켜 사령관 최룡호와 그타 악행분자들을 타살하고 그 군인들을 구축하니”라고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최호림, 『원동변강고려인생활 역사초록』, 80~81쪽 참조).[5]

최영호는 결국 사살되었고 독립단도 사상자를 내고 해산했다. 최영호 암살과 독립단 해산을 벌인 단체는 지방부호들의 협력을 받은 국민의회 계열의 의군단 단원(최의준, 신우경, 마중철, 박인 등)이었다.
윤철규가 서간도로 귀환하고 독립단의 사령관인 최영호가 그로데고보로 가서 독립군단의 제1차 도수부대를 중심으로 유격대 조지에 착수하였으나 지방부호들의 협력을 받은 국민의회 계열의 의군단 단원인 최의준, 신우경, 마중철, 박인 등에 의하여 암살되었고, 독립단부대도 1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해산되고 말았다.[6]

최영호를 암살한 의군단 단원들은 나중에 스탈린 정권에게 총살됐다.
최영호 등을 살해한 마중철·박인 등 13명은 1929~1932년 소비에트정부 기관에서 총살되었다고 한다.[7]

3. 여담

1958년에 사망한 동명이인 최영호(1890) 의사가 있는데 절대 동명이인 최영호 의사(1890년생)와 혼동하지 말자.

4. 관련 문서



[1] 1920년 사망[2] 반병률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p.41~44 대한독립단이 백위파 군대에 배속된 과정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있다. 국내외의 청년들이 몰려와 감당이 되지 않아 백위파에게 보냈다는 설, 백위파의 억류에 의한 강제배속설이다.반병률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p.165~167[3] 반병률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p.41~44[4] 반병률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p.172~173[5] 반병률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p.173[6] 반병률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p.167[7] 반병률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p.172~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