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봉화 금씨[1] |
출생 | 1874년 2월 25일 |
경상도 순흥도호부 단산면 하단곡리 (현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 질막마을) | |
사망 | 1914년 10월 21일 |
서대문형무소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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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금달연은 1874년 2월 25일 경상도 순흥도호부 단산면 하단곡리[2]에서 아버지 금석주(琴錫周)와 어머니 안동 권씨 권덕성(權德星)의 딸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05년 영주에서 김낙임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1907년 순흥군의 일본군 헌병 분견소를 비롯하여 인근 일대의 일군과 접전했다. 이때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1907년 음력 8월에 휘하 포군 수십명을 거느리고 이강년의 중군장 김상태(金尙台)의 진중으로 찾아갔다. 이후 이강년을 만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달연이 김백우(金白愚)선생께 몸을 바친지 해가 넘었사온대, 지금 백우선생의 명으로 감히 뵈오니 죽이건 살리건 처분대로 하옵소서."
이강년은 도독장(都督將) 이만원(李萬源)을 불러 금달연을 별초종사(別抄從事)로 임명케 하였다. 이후로 이강년의 종사부에서 활동하다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는 김상태와 함께 의병을 수습하고 그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영주 단양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1909년 7월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종신형에 처해진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14년 10월 21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금달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