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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14:01:04

극결

진(晉)의 정경(正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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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 극성자
郤成子
희(姬)
극(郤)
결(缺)
아버지 극예(郤芮)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97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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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경(卿). 조돈이 죽은 601년부터 본인이 죽는 597년까지 진나라의 국정을 맡았다. 필 전투가 일어나기 몇달 전에 죽는다. 순림보가 이어서 집정이 되었으나 정권을 잡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필 전투에서 대패하게 된다.

2. 생애

진혜공을 따랐으며 진문공이 즉위했을 때 반란을 일으키려 한 극예의 아들이다. 극예가 죄를 지었으므로 그의 아들인 극결은 스스로 밭일을 해야할 정도로 몰락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서신[1]이 밭일을 하는 극결과 음식을 나르던 극결의 처가 서로 공경하길 손님 대하듯이 하는 모습을 보고 문공에게 극결을 천거한다. 이 일화는 소학과 동몽선습 등에서 부부간의 예의를 설명할 때 인용되는 일화이기도 하다.

문공이 극결의 부친이 죄를 지었는데 괜찮냐고 묻자 서신은 순 임금이 곤을 죽였지만 우를 등용한 일과 관중이 환공을 죽이려 했지만 환공이 그를 재상으로 삼아 공적을 이룬 일을 예로 들며 군주가 선한 이를 택하여 쓰는 것이 옳다고 간언한다. 그 말을 들은 문공은 극결을 하군의 대부로 삼는다.

기원전 627년, 백적(白狄)이 진나라를 침공하여 기箕 땅까지 들어온다. 8월 무자일(22일), 진 양공이 기에서 적을 격퇴하고 극결은 백적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았다. 이 전투에서 진나라의 중군장 선진이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전사한다. 기에서 돌아온 양공은 선진의 아들 선저거를 상경에 명하고 중군장으로 삼는다. 서신은 극결을 등용한 공로를 치하하며 중경을 명하고 후사가 없는 선모(先茅)의 식읍을 하사했다. 극결은 하경을 명하고 극예의 식읍이었던 기冀 땅을 돌려주었다. 다만 군직은 내리지 않았다.

기원전 620년, 극결이 조돈에게 과거에 위나라가 복종하지 않아 정벌하여 땅을 빼앗았으나 오늘날 두 나라가 화목한 지 오래니 땅을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조언한다. 조돈은 그 조언에 만족했다.

기원전 616년, 극결은 노나라의 숙중혜백(叔仲惠伯)과 승광(承匡)에서 회합했다.

기원전 615년, 진秦이 전의 패전을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기마(羈馬)를 빼앗았다. 진晉이 군사를 동원하여 방어했다. 극결은 상군을 지휘하고 유변이 그를 보좌했다. 유변이 진秦군이 도망칠 때 황하로 몰아붙이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하지만 서갑[2]과 조천[3]이 반대하여 실행하지 못한다. 그 틈을 타서 진秦군은 도망친다.

기원전 614년 여름, 진晉은 진秦이 사회를 중용하는 것을 우려하여 회의를 열었다. 조돈은 수회[4]가 진에 머물고 가계[5]가 적狄의 땅에 머무는 것을 걱정하여 대책을 물었다. 순림보는 가계를 복귀시키길 추천했고 극결은 수회를 복귀시키길 추천했다. 진나라는 극결의 의견을 택하여 계책을 써서 사회를 복귀시킨다.

기원전 612년, 진나라는 작년에 신성에서 이뤄진 회합에 불참한 채나라를 정벌한다. 극결이 상군과 하군을 거느리고 채나라를 공격한다. 그해 6월 8일, 채나라를 공격하여 성하지맹을 맺고 귀국한다.[6]

기원전 601년, 서극이 고질이 있어 극결이 국정을 맡았다. 극결은 서극을 추방하고 그를 대신해 조삭을 하군좌로 삼았다.

기원전 600년, 극결이 진군을 이끌고 정나라를 구원했다.

기원전 598년, 극결이 여러 적狄 부족들과 화친을 추구했다. 적적赤狄에게 시달리던 그들은 진나라에 복종하고 가을에 회합을 가졌다.

기원전 597년, 순림보가 정권을 잡았다. 극결이 죽었다는 기록은 따로 없지만 극결이 죽어서 순림보가 뒤를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진문공의 측근 중 한명이다.[2] 서신의 아들[3] 조돈의 종제[4] 사회를 가리킨다.[5] 호언의 아들 호야고를 가리킨다.[6] 성하지맹은 도성 성문 바로 앞에서 조약을 맺는 것으로 굉장히 치욕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